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 한국 천주교회는 그 시작을 이승훈의 영세(1784년)로 잡는다.
목차
Ⅰ. 서언
Ⅱ. 천주교의 전래
Ⅲ. 한국 천주교의 창설과 초기 박해
1. 한국 천주교의 시작 - 1784년 (이승훈의 영세)
2. 을사추조적발사건 - 1785년 (역관 김범우의 집)
3. 가성직 시대
4. 조선 천주교 최초의 배교자들 (이승훈의 배교)
Ⅳ. 주문모 신부의 전교활동
- 1794년 입국
- 1801년 순교
Ⅴ. 천주교회의 수난
1. 수난을 불러온 제 요소
2. 수난하는 천주교회
1) 신해교난 - 1791년
2) 신유교난 - 1801년
3) 조선교구창설
4) 기해교난 - 1839년
5) 병인교난 - 1866년
6) 병오교난
Ⅴ. 천주교회의 발전
1. 조선교구의 창설
2. 교회의 재건
3. 교회의 발전
Ⅵ.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형태
Ⅰ. 서언
여기서 살펴볼 것은 한국에 어떻게 해서 천주교가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또한 그 기원은 어디에서 두고 있는지를 살펴보자가 한다. 그리고 조선말에 있었던 천주교의 극심한 박해와 왜 천주교가 박해를 받아야 했으며 그 박해를 받으면서도 천주교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또 살펴볼 것은 천주교가 전해짐으로 인해서 어떠한 발전이 생기게 되었으며 천주교가 한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자한다. 그리고 여기서 살펴볼만한 특이한 점은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어떠한 선교사가 와서 전파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다가 천주교신자들이 생겼다는 점에서 볼때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그때 조선에 있던 여러 가지 종교와 많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왜 다른 종교들과 충돌이 일어났으며 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자 한다. 여기서에서 천주교의 발전과 박해, 교회의 재건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천주교의 전래
천주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①그중 하나는 당나라를 통하여서 경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불국사터에서 나온 마리아 상과 십자가이다. 또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와 허황후가 기독교인이었으며 가야에서 나온 유물들을 살펴보면 이를 증명하는 자료들이 있다.
②1592년 4월 일본의 불교 신자 풍신수길은 15만7천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포루투갈인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는 일본인 후간 에이온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막부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 년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③또 병자호란후에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할때에 조선의 선교를 위하여서 선교사를 요청을 하였으나 사정으로 인하여서 선교사를 보내지 못하여서 교인을 함께 보내었다. 또한 귀국하는 소현세자 일행 속에 중국인 주교교인을 배행시켜 조선 선교를 추진하려 했던 2차 계획도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과 그에 이은 중국인들의 귀환조치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④하지만 이미 다른 방법으로 조선 선교가 진행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과의 왕래를 통하여서 많은 서학서적들이 전해지게 되어서 선교사가 없이 자발적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Ⅲ. 한국 천주교의 창설과 초기 박해
1. 한국 천주교의 시작
1784년 - 240년 전 한국 천주교회는 그 시작을 이승훈의 영세(1784년)로 잡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부친이 서장관이 되어서 북경으로 가게 되어서 이승훈이 따라가서 40일간 머무르는 동안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로부터 그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
조선 선비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베드로)은 1784년 귀국한 그 해 이벽과 권일신(요한세자,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이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아 이들 세 사람은 한국 가톨릭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벽은 정약용(아우구스티노)․정약전 형제에게 보다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였고 계속해서 천주교의 전파에 나섰는데 양반계층보다는 중인계층에 전도를 시도했다.
2.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 秋曹摘發 事件)
1785년, 정조 9년 또한 당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잘 이루어져 명동에 있던중인 계급 출신인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정조9년) 당시 형조에게 발각이어 모두들 잡혔다. 당시 잡혀간 대부분이 양반이어서 훈방 조치 되었으나 역관이었던 김범우만이 고문(태형)끝에 충청도로 귀향갔다가 귀향하던 길에 옥고로 숨을 거두었으니 비록 작은 규모였으나 한국 천주교에 최초로 가해진 박해이며 이를 일컬어 "을사 추조 적발(乙巳 秋曹摘發 事件)" 사건이라 한다 . 추조 : 관아 형조벼슬
3. 가성직 시대
이들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전도를 하던중에 성사 집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서 신부 외에 주교와 같은 고위 성직이 필요함을 알고 연장자인 권일신이 주교로 지명되었고 이승훈등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로마교황청이나 북경 주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종의 불법적 교회 조직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가성직제 혹은 가교계제도라고 부른다. 후에 교리책을 다시 연구한 결과 가성직단 결성의 효력이 문제시되어 북경 주교에게 지도와 재결을 바랬고 또한 신부를 요청하게 되었다. *교리 연구중 미심쩍은 생각을 품게된 그들은 일단 성무집행을 중지한 뒤, 그 당시 북경 주귁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하게 된다.(유항검)
1790년 북경으로부터 회답은"세례성사 외 다른 성사를 집행할 수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성직제도를 폐지하고 이 땅에 성직자를 모시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리석고 무지에서 나온 가성직 제도는 그들이 얼마나 신앙에 굶주렸음을 알것이다.
4. 조선 천주교 최초의 배교자들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손길이 거세어지자 초기에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하나씩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맨 처음 영세를 받아 한국 천주교의 여명을 열었던 이승훈의 배교한 일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반석이 되라고 베드로란 이름까지 받았던 이승훈은 배교자로서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후에 자기의 행위를 뉘우치고 주문모 신부에게 다시 성사를 받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유교난시에 배교의 상태로 목숨을 잃었다. 정약용도 자신의 배교를 입증하는 자명소를 지었으며 이벽도 배교하여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초기 한국 천주교의 두 선각자가 배교도의 길을 간 것은 앞으로 다가올 천주교의 박해를 견디어 나가야 하는 교우들의 신고를 예고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Ⅳ. 주문모 신부의 전교활동
신앙의 수호와 7 성사 수령을 갈망하는 교회는 다시 북경으로 성직 파송을 청하였고 이에 의하여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로 서울에 들어와서 조선어를 배우고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문모신부의 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활약으로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그가 들어온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여성 교인들의 증가라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주문모신부는 교인들의 교리연구회 성격을 지닌 명도회를 조기하여 조선인 스스로 신앙 훈련을 쌓도록 유도했다. 이들의 적극적인 전도로 인하여서 교인들이 크게 불어나게 되었다.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중국 소주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품행이 단정하고,온순하였다 나이가 차자 결혼을 하었으나 3년만에 부인이 자식 없이 사망하였다. 이를안 주교님께서 그의 품행을 보고 추천 함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설립된 북경신학교 학업을마치고 제1회 졸업생으로 신부가 되었다.
1794년 12월 주신부는 동지사 틈에 끼여 간교우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을 만나서 23일 밤중에 역부차림으로 얼어붙은 압록강 얼음을 타고서 무사히 입국에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주신부는 역관 출신 최인길(마티아)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며 성무집행을 하였으나 그때 배교자였던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을 관헌에 고발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를 미리알게 되어 최인길 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 집에 머물게 된다 (양반집 딸).
강완숙 골롬바는 홍지영의 후처로 살다가 이혼한 뒤 였다 강완숙은 그의 시어머니나, 본처의 아들 홍지철도 강완숙을 따라 함께 살고 있었다. 강완숙이 과부라는 사실 때문에 검문을 피해 성무집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6여년 동안)
한편, 지황과 윤유일은 체포된 뒤 고문 끝에도 주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고 1795년 6월 25일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최인길 역시 장살로 순교함) 1801년 주신부는 자신 때문에 박해 당한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의금부로가 자수를 하였고 새남터에서 칼을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심.(군문효수) 당시 주신부과 초대 여회장(강완숙 골롬바) 크게 활약하던 당시 천주교 신자수는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입교시킴.
Ⅴ. 천주교회의 수난
1. 수난을 불러온 제 요소(한국의 천주교 박해동기)
한국의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것은 전통사회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전통과의 충돌은 크나큰 박해를 가져온 것이다. 제사문제가 종교적 미신이 아닌 효도를 표시하는 민간의식이었으나 기독교와 충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만 섬기라는 계명에 저촉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복음이 토착문화와 적절하게 융화된 것이 아니라 무조건 배격을 하였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효를 통치의 원리로 삼은 데서 조상의 제사를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박해를 받은 것은 사색당쟁의 희생이다. 왕이 바뀔 때 마다 정권에 바뀌어서 그 정권에 따라서 핍박을 받기도 하고 또는 큰 부흥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보수적 쇄국주의도 한목을 담당하였는데 기독교의 본질이 해방과 개방에 있어서 폐쇠된 사회와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샤머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서 박해를 받았으며 대원군같은 경우는 모화사상과 군신의 예로써 중국에서 천주교의 탄압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도 천주교를 탄압했던 것이다. 또한 동학은 무조건 서학은 나쁘다고 하여서 배격하고 거부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였던 것인데 이로인하여서 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의 박해를 가져온 것이다.
1) 조상 제사 문제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보니 자연히 조상 제사가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고 핍박의 도화선이 되었다.
예수회는 조상 제사문제에 관하여서 하나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관대하였지만 프란체스코회는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로 생각하여 금지 하였다. 이로 인하여서 조선 천주교인이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고 또한 서적들이 불타게 되었다.
2) 붕당문제
박해는 항상 붕당적 요인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었다.
당쟁으로 인하여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유없이 핍박을 받았으며 왕이 바뀔때마다 핍박을 받았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천주교가 핍박을 받은 것은 단순히 남인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았으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황사영의 백서
황사영은 박해가 시작되자 배론으로 피신하였으나 이미 체포령이 내려져있었다. 이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황사영은 배론의 은둔처에서 박해내용을 비단에 적었는데 이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이 백서의 내용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신유박해를 중심으로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적었으며 두 번째는 폐허가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를 나름데로 제시한 것이다. 교회를 살리려는 순수한 의도는 좋았지만 그러나 주권을 다른 나라에 넘기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나라를 배신한다는 생각은 좋지를 못하였다.
2. 수난하는 천주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는 1785년 을사년에 추조 곧 형조의 관리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신자들을 체포, 김범우를 단양으로 유배시킨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그러나 조정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박해는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1791년의 신해박해다. 진산 땅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파묻은 것이 드러나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후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드케트 신부가 중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약 100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이 땅을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다. 이중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고 부르며, 이 4대 박해로 순교한 분들 가운데서 103위 성인이 탄생한 것이다.
1) 신해박해 (辛亥迫害)
정조15년 서기1791년 (전주 진산사건:윤지충,권상연 순교) 한국의 천주교회가 그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소위 ‘무군무부’의 종교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천주교가 핍박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교회의 몰이해와 비우호적 태도를 들 수 있다. 신해교난으로 인해 조상제사의 금지가 명확히 발표된 이후, 조선 교회에서는 그들의 가름치모가 기존의 문화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차별성의 강조에 치중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박해는 조상의 제사문제로 인하여서 일어난 박해로써 큰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양반 교인들은 나중에 모두 석방되었다.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지역 양반이었던 교우 윤지충(바오로) 사건으로 잘 알수있다. 유교 전통에 의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바쳐야함은 천민까지도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 야고보는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천주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르려했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관가에서 알게되자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사실을 알고 바오로 와 야고보는 충남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윤지충 집을 수색하던 관헌들은 본인들을 찾지 못하자 윤지충의 작은 아버지를 잡아 가두었다. 모진 고문속에 작은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을듯고 윤지충과 권상현은 관가에 나가 자수하였다. 당대 최재공은 남인들의 보호를 위하여 사형 명령을 내렸고 정조 또한 사형을 명했다 사형취소 칙사를 보냈으나 이미 둘은 순교한 뒤였다 순교했다. (바로 정조15년인 서기 1791년의 일이다.)
2) 신유대박해 (辛酉迫害) (순조1년 서기1801년 - 18021년)
최초전국적인 박해 순조1년 서기1801년 (정순왕후 김대비의 수렴정치,홍봉한,오가작동법 주문모 정약종 초대교회 지도자 등 300 여명순교) 왕이 바뀌고 정치가 변동이 되자 최초의 가혹한 전국적 박해가 신유교난이 터졌다.
신유교난이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섭정으로 정순 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고 교인들을 투옥하고 참형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서학 자체에 대한 동기보다는 정조가 죽은 이후의 정권 다툼에서 야기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서 은밀히 활동을 하던 주문모신부는 박해가 일어나자 이는 자신을 목표로 한 것임을 알고 자수하여 1801년 5월 31일에 새남터에서 처형당했다. 이는 천주교 성직자로서는 최초의 순교자였다. 이렇게 해서 순조 원년의 1년에 걸친 박해로 약 300여명의 교인들이 처형되었다. 그후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완화하여 교세는 다시 재확장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첨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벽파의 주도로 이루어진 박해. 대왕대비는 신유년인1801년 1월10일(양력 2월22일) 박해령을 내리면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호 남인의 거두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등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돼 참수 또는 유배형을 받았다. 또 충청도에서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이 붙잡혀 참수됐다.
박해는 3월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면서 더욱 가열됐으며 그 해 9월에는 이미 체포령이 내려졌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신유박해는 12월2일 이미 내린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판결을 내리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신문도 속히 끝내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말라는 '토사교문'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로 인해 약 100명이 순교했고 400명 정도가 유배되었으나, 이들 순교자들은 아무도 시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할 때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부터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지도자들의 순교 정조가 24년간의 재위끝에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대통을 잇게된 분이 순조였다. 그러나, 그는 열한살의 어린나이어서 궁중에서 가장 어른은 경주 이씨 가문의 김대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됨으로써 천주교회사의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시작된다. 또한 조정에는 남인, 북인, 소론, 노론 등의 당파 싸움이 치열하였다.
김대비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의 정식호칭은 정순왕후로서 영조의 계비로서 열다섯살때 입궁한 분이었다. 순조에게는 계증조모에 해당하는 분이다. 그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대권을 장악하고 5년간의 수렴정치를 시행하였으며 그동안 어린 군주의 후견인으로 정치계에 영향을 미쳤다.
영조말 1762년에 임오사건이라 하여 영조가 유일한 뒤주속에 재왕으로 알려진 사도세자를 참살한 일이 생김으로써 당쟁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당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 시파에 속한 분이었다. 김구주는 바로 홍봉한을 제거하려고 공작하다 오히려 화를 입어 김상로는 죽음을 당하고 자신은 흑산도로 년간의 귀양끝에 겨우 복귀의 은사를 입게 되었으나, 나주에 옮겨와서 궁벽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바로 그의 여동생이 정순왕후는 벽파와 손을잡고 그 반대파인 시파를 몰아 내려고 했다.
그때 마침 시파를 이루고 있는 남인 계통에 천주교 신자나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대비는 그점을 이용해서 1801년 10월, 이른바 사학 "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한다.......". 등의 반역죄인으로 다스려 오가 작통법 (다섯집씩 반을 만들어 그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관에 고발하도록 한 제도)을 실시해서 뿌리째 없애려고 하였다. (사학엄금 서울이나 시골 할것없이) 이로 인하여 전국에 300여명이 순교하게 되는 대박해였다.
대표적인 순교자는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안, 최창현,황사영 등이 바로 10월 8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베여 죽이고 이가환, 권철신은 감옥에서 죽었다. 기타 많은 분들이 순교와 생명을 바쳤다. 주신부는 자기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희생된다고 생각하여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하여 31일 노량진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효수 당하였다.
*이 박해는 지방까지 퍼졌는데 특히 전라도 박해는 극심했다. 특히할 사항은 이순희 루갈다 동정부부 (치명자산) 순교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는 서로 동정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1797년에 결혼했다. 년 동안의 동정생활을 마치고 요한은 전주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이 루갈다는 전주 옥중 생활중 20세의 청춘으로 사형되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어려운 삶을 살았던 그들은 한국 수도자들의 모범이라 할수 있겠다. (또한 조 베드로 동정부부도 1819년 5월 21일에 순교했다.) 그 외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순교자 중에는 왕족들도 있었는데. 왕족 이경도(가를로)의 아우 이경연(바오로)도 1827년 5월 4일에 전주감옥에서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참다운 진리를 위해 파스칼은 말했다. "진리는 우리에게 신념을 줄 뿐 아니라 진리를 구한다는 자체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다."
독일 문학가 괴테도 적절한 진리를 말하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있다. 민중에게는 늘 공공연히, 왕에게는 늘 비밀로 말하는 것이다.
3) 정해교난(순조27년 서기1827년)
정해교난이란 순조27년 음력 2월부터 5월말까지 전,후 넉달에 걸친 교회박해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박해는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는 나오지도 않으니, 그만큼 이 박해에 대한 인식이 적고 또 알려져 있지 못한 박해이다. 1826년에 일본정부는 우리 냅?엄중한 천주교도 탄압정책 밑에서 허덕이던 천주교도들 가운데 6명이 배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도망하였으니 이 사건으로부터 정해박해는 시작된다.
이 교난의 특성은 첫째, 시간적으로 비교적 단시간에 종식되었다는 점, 둘째, 중앙정부의 직접적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 셋째, 중앙정부가 사형선고의 집행을 가급적, 천연시킨 점, 넷째, 검거된 수에 비해 순교자의 수가 많지 않은 점, 다섯째, 전국적인 것이 아니라 전라도와 기타 일부에 한해졌다는 점 이다.
정해교난 당시 정계는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아 바로 정해년 초 (2월 9일)에 세자’대’가 대리청정케된 때로써 종래 30년간이나 내려오던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세도가 무너지고 그대신 세자의 장인인 풍양 조씨 출신인 조만영의 세도 정치가 등장하게 되면서 김씨와 조씨의 세력 투쟁이 음양으로 격심한 때였다.
그런데, 정해박해가 일어나게 된 동기는 1815년 을해박해 후 천주교도 탄압의 손길을 늦추고 있었던 당국자들에게 새로운 탄압의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다. 배교자의 비율이 어느 박해때 보다 많았던것이 특징인 것. 4개월간의 박해가 1827년 검거소동은 없어졌다.
4) 기해박해 (己亥迫害)
헌종5년 서기1839년 (순원왕후,이정희,성직자3분,정하상,유진길의 참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흔히 여린 임금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은 세도재상이 바뀌게 될 때 일어났다. 기해교난은 헌종 5년에 신유교난보다 더 치열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기해교난이다.
순원왕후는 천주교도의 박멸의 포고령인 ‘사학통치령’을 1839년 4월에 반포하였으며 그전에 반포된 오가작통법을 강화한 이 법령에 따라서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 투옥, 처형의 순서를 밟아나갔다.
특히 이때 천주교도의 피해가 심각했던 것은 거짓으로 회심한척하여 천주교에 있던 김순성이 배교하여 많은 교인들을 밀고하였고, 그의 밀고로 조선교회의 지도자인 유진길, 정하상, 조진철등이 체포되었다. 임베르주교는 이 박해가 자기와 같은 외국인을 상대로 일어난 줄 알고 자수하는 동시에, 동료신부에게도 자수를 권하였다. 그들은 체포되어 1839년 9월에 사형을 당하였다.
이 교난이 한참 진행 중에 있을 때 정하상은 「상재상서」라는 호교론을 써서 기독교를 변호하였다.
이 상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해설하고, 잘못 인식된 점에 대해서 변증하고, 또한 국왕의 적자로서 긍휼을 호소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황사영의 백서와 다른점은 황사영의 백서는 전교의 자유를 위해서 국외의 물리적 힘에 호소하고 있는 반면에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자국 안에서 진리를 일깨움으로써, 조정이 스스로 박해를 거두어 주기를 바라는 동족으로서의 애끓는 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3월에서 10월까지 약 8개월여간 전국을 휩쓴 박해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70명이 이때 순교했다. <표 참조>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론 시파와 벽파 간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가 당시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타파하고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해 박해를 일으킨 것이다.
박해는 1839년 4월18일(음3월5일) 순원왕후가 내린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공식화 됐고,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이 등장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김순성의 밀고로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이 체포돼 순교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김순성이 갖은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신자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해 자수해 순교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으나 그 지역이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들을 모두 잃어 침체기로 다시 빠지게 됐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 구성원의 주류가 됐다. 또 조정에서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루거나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했다.
기해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많은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선교사 3명, 남자 24명, 여자 43명 등 총 70명에 이른다. 기해박해(헌종5년 서기 1839년) (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 ) 1834년 재위 34년 만에 순조가 돌아가시고 불과 8세의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오른 분이 바로 헌종이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 순조비였던 순원왕후의 수렴정치가 시작되었고, 처참한 박해가 시작된 것은 1839년 이지연이 집권하면서 부텨였으며 이 때 바로 79위 복자중 70명의 순교 복자를 낳게 되었다. 그만큼 박해는 계획적이리 만큼 엄하고 잔인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기해 박해라 하여 반드시 기해년(1839년)에 벌어진 것은 아니다.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이다. 헌종 5년에 우의정 이지연을 중심으로 대박해가 착수케 되는데 이때 소위 묘당회의가 있었다. 순원왕후 김대비를 모시고 어전회의가 열렸을때, 좌포장 남헌교가 사교금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우의정 이지연이 이를 저지하여 엄벌을 내세웠다.
그 결과, 김대비는 ’사학을 일삼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울뿐 아니라 온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라고 명을 내렸고 양력 4월 20일에 정식으로 박해 법령시 천하 또한, 박해령이 내린 후 최초로 순교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정 쁘로따시오 인데, 그는 1839년 4월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견디다못해 배교를 함으로써 풀려났으나, 즉시 뉘우치고 스스로 관가에 출두하여 배교를 취소하고 처벌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15세의 어린나이에 순교한 복자 이정희 발바라,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고아의 몸이었으나 열심한 교우였던 그의 아주머니 순교자 이 막달레나와 이 발바라의 훈도로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다 그만 검거되어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비위생적인 감방에서 그만 염병이 옮아 1주일동안 병고에 시달리다 선종하였다.
기해 박해때 순교하신 세분의 성직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가 순교하였다. 세분의 성직자는 군문효수의 선고를 받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집행하였다. 20여일이 지난후에 삼성산에 모셔졌고 명동성당(1901년)을 거쳐 지금은 양화진 성당에 모셔져있다. 1839년 9월 21일 3분의 성직자가 순교하신 다음날 정하상,유진길 참수 당하심
5) 병오박해 (丙午迫害)
헌종12년 서기1846년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북경에서 그 동안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고, 이로서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가 되었다. 그해 10월 새로 임명된 조선 선교사 다블뤼신부 그리고 페레올 제 3대 주교와 함께 서해안 강경을 거쳐 입국하였다.
그후 그는 1846년 아직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들의 입국 행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의 뱃길을 탐색중 붙잡혀서 오랜 신문을 당한 끝에 사형을 결정 받게 되었고, 그 해 그는 붙잡혀서 고문을 문초를 당하는 중에도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는 자주 신문을 받을때마다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는등 붙잡혀서까지도 전도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프랑스 군함이 오자 위기를 느낀 조정이 빨리 김대건을 처형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그해 1846년 9월 25일 2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병오교난은 신유박해에 비할 때, 보다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신분의 구별없이 교인이면 누구나 추적을 받았다. 1849년 최양업은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그해 단신으로 입국에 성공하여 성무를 집행했다.
이후로 지방에서의 간헐적인 박해는 있었어도 정부주도의 박해는 없어서 천주교회는 다시 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페레올 주교가 병으로 사망하고 1856년 3월에 제 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누신부가 젊은 신부들을 대동하고 입국하여 선교함으로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서 말레이반도 페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여러 명을 유학을 보냈으며, 궁중에도 신자가 생겨서 고종의 유모도 영세를 받게 되었다.
'병오박해'는 병오년인 1846년 6월5일(음5월12일)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종결됐다. 병오박해 순교자는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 현석문,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 우술임, 임치백, 남경문, 한이영 등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모두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었다.
박해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해박해를 경험했던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 대부분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잠시 몸을 숨겼다가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했을 정도다.
병오박해가 이전 박해와 다른 점은 '프랑스 함대'의 출현이다.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군함 3척이 충청도 외연도에 1846년 8월9일 나타나 조정에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한 항의 서신을 전했다.
조정에서는 헌종과 대신들이 9월5일 묘당회의를, 9월15일 어전회의를 열어 회신 여부와 김대건 신부의 처형문제를 서로 연관지어 논의했다. 그 결과 헌종은 김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군대를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해 효수 판결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은 김 신부와 신자들의 처형만 앞당기는 결과만 낳았다. 하지만 이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이 20년 후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대항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의 서막일 줄은 그 누구도 내다보지 못했다.
병오박해 '병오박해'는 병오년인 1846년 6월5일(음5월12일)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종결됐다. 병오박해 순교자는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 현석문,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 우술임, 임치백, 남경문, 한이영 등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모두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었다.
6) 병인박해 (丙寅迫害)
고종3년 서기1866 (흥선대원군,병인양요,8천-2만여명 순교) 병인교난의 원인은 두 군데서 살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천주교의 수적인 부흥이다. 철종이 즉위했을때는 천주교의 탄압이 약하였는데 그 후에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누 신부가 1855년 네명의 신부와 함께 오게 되어서 총 1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활동을 하게 되어서 수적인 부흥이 박해를 가져왔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베르누 주교가 정치 문제에의 개입을 꺼려 만족할 만한 회답을 주지 못하게 된점도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복잡하고도 다양한 요인을 갖고 시작된 박해였으므로 그 범위나 정도가 앞에 있었던 어느 박해보다도 크게 넓을 수 밖에 없었다. 앞에서 일어났던 박해는 1,2년 사이에 마무리가 되었지만 병인박해는 1866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무려 8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병인박해를 잘보면 네 단계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째는 러시아의 칩입을 물리치려는 문제로 말미암아 일어난 병인년 봄의 박해, 둘째는 프랑스 함대 침입 후 일어난 가을과 겨울의 박해, 셋째는 프랑스군인의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며 기물을 파손한 사건으로 일어난 박해, 넷째는 미국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고종 8년의 박해이다. 이처럼 천주교의 박해는 여러 가지 요인을 띄고 일어났으며 그 피해도 엄청났던 것이다.
▲병인박해 1866년(고종3년)초에 시작하여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8년간 지속된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됐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대박해였다.
박해는 10여년간 지속됐는데 크게
△△1866년 봄 박해
△△병인양요 이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 해까지 계속된 박해
△△덕산 굴총 사건으로 인한 1868년 박해(무진박해)
△△신미양요로 인한 1871년 이후 박해 등 네 단계로 나누어 진행됐다.
병인박해의 직접 원인은 위정자들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 때문.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조선 위정자들은 프랑스 함대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대원군은 남종삼(요한··성인)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내세워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아를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러시아의 월경행위가 잠잠해지고, 반대파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화되며,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마음을 바꿔 '박해령'을 내렸다. 박해가 시작되자 전국 각처 교우촌은 유린됐고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그 와중에 1866년 9월 제너널 셔먼호 사건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절두산)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토가 서양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로 매도해 처형함으로써 집권의 한 방편을 이용했고,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박해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1868년 5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도굴한 '덕산 굴총 사건'이 터지자 박해는 불더미에 기름을 붇듯 번져갔다. 오페르트 굴총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조정에서는 '참수형'을 명했으나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데 있어 교수형, 장살, 생매장, 백지사형 등 극형들이 남발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인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이후 세번째 침체기를 겪었다. 전국의 교우촌은 철저히 유린됐고,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게 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그 후 병인박해 이전의 2만여명에 달하던 교세를 회복하는데 20여년이 걸렸다.
이 기간동안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에서 1만명.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24명만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제595호, 리길재 기자>
흥선 대원군과 병인 박해 (고종3년 1866년) 병인 박해란 고종3년 즉, 1866년에 벌어진 교난을 말하는 것이다. 고종8년인 1871년까지 전후 6개년간의 박해이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 수만도 2천여명이나 되며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신자 수까지 합하면 8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대 박해 사건이며 우리 교회 사상 일대 시련 이었다.
대원군 아니, 흥선 대원군 그 정식 이름은 이하응 이라는 분이다. 집권케 되는 것은 1863년 말에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게 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나이 불과 12살에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다. 이 국왕이 바로 고종이며 국왕이 유소하매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이후 민비를 중심으로한 민씨 일파의 공작으로 양주( )로 하야( )할 때까지 전후 10년간 집권자로 행세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두가지 추측 호감을 가졌다고 추측되는 내용〉
첫째 : 승지 남종삼과의 문답 즉 천주교회에 관해 문답할때 그로 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받음.
(제사에 관한 문제에만 의심을.......)
둘째 :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 대부인의 천주교 동경자였다는 사실
셋째 : 그 유모가 일찍부터 천주교인 이었다는 사실
넷째 : 대원군의 맏딸인 이씨부인이 천주교도였다는 그 자손들의 주장
〈포악한 탄압령을 내려 8천의 생명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일반적인 사유〉
첫째 : 보수적이며 포악하고 잔악한 성품이 그릇된 정세를 판단한점
둘째 : 러시아 세력 남침에 따른 외교정책의 난 문제
셋째 : 대원군의 면회 신청에 즉응하지 못했던 교회의 사정
넷째 : 유고적 양반 세력과 조 대왕대비 일파의 음모공작.
다섯째 : 청국에 있어서의 천주교 박애 운동
대원군이 후세에 가장 비난받은 이유는 천주교인의 대량 학살은 그가 교리에 대한 몰이해나 천주교에 대한 반감보다도 제정 러시아의 남침이 중요한 동기가 된다. 대체로 대원군이 천주교회측과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러시아 남침에 대비키위한 셈이었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초래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대패로 끝나자 대원군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도인의 색출은 더욱 격심해 졌다. 그런 흥선 대원군도 정계에서 물러난 후로는 점차 천주교에 대한 심경에 변화가 생겨나 그의 말년인 1896년 10월에 괼아라는 영명으로 영세할때 반대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Ⅴ. 천주교회의 발전
1. 조선교구의 창설 : 1831년 - 273년
전 조선 천주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1세대 선각자들은 순교를 당했거나 배교의 길로 나가버렸고, 2세대라 할 수 있는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등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조선교회를 이끌고 나갔다. 조선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마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여 선교사의 파송과 교구의 설정을 요청했다.
이로 인하여서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1831년 조선에 새로운 교구를 발표하고 이 새 교구를 맡을 선교회서 프랑스의 피리외방전교회를 선정해주었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진취적인 한국 교회의 평신도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신부영입운동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결정후 조선에 가겠다고 자원한 브루기에르를 조선교구의 신부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교황청이 조선 교구를 북경에서 독립시키고, 포루투갈 사람이 아닌 프랑스인 브루기에르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자 중국인 신부 유방제가 청의 종주권 의식으로 개입하여, 조선 교구 독립을 여러모로 방해하려하자 교황이 다시 조선교구독립을 재천명하였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이 유방제의 간계에 이끌려서 주교 입국 거절을 하자 부르기에르는 조선으로 향하였지만,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하여서 브루기에르가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서 모방신부가 1836년 1월 조선에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는 서양 선교사가 본격적인 한국 선교를 위해 처음 입국한 것이고,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가 구체적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조선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모방신부는 조선말을 배우는데 전력을 다하려고 하였지만, 성도들은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않고 성사를 받기 원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성사를 받기 전에 신부가 떠나거나 죽을까바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제 신부가 들어와서 활동을 방해하자 그를 충고하여도 듣지 않자 그를 교황청의 권한으로 처분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편을 모아서 항거 하려고 하였지만 모든 신자들이 그에게서 떠나자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다음해 샤스탕신부가 입국하였으며 1838년 겨울에는 브리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은 제 2대 조선 교구장 임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 조선교회는 기틀이 잡혀갔다. 이들은 입국한 직후부터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착수했고, 임베르 주교는 무엇보다도 조선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 김대건, 최양업등을 선정하여 마카오에 파견하여 신학교육을 시켰다.
2. 교회의 재건
조선에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외국과의 근대적인 국제조약을 맺으면서 이다. 1876년 블랑, 드게뜨 신부가 먼저 입국하고 1877년 리델주교와 두세, 로베르신부가 입국하여 비밀리에 교회 재건을 서둘렀다. 하지만 1878년 교인 최지화가 국경에서 잡혀 실토함으로써 주교의 입국사실이 알려졌고 리델주교가 체포되었으나 대원군이 물러났고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방을 하여서 청나라가 주선하여 국외 추방의 결정이 내려졌다. 체포된 천주교 성직자가 처형되지 않고 추방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1882년 경부터 묵인되던 신앙의 자유는 1895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국왕 고종의 승인을 받을 수가 있었다.
3. 교회의 발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주교의 박해는 정치적 변하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또한 조선 천주교회는 유래없는 발전을 할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난때 희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구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희생적인 선교활동으로 조선천주교회가 184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였으며 천주교회가 그토록 급속하게 회복을 하기가 힘들었으며 조선인 신부는 몇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조선 천주교회의 자생능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함을 알고 그것을 위해 몇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중 가정 우선시 되었던 것이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서 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로써 신부 후보생들이 멀리까지 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리고 거기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10여명이 넘는 신부들이 조선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보내지 않고 국내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또한 한글로 신학서적을 출판하였고 교리서등도 한글로 출판하였다. 이처럼 한글 교리서의 인쇄․ 보급은 천주교 신앙 확산의 도구로 그치지 않고 조선사회에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여향을 끼쳤다. 천주교회가 한글을 적극 수용함으로 인해서 교인의 신분계층의 변화가 생겼다. 양반․중인계층에서 상민․민중계층으로 변화고 있는 현상에 적절한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면 때문에 기존의 보수세력에게는 도전으로 해석이 되어서 그에 따라 박해가 불가피했던 점이 참 아이러니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의 험악한 세월 속에서 이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아무리 치하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이 각종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 출판 한일은 비록 천주교를 위한 것이였지만 그 파급 효과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천주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글의 가치를 인정하고 일반 대중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서를 출판하여 한글을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글을 깨우쳐 문맹을 면케 하고 식자로 만들어 놓은 공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Ⅶ.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형태
조선에 있어서 천주교회의 신앙형태를 알아보면 한국인 자신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다는 미증유의 기록, 그리고 백여년동안 계속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말살되지 않고 생존했다는 고난의 기록, 이 두가지 상황 아래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형태가 구형되었다.
첫째, 교회는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경과하면서 양반층인 상류에서 중인들 주축인 중류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서민층인 하류로 신앙의 사회계층적 구조가 변모해간 것이다.
둘째,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아울어 그 의식이 항상 연결되는 민족적인 주체 의식이나 고유의 민속 전통에 접속함으로써, 기독교의 형체화에 정진하였다.
셋째로, 1850년대에 와서는 이 천주교회의 신앙이 하류와 서민층으로 침잠하고 격정적이고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이 신앙의 형태로 변천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천주교는 조선에 들어와서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한 성장을 기록하였다. 초창기의 1세대의 지도자들이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순교한 가운데 2세대 지도자들이 역량을 발휘하여서 자칮하면 와해될 수도 있었던 교회가 다시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정말로 많은 역할을 감당했었다. 그 당시에 지도층이 사용하던 한문을 가지고 교리서나 성경을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상민과 노비, 여성들이 사용하던 한글을 가지고 번역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세종대왕이 창시한 후에 한문에 밀려서 빛을 보지 못하던 한글을 빛내었으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 내었다.
천주교가 먼저 들어와서 많은 순교의 피를 뿌렸으며 또한 먼저 신앙의 기틀을 잡아놓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을 하여서 뒤에 들어온 개신교가 많은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천주교가 핍박과 박해를 받은 것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박해를 받은 것이였다. 또한 조선의 문화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였고 무조건 서양의 문화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점이 크다고 할 수가 있겠다.
《포교 방법, 포교 정신》
○포르투갈식 포교 방법
1) 선교국 : 포르투갈과 스페인
2) 포교 수도회 :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 이미 활동하고 있던 수도회에서 많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1534년에 창설된 예수회는 여기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포교 방법 : 이른바 포르투갈식 포교 방법이라는 것은 `가서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반강제로라도 모조리 교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교인들에게 가톨릭 신자만 되면 2등 국민을 만들어 주겠다는 특권을 내세워, 영세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포르투갈식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개종을 강요하였다.
예를들어, 주문모 신부도 서양의 자료에는 `야고보 벨로조'(Vellozo)라고 되어 있다. 그 벨로조라는 호칭이 바로 포르투갈식 이름으로 주문모 신부 역시 당시에는 포르투갈의 2등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포교 방법은 일종의 강요임에도 불구하고 이 강요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양이 모든 면에 있어서 다 우월하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현지의 민족이나 문화나 역사를 무시하고 무조건 유럽의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유럽의 우월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포르투갈식 포교 방법은 훗날 예수회에 의해 반성되어 점차 바뀌게 되었다.
○예수회의 적응주의 :
현지의 민족과 문화를 무시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포르투갈의 포교 방법이 점차 난관에 부딪침에 따라 예수회에 의해 새로운 포교 방법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를 `예수회의 포교 방법'이라고 한다. 현지의 사상과 문화를 될 수 있는대로 받아들여 그것에 적응하는 한편, 더 나아가서는 그 사상과 문화를 그리스도교와 융합시켜 보려는 것이며, 일종의 유럽 우월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는 새롭고도 겸허한 태도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예수회에 의해 인도와 중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지만, 후에 논쟁의 대상이 되고,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고 만다.
○교황청의 새 정책 :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이를 담당하는 선교사들과 그 선교를 주관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1622년에는 교황청 내에 선교와 포교를 주관하는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오늘날의 인류복음화성성).
또 하나 획기적인 것은 포교지를 위해 새 교구 제도를 설정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목구(代牧區)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목'(牧)은 교황을 뜻하는 것으로 대목은 교황을 대리한 목자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정식 교구장을 임명하지 않고, 대리 교구장이란 직책을 주어서 교황이 임시로 해당 지역에 파견하는 제도이다.
이제껏 포르투갈 사람들이 포교상의 보호권을 남용함으로써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주교를 제멋대로 선출하는 데 대해 교황청에서는 간섭을 못하였다. 한편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차마 저희들 땅이라고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종교적으로는 저희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곳에 한 수도회가 들어가는 경우에는 다른 수도회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들어간다면 분쟁이 일어나는 동시에 상대방에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도 이곳에 들아갈 수 없었으므로 중국의 북경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북경에 또 다른 주교를 임명할 수 없었으므로 `북경 대목'이란 제도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뒤에서 북경 주교를 내쫓기 위해 하나의 견제 수단으로 대목이라는 제도를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교황청에서는 보호권의 남용을 어떻게 하면 뚫고 들어가서 그 포교지를 장악할까 하는 목적으로 임시 방편으로 대목 제도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재속(在俗) 선교사의 등장 :
재속 사제들이 모여 포교성성의 지침에 따라 선교지에서 포교를 하고, 방인 성직자 양성과 가능한 한 조속히 교회를 현지인에게 넘겨주기 위한 목적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가 1658년에 설립되었다. 이로써 수도회 신부가 아닌 일반 교구 사제가 선교사로서 나서게 되었다.
《동양의 복음화》
1) 인도, 인도차이나, 필리핀, 대만 :
* 인도 - 포루투갈이 인도에서 제일 먼저 점령한 지역이 고아(Goa) 지방이었다. 이들은 그곳을 포교지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1534년에 "고아교구"를 설정하였다. 그 후 1542년, 인도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다. 그는 먼저 고아 지방에 도착하여 선교하였고, 그 후 1545년까지 그 부근의 섬이란 섬은 온통 다 돌아다니면서 복음의 씨를 뿌려 놓았다. 그리고 일본에까지 복음을 전했으며, 다시 중국에 선교를 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다.
* 인도차이나 - 오늘날 베트남으로 불리는 곳으로 일찍부터 파리 외방 전교회 회원들이 진출한 곳이다. 이곳 창설자들인 Pallu와 La Motte Lambert는 1659년, 통킹과 코친 차이나 대목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그들 뜻대로 선교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회원들은 1652년, 중국으로 다시 진출하였으며, 1673년에 타이의 샴(Siam)이 대목구로 설정되어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되었다. 바로 이 곳의 보좌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의 초대 교구장으로 후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통킹은 한 때(1678년) 30만 신자까지 있었으나, 그 이후 거듭된 박해로 인해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 왜 파리 외방 전교회가 한국 진출을 꺼렸는가 ? 중국에 진출하여 포르투갈인들에게 로마 포교성성의 앞잡이라고 인식되면서 밀리고 싸우고 했는데 <포르투갈,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해외 영토 다툼>, 이제 조선에까지 진출하면 속된 말로 매맞을 판이었으므로 이들이 포교지 한국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려했던 것. 그러나 막상 조선 포교지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을 때는 북경을 통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을 될 수 있는대로 못가게 하였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 필리핀 -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하는 도중 필리핀의 여러 섬을 발견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그 후 이곳은 스페인의 점령지가 되어 스페인 계통의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미니코회와 예수회가 이곳의 포교에 가담하여 1611년, 오늘날 유명한 토마스 대학을 필리핀에 설립하였으며, 바로 여기에서 보르네오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 대만 - 1625년경부터 중국 대륙으로부터 도미니코회원들이 이 곳에 들어가 전교를 하게 되었다.
2) 일본 선교 :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일본 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함으로써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시대라고 하는 이 때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자유를 주었는데, 다 무역에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목적에서였다.
그 후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한 후부터는 박해가 일어났고, 결국 1587년에 이르러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나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 신부로 파견되어 부산 부근에서 약 1년 반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1597년에 나가사끼에서 유명한 26위 순교자가 생겨났다.
그 후 도꾸가와 마꾸후(德川幕府) 시대에 들어서면서는 박해가 자주 일어났고, 1637년 그 유명한 시마바라(島原)의 亂이 일어나 천주교인 3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외부 세계와 인연을 끊게 되었고, 이로써 이른바 `잠복 기리스당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3) 중국 선교 :
1558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 무역의 거점이 되었고, 1576년 포르투갈의 보호 교구가 되었다. 그리고 점차 일본과 중국 포교의 거점이 되었으며, 후에는 `동양의 로마'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이른 다음 1601년부터 북경에 들어가 1610년까지 활약했으며, 처음으로 적응주의(補儒論)를 채택하여 중국의 문화와 쌍에 적응하려 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의 사망 후 소위 `中國儀禮論爭'이 일어났고, 100여년간의 논쟁 끝에 결국 로마로부터 단죄되고 말았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대목의 자격으로 중국에 진출했는데, 거기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맹렬한 항의가 일어나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에 대목구를 침투시키는 대신 북경과 남경을 다시 포르투갈 보호 교구로 양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중국은 1700년 경에 이르러 30만 신자를 지니게 되었으나, 중국 의례의 단죄, 예수회의 해산 등으로 그리스도교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중국에서 그리스도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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