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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자기 역사

Paul Ahn 2008. 2. 1. 08:29

중국 도자기 역사

(startour.pe.kr)

 

최초의 중국도자기는 신석기시대에 허난성(河南省)과 간쑤성(甘肅省)에서 발견된 채색된 토기로서 연마된 표면은 흑색· 적색· 적갈색·갈색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직경이 넓은 발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그외에 다리가 3개 달린 큰 솥 모양의 정(), 소젖통 모양의 다리가 달린 가()와 역(), 길고 넓은 대()가 놓여 있는 두()가 있는데 이러한 조형은 청동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BC 1400년에 백도(白陶)라는 혁신적인 토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기형과 장식은 당시에 유행했던 의식용 청동기와 매우 유사하다.

 

유약은 주대(周代) 후기에 처음 나타나 한대(漢代)에 그 질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즉 한대에는 시유된 경질도기의 전통이 확립되고 북쪽의 저장(浙江, 절강)이 주요 제작지로 부상했다. 형태는 신정(神亭: 뼈항아리(骨壺(골호))의 일종으로 윗부분에 인물이나 누각을 얹어 장식한 것)이나 농장에서부터 단순한 돼지우리, 조리용기, 남녀와 동물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6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의 질이 점차 향상되고 유약도 장석유약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고 초보적인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당대에는 반투명한 자기가 제작되고 8세기 전반에는 매우 화려한 당삼채(唐三彩)가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청색· 녹색· 갈색· 황색· 오렌지색을 섞어 채색한 당삼채는 껴묻거리(副葬品, 부장품)인 도용(陶俑)과 실용기로 구분된다.

 

도용들은 생동감과 위엄이 넘치면서도 개개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서도 당삼채가 사라지는 756년 안녹산의 난 직전의 것들이 가장 묵중하고 건강하게 표현되었다.

 

송대(宋代, 960~1297)의 여러 도요지에서는 장석질 유약으로써 세련되고 단순한 형태의 청자와 백자가 제작되었다.

 

정요(定窯)에서는 백자가 주로 생산되었는데 태토가 매우 희고 경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유약은 상아색을 띠고 시유된 표면이 매끄럽다. 이 가마에서는 주로 발·세반(洗盤(접시 같은 실용기들이 제작되었다. 정요도자기의 결점은 엎어놓고 구우므로 구연부(口緣部)에 유약이 없기 때문에 매우 얇은 동이나 은을 그릇에 맞게 잘라 소성 후에 구연부에 씌운 것이다.

 

청자요지로 북방에는 요주요(耀州窯린루요(臨汝窯균요(鈞窯), 남방에는 룽취안요(龍泉窯관요(官窯)가 있었다.

 

12세기초 동을 사용하면서 동의 양이 과다해 생겨난 산화작용으로 인해 표면에 이끼 같은 녹색의 작은 결정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균요자기에 매력을 더해 주었다. 역시 발··접시 같은 실용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14세기에는 묵직한 화반, 수반, 향로, 커다란 세반 등도 제작되었다.

 

저장성(折江省, 절강성)의 룽취안요는 송의 대표적인 청자요로 태토가 정선되고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흰색을 띤 것을 제외하고 유약이 칠해지지 않은 굽의 드러난 부분은 타서 밝은 적갈색을 띠었는데, 이것은 남방청자와 북방청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元:1206~1368)의 도예 중심지는 징더전(景德鎭, 정덕진)이고 이때 가장 중요한 성과는 중국도예에 혁명적인 효과를 가져온 반투명 자기를 처음 만든 것이다. 또한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중동으로부터 하회의 코발트 청색 안료가 도입되어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생산되었다. 청화백자는 해외수출용과 내수용으로 제작되었는데, 해외수출용은 전통적인 중국 도자기와는 전혀 다르고 이슬람 금속공예의 장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명대(明代, 1368~1644)의 주요요지도 역시 경덕진으로 이곳에 관요가 설치되어 청화백자가 다량으로 생산되었고 다채색의 백자도 생산되었다. 코발트는 16세기말까지 거의 페르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 도자예술이 특히 발전했던 선덕연간(宣德年間, 1425~1435)에 제작된 청화백자의 특징은 강한 청색, 힘차게 조절된 선, 전면에 비례하여 조화를 이룬 문양이다.

 

청대(靑代:1644~1912)에도 많은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는데 수출용 도자기는 내수용과 구분되어 생산되었다.

 

재료를 정선하고 제작을 통제해 정교하게 마무리되었으나 명나라의 도자기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강희연간의 도자기는 형태·표면·색상 등에 있어서 송대 도자기의 세련미를 재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중국과 서양에서 가장 아낌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 영락연간(永樂年間, 1403~1424)에 유행한 난각(卵殼) 자기인 완을 모방한 것은 원품보다 완벽할 정도이다.

 

강희 말기부터 징더전의 채색자기에 서양적인 취향이 점차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고월헌(古月軒)이라는 양채(洋彩) 에나멜 도기에서 가장 현저하다. 장식이 유럽 풍경이거나 중국 꽃이라 하더라도 사실적인 묘사나 명암법, 원근법 등 서양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희제 때 청화백자의 소지는 뛰어난 백색으로 유명하며, 문양과 그림은 명나라 때의 것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투각한 도자기가 옥공예품의 영향을 받아 부흥되기도 했다. 유약은 동적색이 단색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연분홍, 녹색, 망간흑색, 황색, 금박 등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녹색은 후기에 출현한 것이며 터키옥색도 나중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유럽 도자기도 중국에 영향을 주었는데 유럽 상인들의 취향에 따라 문장이 그려지고, 초기 마이센 도자기가 중국에 들어오기도 했다. 징더전에서 제작된 순백자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독일·네덜란드·영국에서 장식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