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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지하만리장성(地下萬里長城)

Paul Ahn 2022. 3. 18. 19:32

DMZ 지하만리장성(地下萬里長城)

 

휴전선 북쪽 DMZ… 4000km(총연장) '地下만리장성'이 있다.

(chosun.com)

 

6·25 때 중공·북한군이 건설

한반도 동서로 '허리' 파헤쳐… '마지노선' 능가하는 거대 요새

 

비무장지대의 자연 밑에는 총길이 4000㎞의 거대한 요새가 있다. 휴전선 북쪽 비무장지대에 있는 이 요새는 임진강 하구~강원도 고성을 관통한다. 2차 세계대전 때의 마지노선(프랑스)이나 서부방벽(독일)을 능가하는 규모다.

 

이름은 '지하만리장성(地下萬里長城)', 6·25 때 북한군과 함께 요새를 만든 중공군이 붙였다. 이 지하 장성은 최근 이기환씨의 한양대 석사학위 논문 '비무장지대 일원 유산의 보전방안 연구' 등을 통해 베일을 벗고 있다.

 

 

중공군은 1951 8월부터 진지 구축에 나섰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른 뒤 1949년 새 정부를 출범시킨 입장에서 경제전쟁과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어려워 낸 아이디어였다.

 

화력이 우세한 유엔군의 폭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라면 동굴 형태여야 했다. 10월 중공군 사령부는 "거점은 반드시 갱도(坑道)식으로 확보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파라"고 지시했다.

 

공사는 전() 전선으로 확대됐다. 고지 뒤쪽 비탈부터 파내려가 안에 그물 모양 통로와 포좌(砲座)를 만들었다. 임무와 지형에 따라 말발굽, 방사선, (), ()자형으로 팠고 주요 거점은 2층으로 만들었다.

 

방공(防空), 방호(防護), 방독(防毒), 방수(防水), 방화(放火), 방습(防濕), 방한(防寒) '7()'이 공사의 원칙이었다. 폭약은 유엔군의 불발탄으로 만들고 주위에는 철공소까지 세워 삽과 곡괭이를 제작했다.

 

중공군측 기록은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하기 위해 손수레를 만들었다. 낮에 흙을 동굴 입구까지 옮겼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틀 때까지 공사를 계속했다"고 했다.

 

중국군사과학원 2005년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과 북한군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250㎞의 전선 곳곳에 지하갱도, '땅굴'을 거점으로 한 요새를 만들었다.

 

총길이 287㎞에 이르는 9519개의 통로와 총길이 3683㎞에 이르는 784600개의 참호가 만들어졌다. 폭탄대피소와 지휘소·관측소·토치카는 101500개나 됐다. 서해~동해안까지 폭 20~30㎞의 거대한 개미집이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선집' 15권은 '지하만리장성'에 대해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와 강당이 있어 생활이 대단히 편했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땅굴 안 사정은 열악했다.

 

식수가 부족해 병사들은 혀가 갈라지고 코피를 쏟기도 했다. 야맹증 환자가 급증했다. 중공군은 민간요법에 따라 솔잎을 1시간씩 삶아 1주일간 마시거나 개구리 알을 물에 넣고 끓여 먹기도 했다고 한다.

 

유엔군이 폭탄과 화염방사기로 공격할 때 땅굴 안은 최악의 상황이 됐다. "화약 냄새, 독가스, 피비린내, ·소변 냄새, 땀 냄새가 갱도 안에 가득 차 숨쉬기가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공군의 '땅굴작전'은 곧 위력을 발휘했다. 1952 10월부터 김화 오성산 인근에서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는 2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났다. 그런데도 유엔군은 저격능선 일각만 확보하는 데서 그쳤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정일권(丁一權) 국군 제2사단장의 회고다. "입구는 작은 구멍인데 안에 들어가 보니 사통팔달이었다. 중공군의 반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동굴 진지에 숨어 있다가 들어온 것이었다."

 

1952 6~8월의 불모고지 전투 때 한 일본 기자는 "네이팜탄 투하 30분 뒤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며 기겁했다. 저격능선·삼각고지 전투는 중국에서는 '상감령(上甘領) 전투'로 알려졌고 대승으로 미화됐다.

 

당시 중국인들은 '상감령 대첩'에 열광했고 대륙 곳곳에서 보낸 편지와 위문품이 땅굴로 쏟아졌다. 1950년대 중국에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의지'라는 '상감령 정신'이 일세를 풍미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 '상감령'이 개봉됐는데 영화 끝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애창곡이 됐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도 이 노래가 불렸다.

 

'지하만리장성'의 전술은 6·25 후 북한군에 고스란히 전수됐고 훗날 '땅굴작전'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지금도 휴전선 북쪽인 김화 오성산 일대에는 유사시에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시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2009.10.10 03:30

유석재 기자

 

 

중공군이 핵전쟁을 대비해서 만든 지하 만리장성

http://worldstory12.tistory.com/m/248?dmp_channel=military&dmp_id=309368

 

한국전쟁 1951년 7월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중공군, 인민군은 전선 일대에 참호를 파고 벙커, 대공포를 구축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유엔군의 화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특히나 중공군의 약점(공세 이후 방어모드로 전환이 너무 느렸습니다.) 때문에 고지를 점령해 놓고도 한국군이나 유엔군에게 다시 밀리기를 수십 차례 반복을 했습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그래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추가적인 공세도 없을 것이고 당분간 이쪽 38선 근방에서 아웅다웅 할테니까 차라리 이곳에 강력한 터널네트워크GLA를 구축하여 유엔군이 대규모 공세를 가해오더라도 능히 방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상부에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김일성과 마오 쩌둥은 기가막힌 생각이라며 전폭 지원을 약속합니다.

따라서 인민군과 중공군, 북한의 장정들과 아녀자들까지 죄다 땅굴공사에 투입됩니다. 휴전선 인근에 어마어마한 터널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이 작업은 연인원 100만명을 동원한 대규모 공사였다고 전해지며 중공군의 일과시간은 특별한 작전이 없는 이상 밤에는 땅굴을 파고 낮에는 위 사진처럼 유엔군의 공습을 피해 숨어들어가서 쉬는 일상으로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금화지구쪽이나 서부전선 주요 지역에서 행해지던 공사는 1951년 10월 모든 전선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대공포좌는 물론이거니와 박격포진지, 직사화기 진지까지 완벽하게 만드는 공사로 임무와 지형에 따라 말발굽,  방사선, 입(入)자, 정(丁)자형으로 팠고 주요 거점은 2,3층 구조와 수백명의 병력이 집결 할 수 있는 광장까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깊이 5m 이상의 갱도식 진지는 공사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지반이 다  고른것도 아니어서 작업속도가 제각각이라 부상자도 속출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야간에 조명지원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인데 대놓고 전등이나 모닥불을 피워놓고 했다간 야간에 유엔군 공격기들이 몰려들어와 로켓과 네이팜으로 투하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것은 콩기름으로 만든 호롱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애로사항은 더해져만 갔습니다. 이유는 중국인들은 볶음, 튀김요리가 많아서 요리용 콩기름이 엄청 중요했는데 콩기름을 호롱불이나 횃불로 다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호롱불과 횃불마저도 유엔군에게 걸릴 수도 있어서 야간에도 안전한 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건 땅굴을 파면서 나온 흙이었는데 이 엄청난 토사를 해치우는데 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으며 낮에 흙들을 숲속이나 계곡에 숨겨놨다가 야간에 버리는 치열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은 이를 모를리가 없었고 항공정찰 결과 흙더미가 과도하게 쌓여있는 곳 주변을 맹폭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폭격을 맞아가면서 눈물 나는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들은 낮에 자고 밤에 일하는 생체리듬이 완전 꼬여버리고 야간에는 호롱불에 의지해 지하에서 갱도작업을 하다 보니 야맹증이 심해져 밤에는 한치앞도 볼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솔잎을 끓여먹고 개구리알을 삶아 먹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공사를 속행했습니다.

 

그 결과 1953년경 휴전선 근방에 만족할만한 터널네트워크가 구축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이 거대한 터널을 만들어놓고 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결과물이 나온데다가 인간승리의 현장이다 보니 " 땅굴은 원자폭탄과 맞먹는다! " 라며 극찬했습니다. (그 말을 10년뒤 김일성이 되뇌이면서 시작된게 남침용 땅굴작업하였습니다.)

 

휴전선 일대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터널 네트워크는 직선길이 287km 에 총연장 4000km 라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였으며 중국측 자료로는 이를 " 지하 만리장성 " 이라며 극찬을 해놨습니다. 폭은 20~30km 에 달하였으며 갱도수는 9519개, 엄폐호는 78만4천개(1인당 하나씩 진지를 잡아도 남을정도) 지휘소와 방공호, 토치카는 무려 10만5천개, 저장시설도 어마어마 해서 한개 사단당 3개월분의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 둘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지하 만리장성의 효과는 엄청나서 1952년 10월 저격능선 공세당시 포탄과 공습으로 저격능선을 한번 다 갈아 엎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돌격을 시작하자 지하에서 수천명의 중공군이 튀어나와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능선 정복에 실패했습니다. 유엔군이 돌격을 시작하자 지하에서 82mm 박격포반들이 멀쩡히 기어나와 수천발의 탄을 쏟아 붓는걸 보고 기겁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유엔군은 이후 공세에서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지금의 전선근방에서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땅굴의 엄청난 효과에 감동을 먹고 전후 휴전선 땅굴을 8천km 까지 연장시키는 공사를 또 진행했습니다. 이후 땅굴을 맹신했던 김일성은 이참에 서울까지 함 파보자고 해서 남침땅굴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세상이야기 World Story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