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Hero〕 하얼빈 의거의 세 동지, 우덕순·조도선·유동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 차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연추(크라스키노, 煙秋)를 출발하여 포시에트를 경유하여 10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이때 함께 거사를 도모할 세명의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를 규합했다. 특히 우덕순은 함께 의병 전쟁을 하였던 동지였다.
@우덕순
우덕순의 본관은 단양(端陽)이며 호는 단운(檀雲), 다른 이름은 우연준(禹連俊)이다. 그는 제천 근서면 황석리 출생으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1880년(고종 17년) 2월 26일 태어났다. 그는 마을 서당을 다니다가 개화에 영향으로 상경했다.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그는 독립협회에서 애국계몽단체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05년 한일병합 후 러시아로 건너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초행상을 하였다. 여기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公報)’의 모금인(회계원)으로 일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알게 되었다.
안중근과는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의병대장 이범윤 부대에서 국경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전투 후 안중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구하러 마을로 갔다가 일본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함흥재판소(咸興裁判所)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먼저 수감된 이창도와 의병 김재익의 도움을 입어 탈옥을 한다.
1909년 봄 그는 러시아 연추에서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해 결사보국을 맹세했다. 그는 하얼빈에서 발행되는 ‘원동보(遠東報)’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 소식을 보았다. 그리고 최재형 집에 머물던 안중근과 의논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보사의 사장겸 총무인 유진률(兪鎭律)을 불러 무기를 부탁하였더니, 그는 곧 여비 100원과 권총 두 자루를 주선하여 주었다.
두 사람은 결행 지침을 결정하고 하얼빈으로 와서 통역으로 유동하와 조도선을 만난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조도선과 함께 만주 동청철도의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蔡家溝)역에 가서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기로 한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 하얼빈과 두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간다.
10월 26일, 우덕순은 새벽녘에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오전에 이토가 죽은 상황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일본군에 넘겨져 각기 다른 열차 칸으로 조도선·유동하와 함께 여순으로 이송된다. 각기 따로 조사를 받던 중 공판 5일 전인 2월 2일에야 안중근을 만나 10월 26일의 일들을 들었다.
그는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반에 최후 판결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안병찬 변호사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정근, 공근, 사촌인 명근이 참석한 가운데 네 명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우동하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그는 3월 26일 안 의사 순국 후, 고인의 추도 자리에서 생을 달리한 안 의사를 접한다.
그는 함흥에서 탈옥한 일이 드러나서 다시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경술국치(國恥)로 사형이 면제되고 일본 천왕의 사망으로 사면되어 출옥한다. 그리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제제합이(치치하얼, 齊齊哈爾) 만주리(滿洲里)에서 일본군 감시 하에 생활하다가 조국 독립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광복 후에는 흑룡강성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우대영(禹大榮)과 함께 동포의 귀국 일을 맡아했다. 1946년 3월 26일에는 안 의사 추도회 이후 결성된 ‘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의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8년에는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위원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6일 인민군에게 처형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9월1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해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를 앞두고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으로 시작되는 그의 한시‘거사가(擧事歌)’가 전한다.
@조도선
조도선은 1879년(고종 16년) 함경남도 홍원생으로 열여섯 살에 러시아로 건너가 이루쿠츠크(Irkutsk)에서 세탁업과 러시아어 통역 등의 일을 한다.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으로 갔다가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金衡在)의 소개로 안중근과 우덕순을 만나 이토를 처단하기로 뜻을 같이한다. 그는 우덕순과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대기하였으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에 서지 않고 통과하여 거사는 계획으로 그쳤다. 그리고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러시아인 부인은 강력히 항의를 하였다.
석방 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자료가 부족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즘 공연되는 뮤지컬 ‘영웅’에서는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고, 믿음직스럽고 정의로운 캐릭터로 소개된다.
@유동하
유동하는 당시 18세로 의거 동지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는 1892년 1월 5일 함경북도 원산 길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인 유경집을 따라 1902년경 러시아 국경지대 한인마을로 이주하였고 16살에 허희명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부친을 도와 약종상에 종사하던 중 1909년 3월, 부친을 찾아온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이런 인연으로 유동하는 안중근 의사의 통역을 맡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조도선, 유경집, 유동하 등과 함께 7인 동맹을 조직했고 구체적인 의거를 계획했다. 유동하는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동하는 하얼빈에 남아 채가구역으로 간 안 의사와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전보만으로 상황을 알 수 없던 안중근은 이토를 확실하게 사살하기 위해 채가구역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남기고 하얼빈으로 돌아온다.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의 항일투쟁지도자 김성백의 집에서 묵은 뒤 집을 나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한다. 의거 후 안중근 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김여수, 정대호, 정성우, 김성옥, 탁공규, 김형재, 김성엽, 김택신, 홍시준, 장수명, 방사첨, 이진옥 등 15명은 여순으로 이송된다. 그것은 일제의 관동도독부 관할지역인 그곳에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판하기 위함이었다.
안중근 외 의거 동지 3명을 포함한 8명은 11월 3일, 여순에 도착하여 여순감옥에 갇힌다. 유동하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한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른 유동하는 시베리아로 가서 한인동포사회에 애국계몽운동을 하였고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항일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많은 애국청년들과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했다. 1918년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잡혀 총살당하여 27살에 순국했다. 정부는 198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말씀•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Hidden Hero〕 아! 1910년 3월 26일 (0) | 2024.08.17 |
---|---|
〔Hidden Hero〕 최연소 독립지사! 유동하 (0) | 2024.08.17 |
〔Hidden Hero〕 한민회(韓民會) 회장 김성백, 그는 누구인가? (0) | 2024.08.17 |
〔Hidden Hero〕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 (0) | 2024.08.17 |
〔Hidden Hero〕 단지동맹 (斷指同盟)의 12인 (0) | 2024.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