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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Hero〕 최연소 독립지사! 유동하

Paul Ahn 2024. 8. 17. 21:18

Hidden Hero〕 최연소 독립지사! 유동하

 

《유동하 지사》

https://youtu.be/y81JTpL7iHg?si=KQIyjTjo75aFFlTM

 

유동하(1892~1918) 가장 나이도 어리고 안타까운 인물이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국경도시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약방 하던 유경집에게 러시아 통역을 구하자 유경집은 그의 아들 유동하(18세)를 대동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채가구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 일행에게 전보를 쳐 이토 일행이 10.26 아침에 하얼빈에 도착한다고 알렸다. 이로써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출소 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고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국민일보(www.kmib.co.kr)

2020-04-04 08:00

정상규 작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숨은 공로자 "유동하 선생"

(koya-culture.com)

 

유동하 선생은 1909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소식이 보도되자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1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이후 러시아로 복귀하여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09 10 26일 안중근의거로 체포된 유동하와 우덕순, 조도선 등은 심문과 재판과정 내내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과 위증으로 일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는 시종일관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하였고 그 외의 관련자들도 사전에 약속한 내용만을 진술하였다.

 

1909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한 결과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가 추천되었으며,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과 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한 뒤“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의거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위해 출범한 결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날, 거리에서 입수한 신문에이토 히로부미가 25일 장춘역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브체프를 만나려고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들은 먼저 하얼빈 역 주변을 미리 답사하면서 치밀하게 의거계획을 수립하였고, 거사 당일인 10 26일 오전 7시 경에 하얼빈 역으로 나와 경비가 있었으나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어서 역 구내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상오 9시경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안중근 의사의 3발의 탄환을 맞고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으며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30분 후에 69세를 일기로 절명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의거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의거 후 유동하 선생도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고, 재판과정에서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한 죄목으로 징역 1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후 1911 8 22일 상오 9시에 여순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부친과 함께 약국을 경영하며 농사도 짓고 초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7년 봄, 부친과 함께 남러시아의 싸말리아로 들어갔으며, 10월의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시베리아에까지 볼세비키혁명의 여파가 미치면서 선생도 볼세비키 사상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혁명군에 가담하여 활동 하던 중, 1918년 가을,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싸말리야 강가로 끌려가서 교두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유동하 선생을 2008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

2015.02.21 05:25:55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폴란드 한의사 유경집

(kmib.co.kr)

 

‘뛰어난 의술을 펼친 조선인 한의사

‘구한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성공한 사업가

‘안중근 의거를 도운 독립운동가 유동하의 아버지

‘안중근 의거를 도운 독립운동가 김성백의 사돈

 

이 모든 사람은 동일인물이었다. 지금부터 새로이 발견하고 찾아낸 이 인물을 세상에 알린다.

오른쪽부터 유경집, 김준연, 유경집 부인.  

 

일제강점기 러시아에서 능숙한 사업수완을 발휘한 조선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경집(劉敬緝 ?~1938). 또 다른 이름 류초시, 류승렬. 유경집은 한의사가 되었고, 고향 원산을 떠나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살다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한방 병원을 설립해 부호가 됐다. 그는 평소 약재를 하얼빈에서 자주 가져왔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고려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사업수완이 좋아 지역 한인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00년대 초반, 유경집은 러시아 장교들과 돈독한 인맥을 형성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부호들과도 가까웠다. 이 중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페치카)와 특히 가까웠는데, 최재형이 대동공보사(신문사), 동의회(의병조직)를 조직할 때 비밀리에 힘을 보탠 것으로 보인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동의회 조직에 가입시킨 뒤 함께 의병 활동 및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암살 의거를 후방에서 지원한, 초기 상해임시정부 재무부장에 임명된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어느 날 안중근이 유경집을 찾아와 이등박문 암살 의거에 대해 논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1909 10월 러시아령 코트지로의 유경집 자택에서 아들 유동하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7인 동맹을 조직했다.

 

안중근이 거사를 모의하고 이동하는 과정 중 기차 철도 환승 시간에 역 가까이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원래부터 잘 알던 유경집의 집에 들러 그의 장남(유동하)을 통역으로 부탁했다는 것이 안중근과 유동하의 일관된 일본 심문조서 진술 내용이다. 이 시기 유경집은 한의사로서 명성이 있었고 아들 유동하를 하얼빈에 보내 약재를 구하도록 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유동하와 안중근 등이 김성백의 집에 3일간 머물렀다는 것, 안중근이 쓴 러시아어 편지를 유동하가 써주었다는 것 역시 공통된 진술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사건으로 안중근은 사형, 유동하는 1 6개월간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유동하는 하얼빈 의거가 있던 그 날 하얼빈 역사 안에서 안중근과 함께 코레아우라를 외친 대한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이 나이 18세였다. 거사를 도운 김성백은 유경집의 사돈이다.

 

상식적으로, 이토록 큰 거사를 보통 사이가 아니고서야 발설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안중근과 유경집의 친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 전부터 동지로서 마음을 나눈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18세 유동하의 안중근 의거 참가는 기실, 유동하의 결정 이전에 유경집의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이동 중에 포그라니치나야에 내린 것도, 역 근방에서 가까운 유경집의 집을 찾은 것도, 의거 전 23일을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며 의거 준비를 한 것도, 그 김성백의 집으로 안내한 유동하와 유경집의 사돈(사위 집안)인 김성백의 집안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모든 결정을 18세의 어린 유동하 단독으로 했다거나, 혹은 러시아 동아시아 지역에 금방 도착해서 길 안내와 통역을 부탁해야 했던 안중근 단독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거 뒤에는 독립운동단체 국민회 원동위원부의 협력과 유경집이라는 한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등박문이 안중근에게 암살된 후 유경집 집안은 피난길에 올랐다. 계속해서 이사하며 도망 다녀야 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는 기억하지만, 그로 인한 남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못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에 의해 10월 혁명이라 불리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유경집의 인생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쳤다. 한의학 병원을 개업하여 부를 축적했던 그는 부르주아’, 즉 인민의 적이라는 무서운 딱지가 붙어 프롤레타리아(노동자)들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사뭇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탐관오리의 대명사와 흡사했다. 즉 부자여서가 아니라 당시 부자는 대다수 부패하고 권위적이었으며, 노동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경집은 선의의 피해자이지만, 그걸 설명할 기회도 없이 자신이 일궈놓은 모든 부와 건물, 부동산을 전부 내버려 둔 채 폴란드계 러시아인 아내를 데리고 황급히 폴란드 국경을 건넜다. 이렇게 최초의 폴란드 거주 한국인이 탄생했다. 한의학 병원을 개업해 부를 축적했던 그는, 한순간에 무일푼 거지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사랑하는 아내, 한의학 기술, 친근하고 외향적인 성격뿐이었다.

 

폴란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유경집은 다시 한번 사업수완을 발휘해 바르샤바의 중심 거리라 할 노비 시비아트’(Nowy wiat·신세계)에서 큰 저택을 짓고 폴란드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한방 병원을 이룩해 다시금 부호가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여러 가지로 바꿔가며, 전혀 새로운 인물로 살았고, 당시 폴란드, 독일 등 극소수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정착금, 장학금, 생활비 등을 지급하며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국위 선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것이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한 한 애국자의 퍼즐을 맞춰 찾아낸 내용이다. 어딘가에는 사업가로만, 어딘가에는 한의사로만, 어딘가에는 민족운동가의 조각으로 나와 있던 한 인물. 서로 다른 직업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유럽을 여행한 조선인 지식인 유학생들이 먼 타국에서 부자로 성공한 재류 동포의 초청을 받아 잘 대접 받았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 기사에 남아있다. 유학생들을 정거장에 마중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한 이 재류 동포 폴란드 의사 모씨’, 이름도 성도 없는 그는 바로 한의사 유경집이었다. 그의 말년은 조선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일이었다. 유경집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 1936년에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가 1938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애국자였으며, 한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