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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삶을 잘 영위하기 위한 5가지 생각

Paul Ahn 2020. 4. 13. 10:16

〔다름〕삶을 잘 영위하기 위한 5가지 생각

 

1. 삶에 대한 책임감

•1번의 자기 삶에 책임감은 평균적으로 지닌다

 

2. 실패, 패배를 두려워 말라

 

3. 싫으면 거절하고, 상대의 거절도 잘 수용

 

4. 나는 반드시 죽는다

•2-4번은 자기 삶에 대한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자기 선택적 경향의 것이라 할 수 있다.

 

5. 내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

•2번만은 정말 사회적 폐단이 많고 인간끼리 서로비난하고 좀먹게 만드는 것으로자신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겸손하게 그것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무조건 옳다 주장하는 것은 거의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삶이 늘 어느 정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작은 개가 가장 크게 짖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 마”. 그런 건 없어.

 

•행복은 문제를 먹고 자란다.

 

•문제는 끝없이 계속된다. 단지 바뀌거나 나아질 따름이다.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한 가지에 몰입하라. 자유를 얻을 것이다.

 

•당신과 당신이 아는 모든 이가 곧 죽는다.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마크 맨슨 (Mark Manson)

https://markmanson.net/archive

 

 

 

1984년 텍사스 주 출생.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2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지닌,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워블로거 중 하나다.

 

각종 매체에 지속적으로 칼럼을 기고했으며, 날카로운 통찰력과 직설적인 문체로 CNN, 뉴욕타임스, 타임, 포브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Infinity Squared Media LLC를 설립하여 운영 중이다. 그가 처음부터 성공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 마약 문제로 퇴학까지 당했던 문제아였으며,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친구네 집 소파를 전전하던 백수였다.

 

뚜렷한 삶의 목표나 확고한 가치관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지금 그는 180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현재 그의 미디어 파워는 메이저 언론에 버금갈 정도이며, 그에게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 하는 대중들의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천 통씩 쇄도한다. 50개국 이상의 나라를 바쁘게 누비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중요한 가치를 찾는 방법을 설파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지워버려라〉

 

1장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 마

 

- 세상에서 자기계발서와 가장 거리가 먼 남자

 

- 자기계발의 진실, ‘너는 부족해’

 

- 불안이라는 지옥의 무한궤도

 

- 할아버지는 말했지 “사는 게 다 그렇다, 가서 삽질이나 해”

 

-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 마

 

- 인생의 터닝 포인트, 신경 끄기의 기술

 

 

 

2장. 해피엔딩이란 동화에나 나오는 거야

 

-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2가지 질문

 

- 실망판다가 알려준 불편한 진실

 

- 부유함을 버리고 고통 받는 삶을 택한 왕자

 

- 문제는 계속된다, 바뀌거나 나아질 뿐

 

- 삼키기 싫은 알약을 삼켜야 할 때

 

 

 

3장.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해?

 

- ‘모두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는 헛소리

 

- 스티브 잡스가 될 거라는 망상에 빠진 벤처기업가

 

- 최고 혹은 최악, 1%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최악의 하루

 

- 당신은 유망주도 아니고 실패자도 아니다

 

 

 

4장 ‘고통을 피하는 법’은 없어

 

- 자기 파괴적 이상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

 

- 외제차를 갖지 못해서 불행하다는 착각

 

- 메탈리카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남자

 

- 같은 시련을 겪고도 다른 결말을 만들어낸 비틀스 전 멤버

 

- 완전히 무시해도 좋은 엉터리 가치들

 

-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더 나은 가치에 신경 쓰라

 

 

 

5장. 선택을 했으면 책임도 져야지

 

- 42.195km를 어떻게 달릴 것인가

 

- 사회 부적응자를 최고의 석학으로 만든 선택

 

- 그 이별은 결국 내 책임이었다

 

- 말랄라가 총에 맞서 지키려고 했던 것

 

- 어떤 패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다

 

-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 ‘어떻게’는 필요 없어

 

 

 

6장. 넌 틀렸어, 물론 나도 틀렸고

 

- 확실한 건,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하나뿐

 

- 매 순간 거짓말을 생각해내는 사람들

 

-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라는 엉터리 충고

 

- 그릇된 가치를 맹신한 나머지 스토커가 된 여자

 

- 나에 대한 확신이란 얼마나 위험한가

 

- 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나는 법

 

 

 

7장. 실패했다고 괴로워하지 마

 

- 잃을 게 없어서 두려운 게 없었다

 

- 피카소가 3만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

 

-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선택하라, 그리고 견디라

 

-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고백

 

-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 ‘뭐라도 해’

 

 

 

8장. 거절은 인생의 기술이야

 

- 모든 걸 버리고 떠난 여행에서 깨달은 것

 

- 무엇을 거부할지 선택하라, 그것이 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불건전한 이유

 

- 관계를 무너뜨리는 선의의 거짓말

 

-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필요한 기술

 

 

 

9장. 결국 우린 다 죽어

 

-인생 최악의 순간에 찾아온 깨달음

-죽음이 남긴 질문,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 내 경험에 따르면, 소위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모두 채우려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은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해주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 능력을 발달시키면, 이른바 ‘실용적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 실용적 깨달음이란, 삶이 늘 어느 정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인생은 실패, 상실, 후회를 수반하고 마지막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부코스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애쓰지 마.”

그의 천재성은 엄청난 역경을 극복했다거나 출세해서 당대의 문호가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코스키는 자신을, 특히 가장 못난 모습을 숨김없이 오롯이 드러냈으며, 결점을 태연하게 세상과 나누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런 단순한 능력 안에 있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떠들어 대는 조언—긍정과 행복으로 가득 찬 자기계발 요령—은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부자가 되는 비법을 배우는 건, 나는 돈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예쁘다고 주문을 거는 건, 내가 못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연애와 인간관계에 관한 조언을 따르는 건,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 웃기지도 않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건, 내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고와 최상을 부르짖다 보면, 우리는 반대되는 것들만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어긋나는 것, 내게 없는 것, 내가 이루지 못한 것. 이런 일들만 머릿속으로 무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거울 앞에 서서 ‘난 행복하다’고 되뇌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행복한데 뭐하러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 ‘가장 작은 개가 가장 크게 짖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자신만만한 사람은 자신감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진짜 부자들은 굳이 돈을 자랑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크게 신경 안 쓴다. 반면 늘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 현실을 끊임없이 신경 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현실 말이다.

 

* 그런데 광고에서 이렇게 떠들어대는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이것저것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소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게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천박함과 허세가 몸에 배기 십상이며, 행복과 만족이라는 신기루를 좇는 데 평생을 바칠 수도 있다.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이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요컨대, 오로지 코앞에 있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 철학자 앨런 와츠는 이것을 ‘역효과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 법칙에 따르면, 기분을 끌어올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진다.

뭔가를 바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내가 그걸 갖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한마디로 하면, “애쓰지 마.”

 

* 당신과 당신이 아는 모든 이가 곧 죽는다. 그리고 오늘과 그날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당신이 쓸 수 있는 신경은 얼마 안 된다. 사실, 아주 적을 거다. 그러니 생각 없이 사사건건 신경 쓰며 돌아다니다가는 결국 험한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 우리 삶에는 어떤 진리가 숨어 있다. 사실은 신경 끄기 같은 건 없다는 진리 말이다. 우리는 뭔가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늘 뭔가에 주의를 기울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늘 신경을 쓰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에 신경 쓸 것인가? 신경 쓸 대상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신경을 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고난에 신경 쓰지 않으려면,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에 신경을 쓰라.

 

*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이 쓰인다면, 이를테면 전남친의 페이스북에 새로 올라온 사진, TV 리모컨 건전지의 수명, 원플러스원 행사를 연달아 놓쳐 손 세정제를 못 산 일에 너무 신경이 쓰인다면, 당신 인생에는 신경 쓸 가치가 있는 그럴듯한 일이 없는 거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 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 우리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 잘 하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고통을 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기꺼이 투쟁할 수 있는가’.

 

* 행복은 문제를 먹고 자란다. 기쁨은 땅에서 데이지가 솟아나고 하늘에서 무지개가 피어나듯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성취감은 자신만의 투쟁을 선택해 감내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 반평생 넘게 품어왔던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몸부림친 뒤에야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사실 음악가가 되길 원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난 결과를 사랑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를 휘저으며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내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과정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고통을 이용해 변화를 만든다. 인간은 늘 어느 정도의 불만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진화해왔는데, 그 까닭은 다소 불만과 불안을 느끼는 생명체가 혁신과 생존에 가장 열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진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지지 못한 것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다. 이런 끊임없는 불만족이 인간이라는 종을 싸우고 분투하며, 번성하고 승리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은 인간 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다.

 

* 마침내 왕자는 남들은 얼추 다 아는 진리를 깨닫기에 이르렀다. 고통은 천하에 몹쓸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딱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와 마찬가지로, 고통도 목적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 문제는 끝없이 계속된다. 단지 바뀌거나 나아질 따름이다.

행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해결’이다. 문제를 피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하면 불행해진다. 해결 못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역시 불행해진다. 중요한 건 처음부터 문제 밖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거다.

 

* 행복은 끊임없는 제조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품이다.

왜냐면 문제 풀기가 끊임없는 제조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내일의 문제를 풀기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할 문제, 자신이 즐겨 풀 문제를 찾아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 사람들이 적어도 다음 두 방식 중 하나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1 부정하기.

어떤 사람들은 일단 자신에게 있는 문제 자체를 부정한다. 현실을 부정하니 착각에 빠져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제를 부정하면 단기적으로는 기분이 좋겠지만, 결국엔 불안에 떨고 신경과민에 시달리며 감정을 억누르는 삶을 살게 될 뿐이다.

 

2 피해의식.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사실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도 말이다. 피해의식에 빠진 자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린다. 남 탓을 하면 단기적으로는 기분이 좋겠지만, 결국엔 분노와 무력감과 절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될 뿐이다.

 

* 감정은 우리 삶의 방정식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좋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고, 나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단지 길잡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신경생물학이 우리에게 전하는 제안일 뿐 명령은 아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사실 난 감정을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자신과 감정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느낌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이런, 내가 당신 차 앞 유리를 깼군. 근데 너무 화가 나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난 학교를 그만두고 알래스카로 이주했어. 그냥 그러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이성의 도움 없이 감정과 직관에 근거해 내린 결정은 거의 대부분 형편없다. 삶 전체를 감정에 따라 살아가는 게 누굴까? 세 살짜리 꼬맹이와 개뿐이다.

 

* 감정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행위가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정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내일이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한 것을 원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 모두가 굳게 믿고 있는 명제가 있다.

바로 우리가 아주 특별한 일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다. 유명인이, 재계의 거물이, 정치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한 사람이며, 우리 모두가 위대한 사람이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가? 따지고 보면,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 돋보이고 대단한 삶만이 가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간이 가치 없는 쓰레기라는 결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정신 상태는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위험을 초래한다.

 

간혹 어떤 사람이 뭔가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자신이 특출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능력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데 집착할 때 나온다. 또 이러한 ‘개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이 전혀 대단하지 않다는 올바른 믿음에서 나온다. 즉, 한 분야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나는 아직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 “이 넓은 세상을 고려하면, 내 행동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혹은 “내 인생 대부분이 지루하고 평범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와 같은 자세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채식이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고개를 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삼키면, 몸에 힘과 활력이 넘칠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차세대 거물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 하지만 다음 세대에 이르러 우리 모두가 특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이 됐다. 그동안 드러난 바에 의하면, 그럴듯한 이유 없이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건 사실 아무 소용이 없다. 다부지고 출세한 성인이 되는 데는 역경과 실패가 실제로 도움이 되며 심지어 ‘필수적’이다.

 

* 자존감 캠페인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느끼느냐’로 자존감을 측정했다는 데 있다. 개인의 자아 존중감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어떻게 느끼느냐를 봐야 한다.

 

*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래, 난 돈 문제에 무책임할 때가 있어.” “그래, 난 내 성공을 과장할 때가 있어.” “그래, 난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해. 자립심을 키워야겠어.”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허세꾼들은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을 알차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바로잡지 못한다. 끝없이 쾌락을 좇고 부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뿐이다.

 

* 현대인의 삶은 극단적인 경험으로 가득하다. 대중매체가 사람의 이목을 끌어 돈이 되는 극단적인 것들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이게 핵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단조롭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 인터넷,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수백 개의 TV 채널 등 미디어의 힘은 굉장하다. 하지만 인간의 주의력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의 물결을 다 처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0과 1의 나열은 수많은 정보 중 0.0001%에 속하는 극히 예외적인 것들뿐이다.

 

극단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예외주의를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예외적인 정보가 쇄도하면, 지극히 평범한 우리로서는 불안과 절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못나고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실은 허세꾼이라는 건 잘 모른다. 세상만사를 다 끌어들여 자신을 피해자로 몰아가는 사고방식도 엄청나게 이기적인 태도다. ‘내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내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와 망상에 가까운 자의식이 필요하다.

 

*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멋진 몸을 갖고,워커홀릭은 초고속 승진을 하며 고된 연습을 견딘 아티스트는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다.

 

당신이 선택한 고통이 당신을 만든다

 

* 당신이 처한 상황에 관한 객관적 사실보다, 당신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가치와 기준으로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문제가 생기는 건 필연적이겠지만, 문제의 의미는 필연적이지 않다. 문제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과 평가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지조차도 잘 모른다.

 

* 자기를 인식하는 일은 양파와 닮아 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층들을 벗길수록 쌩뚱맞게 눈물 나는 일이 많아진다는 점에서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내가 제대로 몰랐던 감정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 자기인식 양파의 두 번째 층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왜’ 느끼는지를묻는 능력이다. 감정의 이유를 찾는 이 질문은 몹시 어려우며, 어쩌면 일관되고 정확한 답을 찾는 데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질문을 처음 듣는 순간은 심리 치료사를 만났을 때다. 그 전까지 우리는 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따져보지 않는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몇몇 가치는 사람들에게 으레 형편없는 문제, 다시 말해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문제를 던져준다.

 

1 쾌락.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인생 전반에 걸쳐 우선시할 만한 가치는 결코 아니다. 알코올중독자에게 쾌락을 추구한 결과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바람을 피워 가정을 파탄 내고 아이를 잃은 사람에게 쾌락으로 인해 행복을 얻었는지 물어보라. 흡연으로 병을 얻은 사람에게 쾌락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줬는지 물어보라.

 

쾌락은 가짜 신이다. 쾌락은 만족감 가운데 가장 얄팍한 형식이기에 그만큼 얻기도 쉽고 잃기도 쉽다. 그럼에도 쾌락은 연중무휴로 사고 팔리며, 우리는 쾌락에 꽂혀 멍하게 살아간다. 적절한 쾌락은 사는 데 필수적이지만, 쾌락에는 충분함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2 물질적 성공.

연구에 의하면, 일단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행복과 세속적 성공의 상관관계는 급속히 0으로 향한다. 당신이 인도에서 노숙을 하며 굶주리고 있다면, 1년에 1만 달러를 더 버는 건 행복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선진국의 중산층에 안착해 있다면, 가욋돈 1만 달러는 밤낮으로 죽도록 일만 하는 무의미한 일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 성공을 과대평가하면 정직, 비폭력, 연민과 같은 다른 가치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게 된다는 점도 문제다.

 

3 ‘나는 다 안다’는 태도. 

인간의 두뇌는 효율적인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형편없는 가정을 받아들이고, 확률을 잘못 계산하며, 사실을 틀리게 기억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일시적 기분에 휩쓸려 결정을 내린다. 인간은 틀리는 게 일상이다.

 

나는 다 안다는 식으로 자존감을 세우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통해 뭔가를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들은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에 공감하지 못한다. 더불어 새롭고 중요한 정보를 스스로 차단한다.

 

4. 무한 긍정. 

어떤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실직했다고? 잘됐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볼 기회야!” “남편이 내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고?” “음,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잖아. 아이가 사고만 치다가 퇴학당했다고? 대학 등록금 걱정할 일은 없겠네!”

 

인생을 낙천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삶은 때로 엉망진창이라는 게 사실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일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깊어지고 오래가며 감정이 장애를 일으키고 만다. 한결같은 긍정은 일종의 회피일 뿐, 삶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려면, 부정적인 감정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건전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표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비폭력이라는 가치를 수호하는데, 이를 위한 기준은 손찌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난 화가 났을 때 분노를 표출하긴 하지만, 절대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는 않는다. 분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삶의 일부다. 단언컨대, 화를 내는 게 엄청나게 도움이 될 때가 자주 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행동이지, 분노가 아니다.

 

*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잘못된 기준을 세우면, 중요하지 않은 것과 삶을 사실상 망가뜨리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면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쏟게 된다. 중요한 것, 즉 삶에 안정감을 주고 그 결과로 행복과 즐거움, 성공을 전해주는 것에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써야 더 나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 좋은 가치는

 

① 현실에 바탕을 두고 ② 사회에 이로우며 ③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① 미신적이고 ② 사회에 해로우며 ③ 직접 통제할 수 없다.

 

* 5가지 가치는 색다르고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내 삶을 바꿔놓았다.

 

첫 번째 가치는 강한 책임감이다.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때로 억울하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에도 당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신의 믿음을 맹신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100%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언제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당신은 독선주의 허세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실패다.

우리 모두가 겪기를 두려워하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것. 그 실패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결점과 실수를 기꺼이 발견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발전한다.

 

네 번째는 거절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거절을 통해 내 삶에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 가치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이다.

 

* 인생에서 당신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자발적인 선택인가, 강요된 압박인가.

 

* 쓰라린 기분을 느낄 것인가, 솟구치는 기운을 느낄 것인가. 둘 사이를 가르는 건, ‘이건 내 선택이니 내 책임이다’라는 마음가짐이다. 지금 비참함을 느끼고 있다면, 아마도 그건 현재 상황의 일부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 내 문제는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느낀다. 반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문제가 강요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부당함과 비참함을 느낀다.

 

* 명심하라, 외부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요점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 많은 사람이 ‘내 문제는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내 책임이 곧 내 잘못’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임과 잘못이 일반적으로 붙어 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둘은 같은 게 아니다.

 

* 그녀가 내게 몹쓸 짓을 한 건 사실이니 그녀의 잘못을 탓할 이유야 충분하지만, 지금 내 행복을 되찾는 건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 학교폭력 현장을 목격했다면, 당신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직접 나서서 도와주건, 경찰에 신고를 하건 혹은 모른 척 지나가건 말이다. 어떻게 선택하고 반응하든 전부 당신 책임이다. 도둑질 당한 건 당신 선택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경험으로 인한 감정적, 심리적, (법적) 결과는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 불우한 어린 시절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학대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겪는 문제와 장애는 이들 탓이 아니지만, 역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문제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책임과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책임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다.

 

* 난 매번 틀렸다.

나 자신, 친구, 당시 내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것들.

하지만 난 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났다.

 

* 확신은 성장의 적이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조차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관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성장할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의 느낌과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 우리가 500년 전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며 경악하는 것처럼, 500년 후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을 보며 비웃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돈과 직업으로 삶을 규정짓는 모습을 비웃을 것이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유명인은 떠받들면서 정작 소중한 사람은 업신여기는 행태를 비웃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미신, 우리의 고민과 전쟁을 비웃을 것이고, 우리의 잔인함에 혼이 빠질 것이다. 우리의 예술을 연구하고, 우리의 역사를 두고 논쟁을 벌일 것이다.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우리에 관한 진리를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틀릴 것이다. 단지 우리보다 덜 틀릴 뿐이다.

 

* 인간의 뇌는 의미를 산출하는 기계다. 우리가 ‘의미’라고 이해하는 건 우리 뇌가 2개 이상의 경험을 엮음으로써 생겨난다.

 

하지만 여기에 2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뇌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들을 때 자주 착각하며, 쉽게 잊고 오판한다. 둘째,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그 의미에 집착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뇌가 만든 의미 쪽으로 치우쳐 그걸 놓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만든 의미에 모순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조차 그걸 무시하고 기존의 믿음을 고수한다.

 

* 우리는 뭔가를 경험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걸 약간 다르게 기억한다. 귓속말을 들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할 때 이야기에 있는 몇몇 허점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래야 모든 게 말이 되고 자기가 제정신인 게 되니까. 그러고는 그렇게 상상으로 채워 넣은 내용을 사실로 믿어 버린 채 그걸 다시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사실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 제아무리 정직하고 선하다고 해도 사람은 늘 자신과 타인을 속이며 산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두뇌가 정확성이 아니라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다. 너무 형편없어서 법정에서 목격자 증언이 증거로 채택되리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게다가 우리의 두뇌는 지독하게 편향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왜 그럴까? 두뇌는 언제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믿음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새로운 정보는 모조리 일단 기존 가치와 결론에 무게를 두고 저울질한다. 그 결과, 두뇌는 항상 우리가 그 순간에 참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치우친다.

 

* “너 자신을 믿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이런 달콤한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는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덜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더 많이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이라면, 자신의 믿음과 가정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을 의심하는 것 외에 발전하기 위한 논리적인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 에린은 자기계발 중독자다. 책과 세미나, 강좌에 수천 수만 달러를 쓴다. 그중에서 가장 정신 나간 짓은 배운 내용을 빠짐없이 그대로 실천한다는 거다. 에린은 꿈이 있다. 그리고 그걸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꿈을 마음속에 그린 다음 행동에 옮기고 거절과 실패를 견디고 일어나서 다시 시도한다. 에린의 긍정은 끝을 모른다. 또한 자신을 엄청 과대평가한다. 예를 들면,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것처럼 자기가 고양이를 살렸다고 주장할 정도다. 정말 기가 막힌다.

 

* 우리는 이런 안정감을 뒤흔드는 것을 마주치면, 그게 뭐든 일단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줄지 모르는 것일지라도.

 

맨슨의 법칙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에 적용된다.

 

*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없는 기대에 옮아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가치를 반드시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도 그것을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일 것이다.

 

* 대중 매체는 엄청난 성공담을 끊임없이 내보내지만, 정작 성공하는 데 필수적인 수천 시간의 단조로운 연습과 지루함은 보여주지 않는다.

 

* 피카소는 평생을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90세가 넘어서까지,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의 기준이 ‘유명해지기’나 ‘예술계의 부호가 되기’ 혹은 ‘그림 1,000장 그리기’였다면 어느 순간 열정을 잃고 불안과 회의감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그림을 그리며 작품 세계를 넓혀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피카소가 노년에도 카페에 앉아 냅킨에 그림을 휘갈기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그가 성공한 이유다. 피카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끝이 없는 것이었다. 그 가치는 바로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그가 냅킨에 휘갈겨 그린 그림조차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 삶은 무지와 행위로 이루어진다. 모든 삶이 다 그렇다. 이건 변치 않는 진리다.

 

*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 ‘뭐라도 해’ 원리를 따르면, 실패가 하찮게 느껴진다. 모든 결과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은 그저 행동하는 것이며, 자극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보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실패는 또다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 당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길은 수많은 선택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 가지에 몰입하라. 자유를 얻을 것이다.

* 몇 년 동안의 신나는 모험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 거부는 가치관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무엇을 거부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면, 아예 정체성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부와 대립, 갈등을 피하려는 욕구, 모든 걸 동등하게 여기고 모든 걸 조화롭게 만들려는 욕구는 교묘하고 심각한 형태의 허세다.

 

* 건전한 관계와 불건전한 관계의 차이는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각자가 책임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가. 둘째, 각자가 기꺼이 상대를 거절하고 상대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가. 불건전하거나 치명적인 관계를 맺는 이들은 하나같이 책임감이 희박하며, 거절을 하지도 받아 들지도 못한다

 

* 강압적인 어머니는 자식이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문제를 책임지려 하고, 그렇게 자란 아이는 결국 어른이 돼서도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게 된다.

 

*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때는 ‘스스로 원해서’ 해야 한다. 의무감으로 또는 희생하지 않았을 때 생길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희생하면 안 된다. 가령 당신 애인이 당신을 위해 희생한다면, 애인이 스스로 원해서 해야 한다. 당신이 분노나 죄책감을 이용해 애인을 희생하도록 몰아가면 안 된다. 사랑이라는 행위는 조건이나 기대가 없을 때만 타당하다.

 

의무감으로 하는 행동과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의 차이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여기 리트머스 시험지를 준비했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거절하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까?” “내 애인이 내가 원하는 걸 거절하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까?”

 

거절하면 난리가 나서 접시가 날아다닐 거라는 답이 나오면, 관계가 틀려먹었다는 뜻이다.

 

* 우리가 관계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자신과 상대를 늘 만족시키는 거라면, 결국에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가 무너져 내린다. 갈등이 없다면, 신뢰도 있을 수 없다.

 

* 허물어진 신뢰를 다시 쌓으려면 무조건 다음 단계들을 따라야 한다.

 

1 신뢰를 깬 사람이 자신의 어떤 가치관 때문에 불화가 생겼는지를 인정하고 실토한다.

 

2 신뢰를 깬 사람이 오랫동안 일관되게 나아진 모습을 보인다.

 

* 신뢰는 사기그릇과 같다. 처음 깨뜨렸을 때는 조심조심 다시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또 한 번 깨뜨렸을 때는 조각조각 깨져서 다시 붙이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여러 번 깨뜨리다 보면 결국엔 다시는 붙일 수 없게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세상엔 깨진 조각과 가루가 너무도 많다.

 

* 심리학자들이 ‘선택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시달리게 된다. 우리는 선택지가 많을수록 어떤 선택을 하든 덜 만족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다른 모든 선택지에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다.

 

* 죽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관해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꺼리며, 때로는 인정하지 않기까지 한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에게 죽음이 닥칠 때조차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인생의 의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빛이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걸 하찮게 느낄 것이며, 모든 경험을 제멋대로 판단할 것이다.

 

* 마크 트웨인조차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다.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 당신이 대단한 건, 끝없는 혼란과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어디에 신경을 쓰고 어디에 신경을 끌지를 계속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며 나름의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이미 당신을 아름답고 성공적이며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다.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