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깊어가는 팬덤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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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버스, 길거리 전광판 등
곳곳에서 아이돌 응원 광고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정치 등 누구나 어디서든 팬질을 할 수 있는 지금은 '팬덤사회' 이다.
지난 7월 17일, 한 광고 제작 업체에 문의전화를 걸었다. 한 아이돌그룹의 팬이라고 이야기하고 서울 시내버스 바깥쪽 광고판에 아이돌그룹을 응원하는 광고를 실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왜 안 되나요. 요즘 그 광고들이 우리 먹을거리인데”라고 담당자가 농담조로 대답했다. 월 100만원이면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할 수 있다면서 여러 제안을 했다.
“요즘 광고판 하나만 하는 팬들이 있나요. 지하철도 하고, 버스 전체 래핑도 하고. 예산이 얼마인지 말해주면 제가 지하철, 버스 광고판에 보기 좋게 배분해서 포트폴리오 보내드릴게요.” 이 담당자는 “불황인 요즘 오프라인 광고 업체는 누군가의 팬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도 말했다.
지난 늦봄과 초여름 서울 풍경을 떠올려 보자. 서울 지하철역에서 가장 많이 보이던 광고는 아이돌 연습생 응원 광고였다. 지난 4월부터 방영했던 TV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나오는 아이돌 연습생의 얼굴이 여기저기 나붙었다. “옹성우, 데뷔해” “라이관린, 사랑해” 같은 문구를 써붙인 광고판을 기념 삼아 사진 찍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길거리 전광판에서, 아이돌 응원 광고는 이제 예사롭게 넘길 만큼 흔한 것이 됐다.
지난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아이돌 연습생 강다니엘을 응원하는 전광판이 실렸다. /고운호 기자
누가 이 광고에 돈을 내는 것일까. ‘프로듀스 101’에서 1등을 차지한 연습생 강다니엘의 팬이라는 34살 김정민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씨는 강다니엘 팬카페에 가입해 각종 모금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하는 열성팬이다.
김정민씨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해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다. 김씨의 팬 역사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다. “그때는 H.O.T.의 팬이었어요. 음악 방송 녹화하려고 빈 비디오테이프 들고 TV 앞에 앉아 있곤 했죠.” 고등학교 때는 god를 좋아했다. “사실 저보다 친구가 god의 광팬이었어요. 항상 같이 다닌 친구라 저도 god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죠.”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야구팬이 되었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를 따라 프로야구팀 두산 베어스 경기를 보면서 야구에 입문했다. “그러고 나서도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이 생겼는데 예전만큼 열성적이지는 않다가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강다니엘의 무대 영상을 보고 완전히 빠졌어요.”
그런데 김씨만 강다니엘에 빠진 것이 아니다. “점심 시간에 같은 팀 동료들에게 ‘나 요즘 강다니엘 팬 됐어’라고 하니까 두 명이나 ‘나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한 명은 매일 강다니엘 영상을 찾아보며 강다니엘이 부른 노래를 듣고, 한 명은 어떻게 해서든 현장에서 보고 싶어 콘서트 티켓을 구해 다녀오더군요.” 모두 서른을 넘긴 직장인들이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이미 팬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어릴 적 좋아하는 스타가 있었거나, 주변에 팬인 친구를 두고 있었거나, 여러 경로로 팬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둘째는 좋아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알리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행동한다.
강다니엘을 위해 모금하는 김정민씨나 주변 친구들에게 콘서트 티켓을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김씨의 직장 동료가 그렇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단 한 명의 스타만 좋아하지 않는다. 김씨는 강다니엘의 팬이지만 동시에 두산 베어스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야구 팬이기도 하다. 김씨의 동료는 배진영의 팬이지만 뮤지컬 배우 조승우의 팬이기도 하다.
◇사회 곳곳에 숨은 팬덤
시간을 돌려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고 H.O.T.와 젝스키스를 위시한 아이돌 그룹이 쏟아져 나오던 1990년대부터 한국 대중문화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소비자들도 변했다. 팬 집단을 일컫는 팬덤(fandom)이라는 말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스타를 쫓아다니고 응원하기 위해서 여러 행동을 하고, 콘텐츠를 가공하고 재생산하면서 퍼뜨리는 ‘팬질’도 다양하게 진행됐다.
당시 팬질을 처음 시작했던 10대 청소년들이 30~40대 성인이 된 지금,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가히 ‘팬덤 사회’라고 부를 만하다. 사회 곳곳에 팬덤이 숨어 있고, 팬덤이 사회를 움직인다. 단지 엔터테인먼트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기업도, 정치도 팬덤이 뒷받침될 때가 많다.
라면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만년 2등이던 오뚜기가 독주하던 농심의 뒤를 바싹 쫓고 있다. 오뚜기는 지난해 말 25.6%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오뚜기의 성장은 물론 라면 맛과 품질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진짬뽕’이라는 히트 상품도 나왔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품는 기업 이미지가 개선됐다는 점도 성장의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기업과 관련된 여러 미담(美談)이 알려지며 네티즌들은 오뚜기를 ‘갓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갓뚜기’와 관련된 미담은 이런 식이다. ‘마트의 시식사원 전원이 정규직이다, 오너가 상속세를 전액 납부했다, 심장병 어린이를 꾸준히 후원해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잊을 만하면 올라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오뚜기 기업이 만들어 홍보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없는 오뚜기의 팬들이 콘텐츠를 퍼나르며 재가공해 홍보하고 있다. 제품 하나를 홍보하기 위해 수많은 홍보비를 쏟고 있는 다른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런 자발적인 팬이 부러울 법하다. 오뚜기를 칭찬하고 오뚜기 제품을 사먹겠다고 약속하는 네티즌들은 곧 슈퍼마켓의 손님이기도 하다.
팬덤이 있는 기업은 ‘1등’으로 올라서기도 한다. 배달앱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춘추전국시대 같은 양상을 보였던 배달앱시장은 이제 배달의민족의 승리로 굳어져가는 모양새다.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지난 2월을 기준으로 배달의민족 사용자는 298만명에 달한다. 2위와 3위 업체인 ‘요기요’와 ‘배달통’이 각각 178만명, 61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한 것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수치다. 앱 배달의민족의 선전에 힘입어 우아한형제들은 지난해 영업이익 흑자를 달성하며 거래액 규모 1조8800억원 시장을 만들었다.
앱 ‘배달의민족’ 팬클럽 ‘배짱이’의 환영회 사진. 스타의 팬미팅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우아한형제들
◇팬질이 일으켜세운 기업들
우아한형제들의 성공 뒤에도 팬덤이 있었다. 실제로 우아한형제들의 팬클럽이 있다. ‘배달의민족을 짱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배짱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이다. 회사마다 있는 SNS 홍보단, 서포터스 같은 개념이 아니다. 홍보단이나 서포터스는 회사를 위해 특정 활동을 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다. 팬클럽은 다르다. 회사에 대한 팬클럽으로서 ‘배짱이’는 마치 스타의 팬클럽 같은 활동을 한다.
일반적으로 연예인 팬클럽에 가입을 하면 가장 먼저 팬클럽 회원만 받을 수 있는 ‘굿즈(상품)’를 받는다. 그리고 연예인과 팬미팅을 갖는다. 팬클럽 회원들은 스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조공’을 바치고, 스타는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역조공’을 한다.
배짱이는 꼭 이처럼 움직인다. 배달의민족은 환영회를 열고 팬들을 위한 소통 공간도 마련했다. 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침 우아한형제들이 흑자 전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팬들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축하를 전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다가 전국 팔도의 흙을 모아 화분을 만들고 꽃씨를 심어 전해주기로 했습니다.” ‘흙’이 담긴 화분에는 ‘자’를 꽂았다. ‘흙자(흑자)’ 전환을 축하하는 화분이었다.
“배달의민족의 흑자 달성을 축하드리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배짱이들의 마음이 담긴 ‘흙자’를 보냅니다. 각 화분마다 심어 있는 씨앗을 잘 싹틔워 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리며, 앞으로 전국 각지로 뻗어가는 배달의민족 되세요.” 화분에서 나무가 자라자 직원들이 꽃 사진을 찍어 팬들에게 전해줬다.
회사 사옥을 이전하니 팬들이 글자로 인쇄한 ‘난’을 보내줬다. 그 스타에 그 팬이라고 팬덤 활동도 기업 이미지와 분위기에 맞게 이뤄졌다.
‘배달의민족’ 팬클럽 ‘배짱이’는 회사 사옥 이전을 축하하며 글자로 인쇄한 ‘난’을 보냈다. /우아한형제들
‘배짱이’는 기존의 팬덤과 비슷한 모양새를 보이지만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스타의 팬덤이 아니라 한 기업의 팬덤이다. 스타의 팬덤이 확장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팬덤 문화가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동안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응철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의 팬이다”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 젊은이들은 아이돌 팬덤 외에도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팬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일상화되고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가 정치인 팬덤이다. 특히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팬덤은 주목할 만하다. 대개 정치인 팬덤은 엄숙하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서로의 주장을 펼치고 정치인을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문재인 팬덤’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스타의 팬덤이 그렇듯이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는 행동, 즉 ‘짤줍’하는 팬들 사이에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팬아트’를 그리는 ‘금손(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놓친 장면이 있을까봐 영상 자료는 초 단위로 캡처하고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은 다양한 경로로 공유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팬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영업’하러 다니고, 이런 영업 글을 읽다가 ‘입덕(팬으로 들어온다는 뜻)’하는 사람도 생긴다.
기업·정치 분야에 이르기까지 스타 팬덤의 모습이 보이는 이유로는 우리나라 스타 팬덤이 이미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이응철 교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문화산업 콘텐츠를 접해왔고 그것이 주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팬질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어릴 적 또래집단에서는 팬 활동이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아이돌 연습생 강다니엘의 팬이라는 김정민씨처럼 누구나 한 번은 스타의 팬이었거나 팬인 친구를 둔 적이 있다. 당연히 팬 문화에 익숙하다. 팬 문화는 곧 또래집단 문화이기도 했다.
팬덤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옅어졌다. 한때는 스타의 팬이란 맹목적인 열광자(熱狂者)로만 치부됐지만 지금은 ‘열정적’이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다. 특정 분야의 팬은 ‘전문적’이라는 이미지도 얻는다. 뮤지컬 팬은 뮤지컬 장르의 전문가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일러스트 이철원
◇30~40대도 아우르는 팬덤
이러면서 지금 젊은 세대는 무엇이든 팬이 될 준비를 갖췄다. 특히 네트워크의 발달은 언제 어디서나 ‘팬질’을 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 이헌율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논문 ‘팬덤내의 계층 구별에 대한 연구’에서 “팬덤 현상이 세대를 넘어 지속되면서 10대에서 30~40대까지도 아우르게 됐다”면서 “여기에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개인 위주의 소통 수단이 위계적이고 집단적이었던 기존의 팬덤과 달리 개인의 취향에 맞춰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예전의 팬덤은 팬클럽 조직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한번 가입하면 팬덤의 일원으로 명확한 정체성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SNS 시대 팬덤은 더 이상 이렇게 조직적이고 일률적이지 않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말할 수 있다. 팬이 되는 것도, 더 이상 팬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누구나 팬이 될 수 있고, 어디서든 팬질을 할 수 있는 팬덤 사회다. 한 번에 여러 가지의 팬일 수도 있고 어제까지는 팬이었지만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팬들은 더 이상 숨어지내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팬질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요즘 팬들의 마음이다.
아이돌 연습생의 데뷔를 응원하며 버스 광고판에 돈을 쓰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정치인의 성공을 기원하며 정치인의 업적과 활동 내용을 보기 좋게 정리해 퍼뜨리는 것이나, 기업의 성공을 위해 직접 나서 직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팬덤 문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팬덤을 등에 업은 분야는 대개 성공적인 발전을 이끌어냈다. 여성 관중이 급격히 늘어나 마치 대중문화 분야 같은 팬덤이 형성된 프로야구가 그렇다. 외국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미펀(米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두꺼운 팬덤을 형성한 중국 전자업체 ‘샤오미’는 세계적 기업이 됐다.
주간조선 2467호
2017.08.03
김효정 기자, 편집=박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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