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Hero〕 아! 1910년 3월 26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사살 시킨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뒤 러시아 검찰관 앞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후 일본영사관으로 인계가 되었다. 일본영사관에서 ‘미조부치’ 검찰관이 신문을 하면서 “이토를 왜 죽였는가?”라고 묻자 안중근은 아래와 같이 답했다.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安 義士, ‘열 다섯’가지 죄목 답변
01. 대한제국 민 황후를 시해한 죄
0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0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04. 무고한 대한인 들을 학살한 죄.
05. 국권을 강탈한 죄
0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0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0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09.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 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대한인이 스스로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 무사한 것 처럼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라고 이토의 15가지 죄를 열거하자 일본 검찰관은 놀랄 뿐이었다. 그 검찰관은 또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동양의 열사라 하겠소 당신은 열사이니까 사형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것이 못된다. 이 뜻을 속히 일본 천황에게 알려라. 그래서 속히 이토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서 동양의 위급한 형세를 바로잡도록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안중근을 지하실 감옥에 수감시켰다.
뤼순감옥 관리들 및 간수 대부분 안중근 의사에게 후대
5일이 지난 후 “오늘은 뤼순으로 이송할 것” 라고 안중근 에게 통보를 했다. 그때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그리고 그 외 알지 못하는 사람2~3인이 함께 결박돼 기차를 타고 하얼빈 역을 떠났다. 그날 장춘 헌병대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다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경찰에게 뺨을 세차게 맞았다. 이에 안중근이 욕을 하자 헌병장교가 그 경찰을 끌어낸 후 안중근 에게 “일본과 대한국 간에는 이같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 화를 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11월 3일,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수감이 됐다. 수감이 된 후 전옥(典獄), 그리고 간수계장, 일반 관리들이 안중근을 후대했다. 이에 안중근은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했다. ‘같은 일본인인데 어째서 이같이 서로 다른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횡포가 심하기가 말 할 수 없는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들은 어째서 이같이 후덕한가. 종자가 달라서 그런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권세를 쥔 이토가 악하기 때문에 그렇고 뤼순에 있는 일본들은 이곳 도독(都督)이 인자해서 그 덕에 감화가 돼 그런 것인가’ 라고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일본 검찰관은 안중근 에게 항상 후대하고 신문을 한 뒤에는 언제나 담배를 줘 서로 담배를 피우면서 토론도 했다. 이때 조선총독부 경시 일본인 ‘사카이’가 왔는데 그는 한국어를 잘해 안중근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안중근이 사카이에게 물었다. “일전에 영국, 러시아, 두 나라 변호사가 왔었는데 일본법원이 정식으로 허가를 해 준 것인가?” 그러자 사카이는 “그렇다. 참말이다” 하기에 안중근은 다시 “과연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특별한 사례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일에 해로울지언정 이로움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수감 기간중 전옥 ‘구리하라’와 간수계장 ‘나카무라’는 안중근에게 매주 목욕을 시켜주고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사무실로 데려가 담배, 과자를 주었으며하루 세끼 쌀밥, 내복으로 고급품을 갈아입게 했고 솜이불, 과일, 우유등도 주었다. 이런 물품들은 ‘소노끼’가 특별히 보내준 것이고 ‘미조부치’ 검찰관은 닭고기, 담배 등을 넣어주었다. 그 후 안중근은 친동생인 정근, 공근을 면회로 만났고 동생들에게 대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 천주교 신부를 데려오는 일 등을 시켰다.
安 義士, “내게 죄가 있다면 어질고 약한 대한인민이 된 죄”
그 후 재판에서 정대호, 김성옥 등 5명은 무죄로 석방이 되었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만 남아서 함께 피고로 출석을 하게 되었는데 방청인들은 수 백명이 되었으며 대한국인 변호사 안병찬, 영국인 변호사도 참석을 했지만 변호권을 주지않아 그들은 방청만 할 따름이었다.
그때 재판관이 신문을 하는데 안중근이 자세한 의견을 진술하려고 하면 이상하게도 재판관은 말을 못하게 했다. 이때 안중근은 ‘내 말 속에 칼이 들어있어 그러나, 총과 대포가 들어있어 그러나. 맑은 바람 한번 불면 쌓였던 먼지가 모두 날라가는 것과 같이 다 그런 것 이리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내가 이토의 죄명을 말하는 중에 고메이 천황을 죽인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고 생각을 했다.
조금 후 재판관이 다시 출석하여 안중근에게 “다시는 그 같은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때 안중근은 또 생각을 했다. ‘판사가 법을 몰라서 이러나. 천황의 목숨이 대단해서 이러나. 이토가 임명을 한 관리라서 이러나. 어째서 이러나. 가을바람에 술이 취해서 이러나. 오늘 내가 당하는 일이 생시인가 꿈인가. 나는 대한국민인데 왜 일본감옥에 갇혀있나. 더욱이 일본의 재판을 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한 사람인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거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것이 꿈 속 세계냐. 만일 꿈이라면 어서 깨고 확실히 깨려무나!’
안중근은 재판관에게 말했다. “재판관 마음대로 하라.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겠다” 그 이튿날 검찰관이 피고의 죄상을 종일토록 입술과 혓바닥이 닳도록 말하다가 기진해서 끝내고 마침내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고 구형을 했다. 이에 안중근이 사형 구형 이유를 물으니 “안중근 같은 피고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많은 대한인이 그 행동을 본받아 인본인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안중근은 천번 만번 생각해 봐도 이유를 분간할 길이 없어 의아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가 안중근을 변론했다.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 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 아니하다. 더구나 대한인 에게는 일본의 법 관할권이 없다.”고 말하자 안중근은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 원한으로 남을 죽인 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 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즉 만국형법과 국제공법으로 재판하는 것이 옳다” 라고 말했다.
이틀 후 재판관은 선고를 했다.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우덕순 3년징역, 조도선 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 한다” 이에 안중근은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느냐’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은 뒤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말했다. ”맞다.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어질고 약한 대한제국 인민이 된 죄로다“ 그 뒤 안중근은 전옥 ’구리하라‘의 안내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사형판결에 불복 한다“면서 그 사유와 동양대세, 평화정략에 대한 의견을 말하자 법원장이 듣고 난 뒤 감격하면서 말했다.
“동양평화론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연기 허가해 달라”
日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특별 허가 할 것이니, 걱정 말라”
“내가 그대를 깊이 동정하지만 정부의 방침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다만 그대가 진술한 의견만은 정부에 품신 하겠다“고 말하자 안중근은 ”고맙다. 만일 허가해 준다면 ‘동양평화론’ 한 권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춰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법원장은 ”어찌 한 달 뿐이겠나.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를 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말하자 안중근은 항소권을 포기했다.
그 후 안중근은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때 법원과 감옥 관리들이 안중근의 필적을 받기위해 비단과 종이 수 백 장을 사 넣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특별히 친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장 ‘아오끼’요 또 한사람은 간수 ‘다나까’ 였다. ‘아오끼’는 성질이 어질고 공평하고 ‘다나까’는 한국어에 능통하여 안중근을 진심으로 돌보아 줘 두 사람과는 정이 들어 서로 형제와 같았다. 그리고 그 후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32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했다.
<본 내용은 안중근 의사 ‘옥중자서전’ 에서 류재복 기자가 발취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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