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정보지 ‘가로수’ 발판으로 1조 그룹 오너가 되다
이의범 SG그룹 회장은 지난 10년간 성장가도를 달렸다. 연륜이 있는 제조업체들을 하나 둘씩 인수합병하면서 단숨에 중견그룹을 일궈냈다. 이 회장은 1980년대 운동권 출신에서 생활정보지 가로수의 창업자로 변신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경영자다. 변신의 귀재인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매출 1조 원대를 바라보는 중견그룹의 오너로 도약했는지 포춘코리아가 상세히 살펴봤다.
SG그룹의 사명은 낯설다. SG세계물산, SG충남방적, KM&I 등 핵심 계열사 이름을 들으면 더 생소하다. SG라는 사명 만으로 주요 사업과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SG그룹은 지주회사인 SG&G를 통해 올해 포춘코리아 500대 기업 순위에서 352위로 당당하게 간판을 올렸다. 사실 포춘코리아 500대 기업 리스트를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300위 뒤로는 처음 들어보는 회사의 이름들이 수두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SG그룹도 그러한 기업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기업은 삼성, 현대차, LG, SK 등 주요 그룹이지만, SG그룹과 같은 알짜 기업들이 이들과 협심해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돼 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SG그룹은 2000년 이후 제조산업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세를 기록하며 중견기업으로 거침없는 성장을 이뤄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IT, 금융 등 첨단산업에 몰려간 사이 SG그룹은 섬유, 피혁, 제조 등 2차 산업의 토종기업들을 인수합병하며 성장가도를 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SG그룹의 한 우물파기 전략은 주효했다. 지주회사인 SG&G는 지난해 매출과 당기순이익에서 각각 9,311억 원과 198억 원을 달성했다. 올해 매출 1조 원 돌파도 시간 문제로 보인다. 과연 SG그룹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가로수 주인에서 그룹 오너로 변신하다
단기간에 SG그룹을 매출 1조 원대로 성장시킨 주인공은 바로 이의범(48) 회장이다. 지금은 직원 7,500여 명을 이끄는 중견그룹의 오너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직원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벤처기업의 CEO였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정보지 ‘가로수’를 1991년에 발간하며 경영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지방 중소도시에는 벼룩시장, 교차로와 같은 생활정보지가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반면 서울에는 생활정보지가 싹을 트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워낙 지역이 방대한 터라 벤처 자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의범 회장은 과감하게 서울을 공략했다.
이의범 회장은 포춘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활정보지 사업은 실수요자와 실공급자간 직거래 풍토를 조성해 최소의 비용으로 재화와 용역의 교류를 촉진하는 게 핵심입니다. 지역기반의 영세 소상공인들이 이용 가능한 홍보공간을 마련한다면 생활경제신문이 지역중심의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유력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회장은 가로수를 지금의 잡코리아와 같은 정보교류 사이트처럼 사람과 사람, 사람과 회사를 연결해주는 최고의 소통창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소비자광고를 무료로 싣다 보니 자금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익성이 악화되다 보니 동업자와 직원들마저 하나 둘씩 떠나갔다.
결국 창업 3년 만에 그는 최대 경영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마지막 전략카드를 뽑아 들었다. 무료로 게재하던 광고를 유료로 전환한 것이다. 천만다행이 유료화 전략은 시장에 적중했다. 소비자들이 오히려 유료 정보에 신뢰와 관심을 갖고 생활정보지 가운데 가로수를 더욱 챙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이었다. 위기는 또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서울지역에만 700여 개의 생활정보지가 넘쳐났다. 중앙일간지 마저 물량공세를 펼치며 이 시장에 뛰어들며 시장경쟁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의범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로수만의 저인망식 광고영업을 기반으로 경쟁지를 물리치며 선두를 지켜나갔다. 생활정보지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보니 가로수를 필두로 벼룩시장과 교차로가 대부분의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 다른 사업자가 들어올 수 없는 3강 체제를 확실히 지킨 셈이다.
2000년 4월 이의범 회장은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가로수의 사명을 가로수닷컴으로 바꿔 달며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상장의 기쁨도 잠시 경영환경이 다시 악화됐다. 2002년부터 인터넷 보급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생활정보의 전달 영역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격하게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의범 회장은 말했다.
“생활정보지 광고수요가 크게 줄면서 가로수닷컴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회사가 존속하기 위해서 사업다각화, 우량기업 인수 등 다양한 방안을 찾아야 했죠. 특히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을 모색했습니다.”
이의범 회장은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SG그룹이 지금의 규모로까지 성장한 가장 큰 동기는 역설적이게도 회사의 모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가로수닷컴의 경영상의 위기였어요.” 코스닥 진입 이후 수백 원의 자금을 조달한 이의범 회장은 우량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합병 하면서 몸집을 부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의범 회장은 1980년대 운동권 활동에 빠져있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재학 중에는 데모를 주도하다 무기정학을 맞은 경험도 있다. 군 제대 후 위장취업은 물론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뛸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를 운동권 출신에서 경영자로 돌려세운 결정적인 배경은 뭘까. 그는 과거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나날이 변모하는 한국경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체제를 비판하기 보다 변하는 세상에 뛰어들기로 마음 먹었다고 회고했다.
1990년 KT에 입사한 뒤 바로 벤처 창업의 길에 뛰어든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이의범 회장은 말했다. “첫 직장인 KT를 다니면서 중산층으로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무엇인가 도전하고 싶은 열망이 넘쳐 있는 상황이었죠. 제가 가로수를 창업하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변신을 발판으로 이 회장은 창업 10년 만에 가로수의 주인에서 중견기업의 오너로 첫 단추를 끼우게 됐다.
굴뚝산업에서 성장 열쇠를 발견하다
이의범 회장은 말했다. “인수합병을 검토할 때마다 굴뚝산업의 우량기업들을 눈 여겨 봤습니다. 제가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오랜 역사만큼 탄탄한 소싱과 마케팅 네트워크 그리고 기존의 우수한 연구인력들이 있었습니다. 경영상의 비효율을 걷어내고 잠재력을 이끌어내면 다시 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어요.”
이의범 회장의 M&A 전략으로 지난 10년간 인수한 기업은 KM&I, SG세계물산, SG충남방적, 고려피혁 등 현재 SG그룹이 보유한 대다수 계열사들이다. 이 가운데 세계물산과 충남방적은 과거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명맥이 있는 기업들이다. 그는 2000년 초반 자동차 산업의 성장세를 직감하고 2003년 무렵 자동차 시트를 생산하는 부품업체 KM&I를 인수했다. 이들 KM&I, SG세계물산, SG충남방적은 매출과 수익 면에서 SG그룹의 성장을 이끄는 삼두마차 역할을 한다.
이의범 회장은 설명했다. “KM&I는 한국GM이 위치한 인천, 군산, 창원에 공장이 붙어 있기 때문에 물류나 협력적인 측면에서 유리한 사업환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GM의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GM의 품질이 올라가는데 협력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죠.” 한국GM은 올해로 한국진출 10년을 맞았다. 현대·기아자동차의 텃세 속에서도 지난 10년간 1,500만 대의 차량을 판매하며 질주를 거듭했다. KM&I는 그동안 한국GM의 성과에 일조하며 동반 성장한 셈이다.
SG그룹에는 세계로 뻗어가는 패션 브랜드도 포진해 있다. 이의범 회장은 말했다. “SG세계물산은 자체 브랜드인 BASSO, BASSO home, af.f.z 등을 보유했습니다. 주로 OEM 제품을 생산하는 의류수출사업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앞으로 OEM 부분도 역량을 키워 ODM제품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품질과 기술력을 가지게 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ODM업체로 혁신하겠다는 이 회장의 말은 SG세계물산을 단순한 생산업체에서 개발업체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매출 1조원 초우량 그룹을 꿈꾸다
이의범 회장은 인수 합병한 계열사마다 대표이사를 다 맡고 있지는 않다. 인수합병을 검토할 때부터 해당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한 가지 예로 그룹의 핵심기업인 KM&I의 대표이사는 제가 아닙니다. 제가 인수를 했다고 경영까지 제가 잘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해당 산업분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경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들도 되도록 해당 사업의 임원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많이 듣고 따르는 편입니다.”
이의범 회장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은 SG그룹의 계열사들이 저마다 자사의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결정적인 토대가 됐다. 그는 회사의 미래가치보다 현재가치에 주목하는 경영전략가에 가깝다. 2000년대 M&A 시장에서 매물로 나온 신생 IT벤처보다 연륜이 있는 제조기업을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말했다. “인수합병한 기업들이 대부분 법정관리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기업들이었습니다. 모두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일해준 임직원들이 아니었다면 그 기업들의 정상화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의범 회장은 10년 단위로 대대적인 혁신을 일궈냈다. 첫 직장인 KT를 그만두고 1991년 생활정보지 가로수를 창업해 2000년 가로수닷컴을 코스닥에 상장했고 또 불과 10년 만에 다시 1조 원을 바라보는 중견그룹 반열에 회사를 올려놓았다. 연결재무제표 적용에 따라 올해 처음으로 포춘코리아 500대 기업 리스트에 모응?공개한 SG그룹이 다음 10년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SG그룹 프로파일〉
올해 포춘코리아 500대 기업순위: 352위
매출: 9,311억 원(2011년 기준)
이익: 198억 원(2011년 기준)
본사: 서울
직원: 7,500여 명
2012.11.28 07:14
‘가로수’서 굴뚝산업 키운 ‘팔색조’ (기업인)’서 굴뚝산업 키운 ‘팔색조’ 기업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105294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골프산업을 지목한 이의범 SG그룹 회장. 1964년생/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졸업/ 한국통신(현 KT) 근무 SG&G 대표이사/ SG그룹 회장(현) 용달차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중학교 시절 참고서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던 그에게 신천지가 생겼다. 학교 도서관. 학교 숙제를 할 요량으로 처음 들어갔는데 동서고금의 지혜가 거기에 다 있었다. 문예부에 가입해 책을 끼고 살던 학창 시절, 문학가도 꿈꿨다가, 물리학자도 꿈꿨다. 바둑도 책으로 배웠다. 한 수 두 수 둬보면서 게임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문학소년이던 여린 학생은 대학(서울대 계산통계학과)에 진학하면서 돌변했다. 민주화 열망이 높던 전두환정권 시절,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며 띠를 두르고 시위 현장에 나섰다. 밤에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야학 교사를 했고 방학 때면 위장취업을 했다. 그러다 철창행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입학 3년 만인 1984년에는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렇게 이의범 SG그룹 회장(51)의 청년기는 치열했다.
소위 열혈 운동권이었던 그가 지금은 어엿한 당대 매출 1조 기업가로 변신했다. 비결이 무얼까. 이 회장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88서울올림픽과 독일 통일이다. “학생운동을 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는 소식에, 독재국가에서 무리하게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망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세계는 서울올림픽을 극찬했습니다. 더구나 올림픽 이후 나날이 발전하는 한국 경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구나 싶더라고요.
더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위 사회주의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동구권이 다 무너지는 걸 보는 게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인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인데 거꾸로 자본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은 깨끗이 접고 대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위장취업이 아닌 첫 정식 입사한 회사는 KT. 그는 거기서 기간 통신사업의 흐름이며 대기업의 신사업 전략 등을 비록 어깨너머로나마 배웠다. 그러면서 ‘내 사업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힌 때는 1991년 여름. 과거 수배를 피해 내려간 고향(대전)에서 과외를 하면서 접한 생활정보지가 떠올랐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뭔가를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 서울에는 그런 생활정보지가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에 퇴직금을 합친 5000만원을 자본금 삼아 이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 최초의 생활정보지 ‘가로수’는 이렇게 창간됐다. “상표 등록을 하기 위해 여러 단어들을 찾아보는 중에 길가마다 가로수가 보이는 겁니다. 바로 가로수로 등록했지요.”
그는 전략적으로 서울 강남구를 사업지로 택했다. “남들은 가난한 동네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했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강남이 상권이 좋으니까 더 광고를 많이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적중했습니다. 광고 시장은 강남이 가장 컸으니까요.” 물론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건 아니다. 2~3년 정도는 죽도록 고생했다.
처음에 직원 2명을 데리고 시작했는데 편집 수준이 형편없었다. 신문을 내놓으면 할머니들이 바로 폐지 수거를 해가는 통에 그걸 막는 데도 힘을 쏟아야 했다. 또 창업 초기에는 소비자 광고를 무료로 싣다 보니 자금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돈을 못 버는 상황에서 당연히 동업자와 직원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결국 창업 3년 만에 그는 회사에 혼자 덜렁 남았다. 설상가상 단번에 경쟁사 2곳이 서울 시장에 진입했다.
이 회장은 이용자가 줄어들 것을 각오하고 광고비를 유료로 전환했다. 유료화 전략은 적중했다. 소비자들이 오히려 유료 정보에 신뢰를 갖고 ‘가로수’를 더욱 챙겨보기 시작했다. 한숨을 돌리나 싶은 순간, 바로 또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과당경쟁.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울 지역에만 700여개의 생활정보지가 넘쳐났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어려운 수성 기간을 거친 후 생활정보지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로수’ ‘벼룩시장’ ‘교차로’ 등 3강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후엔 승승장구였다.
경제가 호황기로 들어서면서 구인구직 광고가 넘쳐났다. 덩달아 수익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것도 딱 IMF 외환위기 전까지 얘기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람 뽑는 곳은 없고 구직자만 줄을 섰다.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는 구직자들이 ‘가로수’를 활용해 개인 구직광고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일간지마저 이 시장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생활정보지 성장도 둔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외환위기 직전 해외에서 들여왔던 윤전기도 속을 썩였다. 리스로 들여오면서 달러로 대금을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기계값이 사실상 두 배로 뛰었다. 일단 갚긴 했지만 그 때문에 회사 재무 상황은 아주 안 좋아졌다. “사업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사업하면서 어떤 상황이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걸 당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우리 기업들이 환율과 금융에 너무 취약했다는 결론을 냈다. 그길로 본격적으로 주식, 선물, 현물 투자 공부를 시작하고 직접 투자에도 나섰다. 2000년대 들어 벤처 붐을 타고 신흥 부자들 얘기가 회자됐다. 대부분 상장해서 얻은 차익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때 공부한 게 빛을 발했다. 윤전기 환차손을 입었지만 ‘가로수’는 2만~5만원 광고들이 계속 들어와 현금흐름이 괜찮았다.
상장 요건에는 부합했던 것. 2000년 상장에 성공한 가로수는 현금 여력을 갖추게 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적잖은 회사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반면 가로수는 점차 매출이 떨어지고 있었다. ‘단일 업종으로는 업계에 불황이 왔을 때 대처하기가 힘들겠구나’란 생각을 하고 추진한 게 M&A(인수합병)다.
하지만 2002년 첫 도전에서는 수업료를 톡톡히 냈다. 제도샤프로 유명한 마이크로를 인수하긴 했는데 노조와의 대화가 안 됐다. “중국산 저가 제품 때문에 회사가 고전하고 있는데도 노조가 막가파식으로 나오다 보니 도저히 접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1년 6개월여 만에 결국 회사를 정리했다.
이후 당장은 어렵지만 업력이 있는 제조업체들에 주목했다. 자동차시트 회사 KM&I, 바쏘 등 패션브랜드로 유명한 SG세계물산, 섬유원사업체 SG충남방적 등 이른바 굴뚝산업이었다. 남들이 모두 IT벤처를 고집할 때, 이 회장은 왜 첨단산업이 아닌 굴뚝산업을 선택했을까. 그는 “시장도 작고 마진도 적지만 안정적이라는 장점 때문”이라고 답했다.
“IT산업은 한 번에 엄청난 성장을 하기도 하지만 망하는 것도 금방이에요. 그뿐인가요. IT산업은 연구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영세한 벤처에서는 지속적인 투자가 어렵습니다. 반면 굴뚝산업은 어려워질 순 있어도 한 번에 망하지 않고 또 시간을 두고 관리하면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다. 또 역사가 오래된 기업은 탄탄한 납품, 판매, 유통망을 갖고 있고, 신규 마케팅 비용도 많이 들어가지 않아 수익성이 좋습니다.
제조업은 위험관리만 할 수 있으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위험관리란 재고관리, 외상매출금관리 등이지요.” 이에 더해 SG그룹이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오랜 역사만큼 마케팅 네트워크와 기존의 우수한 연구 인력들이 있었다. 경영상의 비효율을 걷어내고 잠재력을 이끌어내면 다시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그의 혜안이 먹혔고 이는 ‘1조 매출 기업인’ 반열에 오르는 초석이 됐다. 지금은 효자 기업들이 됐지만 다들 처음엔 속을 썩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에서 얻은 교훈을 떠올려 노조 설득에 진심을 다했다. 결과는 이 회장이 원하는 방향대로 돌아갔다. “자동차부품 회사인 KM&I도 처음엔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속한 회사여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KM&I 노조는 강성이면서도 막장까지 가지 않고 회사와 최소한의 대화를 해줬습니다. 업황이 좋아질 것이니 나를 믿고 회생에 동참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필요하면 회사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직원들의 마음이 열리더군요. 마침 자동차산업이 좋아져 회생 기회를 잡았고 지금은 그룹에서 매출액이 가장 큰,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충남방적을 인수했을 때도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는 법정관리인데 청소부와 식당 직원까지 정직원일 정도로 방만 경영이 심했습니다. 구조조정하고 아이템을 바꾸자 반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적자였던 회사를 인수 2년 만에 흑자로 바꾸니 맨날 싸웠던 노조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노조 명의로 ‘흑자전환’이란 플래카드를 붙여줬을 때 ‘이게 사업하는 맛이구나’란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지요.”
IMF 외환위기 이후 인수합병에 올인했던 그였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한동안 외부 매물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단다. IMF 외환위기는 몇몇 아시아국가에 한정돼 금방 회복될 것으로 봤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위기가 전 세계로 전염돼 불황이 섣불리 끝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SG그룹이 2013년 이후 골프장과 건설사 인수를 계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CC, 상떼힐CC 등 골프 관련 업체는 물론 SG신성건설도 한 식구가 됐다. 정점을 지난 것으로 평가받는 국내 건설과 골프산업에 이 회장은 왜 주목했을까. 우선 건설사는 그룹 보유 유휴부지를 개발하는 데 활용한다는 복안이다.
골프는 왜일까. 골프 인구는 매년 2~3% 증가하는 데 그치지만 골프장은 지난 10년간 연 10% 이상 늘어나 공급과잉이란 분석도 있는데 말이다. “부도나는 골프장이 늘어나는 바람에 공급과잉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봤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 골프장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골치를 썩일 때 과감히 전국 골프장을 사들여 프랜차이즈화하고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더불어 골프사업은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는데 선진국을 들여다보니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기기 시작하니 그렇게 되더군요. 지금이 역발상 투자의 기회라고 봤습니다.”
이 회장은 더불어 중국 관광객에 주목했다. 중국 관광객이 지금은 관광, 쇼핑에 치중하지만 소득이 높아질수록 레포츠를 즐기려는 욕구가 많아진다고 봤다. 또 상하이, 베이징은 인허가 문제 때문에 골프장 공급은 제한되고 이용 가격은 한국과 비슷하게 올라가고 있어 한국 골프관광이 하나의 트렌드가 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요우커(중국 관광객)를 잡기 위한 복안이 있다. 골프장 매물이 있으면 더 살 것”이라고 자신한다.
경영 승계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일까. 이 회장은 아직 50대 초반으로 젊고 슬하의 2남 1녀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다. “저는 능력 있는 오너가 경영할 때 회사가 가장 투명하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능력 있는 2세에게로의 승계는 회사의 지속 발전을 위한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만일 2세가 능력이 모자라면, 회사는 의당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져야 하겠죠. 단 그 경우에는, 반드시 감사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럴 해저드에 빠져 ‘주인 없는 회사’로 전락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의범 회장의 골프·바둑 사랑 잘하려 욕심내면 낭패, 경영과 비슷 이 회장은 골프와 바둑 마니아다. 바둑은 아마 5단, 골프 타수는 70대 후반을 친다. 더불어 이들 취미는 경영에 도움이 상당히 많이 되기 때문이란다. “둘 다 잘하려고 욕심을 내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를 줄이려고 차분하게 하다 보면 외려 상대방이 무너져 내게 기회가 온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바둑십결 중 ‘부득탐승(不得貪勝)’과 ‘신물경속(愼勿輕速)’이란 말을 좋아한다.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잃게 된다’ ‘경솔하게 두지 말고 한 수 한 수 신중하라’는 뜻이다. 이 회장은 “마음을 비우고 한 걸음 물러설 때, 큰 그림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구절들”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후배 기업인들에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하고도 능동적인 사고를 해 달라. 또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 회장은 바둑 소재 드라마 ‘미생’에 자사 브랜드 ‘바쏘’를 협찬했는데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반사이익을 얻기도 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
사진 : 류준희 기자 입력 2015.02.02 0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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