〔Hidden Hero〕 단지동맹 (斷指同盟)의 12인
1909년 2월 7일 (3월 5일) 러시아 그라스키노(延秋) 근처 카리(下里)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결성된 소규모 결사대.
안중근은 1909년 그라스키노 근처 카리에 있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여관에서 김기룡, 백규삼 등과 만나 의병활동 방안을 협의하고 동의단지회란 소규모 결사대를 결성하였다. 12명의 동지는 왼손의 약지(藥指)를 끊어 피로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자를 쓰며 맹세하였다.
국가보훈부 등에 따르면 ‘단지동맹’은 안중근을 필두로 강순기, 강창두, 김기룡, 김백춘, 김천화, 박봉석, 백규삼, 유치홍, 정원주, 조응순, 황병길(가나다 순) 등 12명의 독립운동가가 대한독립 쟁취를 위해 맺은 동맹을 말한다.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던 곳(연해주 연추 하리, 크라스키노).
안중근의 단지동맹(斷指同盟)
- 안중근 등 12인 에국지사 "대한독립 네 글자 손가락 잘라 혈서 쓰고, 국가의 원수 이토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 죽일 것" 결의함
- 동의단지회(단지동맹斷指同盟)는 의병 투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항일투쟁 방안 모색하는 의열투쟁(義烈鬪爭) 계기 마련함
- 안중근 의사 순국 후 열한 명 단지동맹 동지들,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후세 교육, 국권 회복에 일생 바쳐
12인의 애국지사가 혈서로 남긴 태극기/해동사 전시실
뤼순감옥의 안중근 의사와 수인(手印)/장흥군 해동사 전시실.
◆ 안중근의 시련
안중근의 일본군 포로 석방과 영산전투 패전으로 인해 대한의군부대는 사실상 와해 되었으며, 연해주 독립전쟁의 최대 후원자인 독립운동가 최재형 또한 러시아의 탄압과 겁박으로 인해 무장투쟁 지원을 포기하고 문화·교육·언론사업으로 전환해 민족계몽 운동에만 전념함으로써, 연해주 일대에서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은 아픈 흔적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많은 동지를 잃은 안중근은 동포들의 신뢰를 잃고 죄책감에 휩싸여 이곳에서 다시 의군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중근은 방황하며 새로운 동지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다.
안중근은 연해주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후원은 커녕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눈초리뿐, 더 이상 의병을 모아 무장투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중근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을 찾아 연해주 한인 마을 ‘연추’로 돌아갔다.
◆ 단지동맹(斷指同盟)
1909년 3월 5일 안중근은 황병길·백규삼·김기룡 등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연해주 한인 사회의 중심지 연추(현 크라스키노) ‘하리’의 조그마한 여관방에 모여 동지들을 향해 비장한 각오로 연설을 시작한다.
“동지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 투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소.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으니 좀 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오.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 네 글자를 혈서로 쓰고, 3년 안에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합시다”라며 목숨 건 투쟁을 호소한 것이다.
안중근의 호소는 변치 않을 항일투쟁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몸의 일부인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자는 중대한 결심이었다.
안중근은 열한 명의 동지들의 뜻을 한데 모았다. 먼저 단지(斷指)를 해야만 하는 의미와 목적을 단지동맹 취지문에 담았다. 그 핵심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뜻을 모아 손가락 하나를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증거요, 둘째는 일심 단체 하는 표(標)라, 오늘날 우리가 뜨거운 피로 청천백일하에 맹세함으로써 결코 변치 않을 각오를 새기자”라는 결의였다.
안중근의 비장한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열한 명의 동지들은 목숨 바쳐 대한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왼손 약지를 잘라 피로써 맹세한다.
이것이 대한독립운동사에 구국의 뜻을 함께한 동지들의 뜨거운 피로 기록된 ‘동의단지회(단지동맹 斷指同盟)’다. 단지동맹은 단지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는 차원을 넘어 의병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항일투쟁의 방안을 모색한 의열투쟁(義烈鬪爭)의 전환점이었다.
훗날 단지동맹(斷指同盟)에 참여한 열두 사람들에 대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동의단지회’ 동지 독립운동가 조응순 씨는 “영산전투 이후 각지 각파로부터 동지 12인을 가려 뽑아 결사를 단행하고, 열두 명의 단원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은 뒤에 열두 사람의 피를 사발에 모아 솜에 적셔 태극기 전면에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외친 후 천지에 맹세하고 흩어졌다”라고 증언한다.
◆ 안중근의 참회
안중근의 단지 혈서 맹세는 자신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한 전우에 대한 참회의 피눈물이었으며,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서 결자해지 하겠다는 피의 맹세였고, 한때 러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지지했던 안중근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안중근은 한때 “백인 러시아세력이 침략하니 동방의 황인종인 청과 일본, 조선이 힘을 모아 백인세력에 맞서 싸우자”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 평화론에 대해 찬성하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응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강제와 협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우리 민족을 탄압했으며, 1907년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는 등 악행을 저지르며 동양평화를 저해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에 의해 동양평화가 유린당하자,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속았음을 후회하며 통렬히 반성한 것이다.
◆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취지문
안중근은 <동의단지회 취지문>에서 남의 나라가 도와주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로지 2000만 동포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생사를 뛰어넘어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회원들이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쓴 태극기와 단지동맹 동지들의 손가락은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연해주와 만주 지역 한인 동포들의 대한독립을 향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기에 충분했다.
안중근은 뤼순 법정에서 “단지(斷指)의 목적은 대한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함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어떠한 방법과 수단도 가리지 않고 감행할 생각에서 한 것이다. 단지(斷指)한 당시에는 민심이 어지러웠고, 또한 나를 믿는 자가 없었으므로 나는 국가를 위해 진력하는 열성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斷指)한 것이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라고 진술한다.
이와 같은 안중근의 진술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고 해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뜻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단지동맹(斷指同盟)의 목적은 유효하다”라는 안중근의 신념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 열한 명의 단지동맹 동지들은 단지동맹 때의 초심을 잃지 않았고,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후세들의 교육에 일생을 바친다. 이처럼 12인의 피로써 맹세한 ‘동의단지회’ 결의는 나라 잃은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았다.
2023.02.20
정성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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