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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露〕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고려인 강제이주 1937

Paul Ahn 2024. 6. 19. 23:20

고려인(카레이스키) 강제이주 1937

 

-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약 172,000명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이주된 사건.

 

 

- 소련 인민위원회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 (1937 8 21)에 따라서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카자흐 공화국 및 우즈베크 공화국 등지로 강제이주 되었다.

 

- 이유는 이 지역에서 일본의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외모가 매우 유사하여 간첩 색출이 어렵다는 의견이 소련 지도부내에 있었고, 또한 일본은 1918년에 소련 땅을 침공한 적이 있으며, 1931년에는 이미 만주 지역을 장악하였고 1937년에는 중국 본토를 침공하였기 때문에 소련 극동 지역의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강제이주로 인하여 고려인들의 생활기반은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전되었다.

 

 

강제이주 80년 세월 흘러도… ‘카레이스키’ 통한의 삶 계속된다

(seoul.co.kr)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특별 기고〉

 

올해는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을 맞는 해다. 흔히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은 1860년대부터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정착해 살아온 우리 민족이다. 그들은 기근과 망국으로 조국을 떠났어도 두만강 건너 지척에서 민족공동체를 영위하며 살았다.

 

1937 8 21일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 떨어졌다. 일제와 첨예하게 대립해 온 소련이 고려인에게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원동(遠東·극동)을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설사 고려인 사회에 소수의 간첩이 있었다 한들 주민 모두를 적성(敵性)민족으로 몰아 일시에 추방한 것은 가혹한 민족탄압이었다.

 

그전까지 조국과 인접해 살며 이산의 한을 달래던 고려인들은 강제이주로 말미암아 20세기 디아스포라로 전락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전전하는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지울 수 없는 상처 안고 살아가는 그들

 

강제이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고려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9500명에서 2 5000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이자 결코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역사다. 그러나 강제이주가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정주(定住)로 이어짐으로써 한민족의 생활권역을 획기적으로 넓힌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강제이주에 앞서 스탈린 정권은 고려인 지도층 2500명을 체포해 고려인 사회를 미증유의 집단적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공포가 절정에 달했을 때 강제이주를 강행했다. 투옥된 사람들은일제의 사주를 받아 연해주를 소련에서 떼어내려는 폭동을 음모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대부분 처형되었다. 그들이 간첩이라고 증명된 경우는 거의 없다. 스탈린 정권은 간첩을 처형한 게 아니라 고려인의 민족적 저항을 제거한 것이었다.

 

 

●소련의 잔인한 대국주의 정책이 낳은 슬픔

 

강제이주는 전 과정이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고려인들은 2~3일 전, 또는 1주일 전에 겨우 이동준비를 연락받았다. 최종 행선지가 통보되지 않아 다만 멀리 떠난다는 것과 출발 일자밖에 알지 못했다. 당국은 단 1명의 이탈도 허용치 않았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퇴원시켜서, 복무 중인 군인은 제대시켜서 열차에 오르게 했다.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문 없는 컴컴한 화물열차에 갇혀 지냈다. 먼 길에 지쳐 모두가 앓았다. 질병에 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중도에 많이 숨졌다. 열차가 서면 이름도 모르는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기차여행 3~4주 만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초원과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1937 10월 말까지 이송이 완료된 고려인 수는 총 3 6442가구 17 1781. 그중 9 5256명이 카자흐스탄에, 7 6525명이 우즈베키스탄에 각각 짐을 풀었다. 그 후 수송된 4700여명을 포함하면 강제이주된 고려인 수는 총 18만명에 이른다.

 

원동지역에는 더이상 고려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고려인이 살던 444개 마을은 폐쇄되어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다. 강제이주는 1860년대 이래 고려인이 원동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쌓아 올린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인 파괴행위이자 인종청소였다. 공산제국 소련의 안보와 국가이익 앞에 소수민족 고려인 사회는 철저히 망가졌다.

 

 

●피맺힌 恨 가슴에 묻은 채 침묵의 삶

 

강제이주의 비극은 소련의 잔인한 대국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다. 하지만 주된 원인은 일·소의 적대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일전쟁 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고려인까지 천황의 신민으로 간주해 부당한 간섭을 일삼았다. 일제는 정탐 활동에 고려인을 이용함으로써 소련의 고려인 불신과 안보불안을 부추겼다.

 

1937 6월 아무르 강에서 관동군이 소련 군함을 격침시킨 데 이어 7월에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우수리 지방에서 일·소 간 군사충돌이 빈발하자 고려인에 대한 스탈린의 적대적 경계심은 더욱 커갔다. 급기야 스탈린은 고려인을 일본 간첩으로 몰아 강제이주라는 전대미문의 폭거를 자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은 일본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소 대립의 틈바귀에서 찢기고 짓밟힌 것이 나라 없는 백성 고려인이었다.

 

강제이주로 70년 정든 땅에서 쫓겨난 고려인들은 소련이 개혁·개방될 때까지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 묻은 채 침묵의 삶을 살았다. 소련공산당이강제이주가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범죄행위였다고 시인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89년이다. 그 후 러시아 정부는강제이주는 폭력적인 집단학살이었다고 그 죄과를 분명히 하며 고려인에게 원래 거주지인 연해주로 귀환할 권리를 인정했다. 고려인들은 수십년간 그들을 짓눌렀던 적성민족의 불명예에서 벗어나 비로소 고향인 원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낯선 땅에서 80… 93%는 귀향하지 않았다

 

강제이주 당시 18만명이었던 고려인 인구는 지금 45만명(사할린 고려인 제외)으로 늘어나,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똬리를 틀고 살고 있다. 세대마다 이주를 거듭해 온유랑민고려인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표적인 분산민족이다. 대륙의 어디든 고려인이 없는 곳이 없지만 그렇다고 민족자치를 거론할 만큼 다수파로 밀집해 사는 곳도 없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일대다. 이곳의 고려인 수는 약 13만명에 달한다.

 

한반도와 가까운 원동지구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연해주의 1 8800명을 비롯해 모두 3 2000(2010년 러시아 인구센서스)에 불과하다. 유라시아 고려인 45만명 중 겨우 7%만 원동으로 귀환해 살고 있다. 나머지 93%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타향살이.

 

지금은 하산군으로 이름이 바뀐 남우수리 지방은 고려인의 발원지다. 3년 전 그곳에서 필자가 확인한 고려인 귀환자는 단 2가구였다. 강제이주 전 고려인 수만명이 밀집해 살던 곳이 지금은 고려인이라곤 발견하기조차 힘든 낯선 땅이 돼버렸다.

 

이곳의 중·러 국경지대는 경비가 삼엄하다. 출입통제구역이어서 사전 신고 없이는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고향을 찾은 고려인도 마찬가지였다. 8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어도 강제이주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2017-07-30 17:26

김호준 역사저널리스트

 

 

연해주(沿海州)

(wikipedia.org)

 

프리모르스키 변경주(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沿海 邊疆))는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변경주이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를 뜻한다. 한자로 훈차해서 연해주(沿海州)라고도 불린다. 행정 중심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 5,900, 인구는 191 3,037(2018년 기준)이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에 최초로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인들이었다. 5~6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나이, 우데게, 에벤키 같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아직도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는 발해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발해는 연해주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으며, 만주와 이 지역의 일부를 통치하였던 고구려의 후예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115년부터 1234년까지 극동 러시아의 남쪽 부분은 보다 강력한 제국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였다. 여진족은 퉁구스계의 민족이다. 유목과 농업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금나라는 또한 야금, 조선(造船) 등의 산업이 있었다. 금나라는 발해와 마찬가지로 송, 고려,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북부 중국을 점령한 금나라는 꽤 강한 국력을 과시하였다.

 

금나라는 몽골 제국 칭기즈 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300년 이상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독특한 동식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과 만주를 활동한 만주족이 17세기 초 기반으로 중원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설하면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면서 청-러시아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1689년에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스타노보이산맥을 국경으로 정했다.

 

2차 아편 전쟁(1856 - 1860)으로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 제국은 남진하여 니콜라이 무라피요프-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있어서 러시아가 해안지방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러시아는 1858년 체결한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강의 이북 지역을, 1860년에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강 동쪽인 연해주를 차지하였다.

 

1859년부터 1882년 사이에 95개의 정착지가 건설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당시 인구의 3분의 2 이상은 농업, 수렵, 생선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석탄 채굴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일, 녹용, 목재, , 건어물, 해삼 등도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부터 이 지역의 발전은 러시아를 새로 차지하게 된 볼셰비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어업과 광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철도와 해운업 역시 발달했다.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한국인(주로 고려인,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출신), 일본인, 중국인, 우데게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폴란드인, 타타르족, 독일인, 유대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민족들이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