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중국, 티베트 정부 해산
1959년 초의 티베트는 바야흐로 폭발 직전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1951년 티베트를 ‘해방’시킨 중국은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를 존중해 사회주의식 개혁 대신 자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캄과 암도 같은 지방에서는 폭력을 동반한 사회주의 토지 개혁과 사원 탄압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승려와 사원을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고 살아온 주민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 결국 주민들은 캄 지방을 중심으로 중국군에 대항하는 반군 게릴라를 꾸린다. 승려들의 네트워크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게릴라 조직망이 됐다. 이들 캄파 게릴라의 배후에는 중국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미국 CIA가 무기와 군사 훈련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 대항해 티베트의 자치를 회복하자는 반군의 메시지와 캄·암도의 참혹한 탄압상은 빠른 속도로 티베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59년 초엔 수도 라싸까지 들썩거렸다. 그해 3월1일 중국은 티베트 종교·정치의 수장인 14대 달라이 라마에게 “중국 군사 본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오라”고 초청한다. 대중 앞에 나서지 말 것과, 호위병을 거느리지 말고 오라는 주문이었다. 달라이 라마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소문이 라싸에 돌았고, 당일인 10일 수천명의 티베트 주민들이 달라이 라마가 머물고 있던 노불링카궁을 에워쌌다.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해 모인 군중의 염원은 중국 지배에 대한 분노로 폭발했다. 중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티베트 관료들이 우선 타격 대상이 됐다. 이어 티베트에 들어와 있던 중국 한족들로 향했다. 중국 정부는 가차없는 진압에 나섰다. 골칫거리인 티베트 반란 세력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개혁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중국군은 여세를 몰아 노불링카궁을 포위하고 28일엔 티베트 정부를 해산시킨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인도로 망명한 뒤였다. 훗날 달라이 라마는 회고록에서 “당시 노불링카궁과 라싸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대학살이 시작되기 전 나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고 썼다.
1959년 민중 봉기로 티베트인 8만5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티베트 전체 인구는 600만명이었다. 이듬해까지 8만여명이 달라이 라마를 쫓아 히말라야를 넘었다.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 정부는 전 세계에 흩어진 티베트 디아스포라의 숫자를 12만~15만명으로 보고 있다.
2011.03.27 21:19
최명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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