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도(嚴興道)
본관은 영월(寧越).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다가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이튿날 옥가(獄街)를 오가며 통곡하고, 관을 마련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
1585년(선조 18)에 종손인 정병(正兵) 엄한례(嚴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노산군의 묘역을 수호(守護)하게 하였고,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엄흥도(嚴興道))]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받는다면 내 기꺼이 달게 받겠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가장 애절하고 슬픈 일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숙부에게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의 애절한 역사가 아닌가 한다.
시신조차 영월 동강에 차갑게 내던지어 누구하나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으니, 이 모든 것이 권력욕이 부른 비애(悲哀)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으로서는 차마 해서는 아니 될 몹쓸 짓인 것 같다.
더구나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있었으니, 당시 강원도 영월땅의 호장(戶長)이던 엄흥도(嚴興道)이다. 엄흥도는 주변사람과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즉,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받는다면 내 기꺼이 달게 받겠다"고 했다.
그 후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가지를 가지고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東鶴寺)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그곳에다 단을 쌓고 초혼(招魂)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홀연히 그 종적을 감춰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공주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는 엄흥도를 위시한 단종애사와 관련된 89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을 장사지낸 그의 후손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경상도 문경땅(당시에는 예천군)으로 도망을 간 후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갔다.
그 후, 정조 때에는 조정에서 엄흥도의 충성을 높이 사서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제물을 대줘 엄충신의 묘를 단장하고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단종이 승하한지 200여년이 지난 현종 9년(1668)에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영월 호장 엄흥도의 복호(復戶)를 주청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후손들을 벼슬에 등용했고, 영조 34년(1758)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인 공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영조가 친히 제문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제향하도록 명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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