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1) 6.25 전쟁을 이야기하려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혹독하였던 그 전쟁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1899년 그가 한성감옥에서 사형수로 옥살이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사형수가 된 것은 한양 길거리에서 민중들을 모아 두고 고종을 폐위하고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국으로 만들자고 연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이 소문을 들은 고종이 어용 단체인 보부상들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가 연설하고 있는 현장을 보부상들이 습격하였을 적에 발차기를 잘하던 그는 발차기 솜씨로 몇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그의 동료 한 명은 현장에서 살해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가 도피하려고 보부상들이 몰려드는 반대편으로 피하려 하였을 때에 어느 분이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그 쪽으로 가지 말고 보부상들이 몰려드는 쪽으로 피신하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러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서서 그의 팔을 당기는 분을 보려 하였을 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상황이 다급하였던지라 보부상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드는 쪽으로 당당히 걸어 나갔습니다.
그러자 보부상들은 이승만이 자기들과 같은 패거리인 줄로 착각하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훗날에 그가 옥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가 배재학당에 다닐 적에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던 선교사들이 고종에게 그를 살려 줄 것을 청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은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을 살려 두면 나라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그의 사형을 면하게 하고 살려 주라고 청원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그를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해 주었습니다.
무기수로 바뀌자 그는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두가지 소원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자는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둘째는 민주주의 국가로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2)그가 배재학당에 다니던 시절에 그의 재능을 알게 된 선교사들이 고종에게 열심히 탄원하여 사형을 면하고 무기로 감형되어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것은 1899년 그가 크리스천이 된 지 5년 후인 1904년에 노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전케 된 직후입니다.
고종이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일본도 믿을 수 없고 중국도 믿을 수 없도다. 러시아 역시 믿을 나라가 못되는 도다. 이들보다 더 강한 나라가 없느냐? 하고 물은즉 신하들이 답하기를 미국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그럼 미국에 사절을 보내어 이 나라를 도와 달라고 하여야겠다. 미국에 사절을 보내자면 영어를 잘해야 할텐데, 이 나라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누군가?
그 말을 들은 한 신하가 답하였습니다.
영어라면 이승만이 제일입니다.
고종이 다시 묻기를 이승만이란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하고 물으며 즉시 불러오라 명하여 이승만이 고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졸지에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이 쓴 친서를 전달하는 의무를 띠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멀었습니다.
제물포 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배를 갈아타고 태평양을 건너가는데 2달이 걸렸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여 다시 말을 타고 워싱턴 DC, 미국 수도로 가는 동안에 일본이 조선을 합병케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지닌 고종의 친서가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라 잃은 무국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온 길에 학교를 다녀야겠다 생각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프린스턴에서 박사까지 받게 되어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 되었습니다.
(3)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 3년간은 엄청난 혼란기였습니다.
소련군은 먼저 38선 이북을 점령하여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을 앞세워 점령지인 북한 지역부터 공산화가 치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남한의 미군은 일본 점령지를 다스리느라 코리아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소련군은 스티코프란 탁월한 전략가가 주도하여 한반도 공산화 계획을 처음부터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무능한 하지 중장이 사령관이 되어 남한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시절 미군정청의 조사에 의하면 남한 주민들이 앞으로 세워질 나라의 체제를 민주주의 할 것이냐 공산주의로 할 것이냐는 질문에 무려 78%가 공산주의로 나가야 한다고 답하였습니다. 거기에다 공산당에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박헌영이란 지도자입니다.
그는 조직력, 선동력, 전략적 능력을 골고루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공산주의란 그릇된 사상에만 물들지 않았더라면 민족사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공산당이 국민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아 공산당 당원이 100만에 가까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추세로 계속 나갔더라면 박헌영 대통령이 나올 판세였습니다.
그런 판에 이승만 박사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박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앞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라야 겨레의 장래가 있다는 확신을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만일에 이승만이란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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