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俄館 播遷) 1896
[1〕 아관파천이란?
조선 후기에는 지금의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들어온 표현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의 중국 서적에도 아라사라고 기재되어 있다. 지금의 러시아를 일컫는 또 다른 표현은 로서아(露西亜)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쓰던 표기법이다. 처음에는 두 말이 혼용되다가 1905년 이후가 되면 일본식 표현인 로서아란 말이 아라사란 말을 완전히 밀어냈다.
아관파천이라고 할 때 아관(俄館)은 아라사공사관 즉 러시아공사관을 일컫는다.
파천(播遷)이란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성을 떠나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신할 때에도 파천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아관파천이란 임금이 난리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것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고종은 1896년(고종 33)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가서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다. 일국의 국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까
[2] 밤을 무서워한 고종
1887년(고종 24) 2월 경복궁에 전등불이 밝혀졌다. 조선은 미국에서 기술자 윌리엄 멕케이(William McKay)를 초빙하여 처음으로 궁궐에 전등을 설치하였다. 전등을 궁궐에 제일 먼저 설치한 이유는 당시 왕실의 구성원들이 선진 문물에 가장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천야록』에 의하면 고종은 한밤중에 난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전등을 설치하여 새벽까지 불을 밝혔다고 한다. 전등 가설의 이면에 어느 정도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매천야록』에서 서술처럼 고종은 일찍부터 많은 변란을 겪어야만 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는 군병들이 궁궐에 들이닥쳐 왕비를 해치려고 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는 한밤중에 들이닥친 개화당 인사들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하였다. 이렇게 고종은 일찍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고종의 불안감을 극단에까지 치닫게 한 사건이 1895년(고종 32) 8월 20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이었다. 일본 군경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자신과 가장 가까운 왕비를 시해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차마 직접 고종의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지만 당시 고종이 느꼈을 공포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에도 고종은 사실상 궁궐에 감금된 상태였다. 을미사변 때 출동한 일본군은 아주 철수하지 않고 현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던 옛 삼군부 건물에 눌러 앉아 경복궁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한 경복궁을 경비하던 조선의 병력도 친일적인 개화파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2중의 감시망 속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3] 실패로 돌아간 구출 시도
1895년(고종 32) 10월 12일 감금 상태에 놓여 있던 고종을 구출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춘생문이었다고 해서 춘생문사건이라고 부른다. 춘생문은 경복궁 북동쪽 신무문 밖에 있었던 후원의 동쪽 문이었다. 현재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이다.
이 사건은 시종원경 이재순(李載純), 시종 임최수(林最洙), 참령 이도철(李道徹) 등이 계획한 일이다. 여기에 정동파 관료 이범진(李範瑨),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윤웅렬(尹雄烈) 등이 참여하였고 언더우드(Underwood, H. G.), 에비슨(Avison, O. R.), 헐버트(Hulbert, H. B.), 다이(Dye, W. Mc) 등 외국인들도 가담하였다.
이들의 계획은 병력을 이끌고 궁궐에 쳐들어가 고종을 궁궐 밖으로 탈출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친위대 중대장 남만리(南萬里) 등이 이끄는 800여 명의 병력이 춘생문에 접근하였지만 미리 정보가 새는 바람에 고종을 구출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춘생문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과 개화파 정부는 이를 빌미로 강경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고종에 대한 감시와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단발령을 비롯한 급진적인 을미개혁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이렇게 섣부르게 시도된 춘생문사건은 단기적으로는 고종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앞으로 있을 아관파천의 반면교사로(서의) 톡톡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러시아공사관에 나타난 고종
1896년(고종 33) 2월 11일 새벽 궁녀들이 타는 가마 두 채가 몰래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 나갔다. 그 가마는 곧이어 당시 정동 언덕마루에 있었던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하였다. 가마에서 국왕인 고종과 세자가 내렸다. 국왕의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 즉 아관파천이 극적으로 성공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앞서 춘생문사건에 참여한 바 있는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이 꾸민 일이었다. 러시아 공사도 함께 모의하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즉시 당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구성원을 모두 파면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였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대신 정병하(鄭秉夏)는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일본으로 도망친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에게는 체포령을 내려졌다. 이로써 친일적인 개화파 정부는 붕괴되고 말았다.
아관파천은 장기간에 걸친 계획에 따라 추진되었다.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을미의병이었다. 을미의병이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일으킨 무력항쟁이다. 당시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킨 유생들도 있었지만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을 일으킨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고종이 봉기할 것을 명령하는 밀지를 내린 것은 그래야만 자신이 받는 감시가 느슨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1896년(고종 33) 1월말이 되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가 안동을 비롯한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고종이 의병봉기를 부추긴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하기 불과 하루 전에 100여 명의 러시아 군인이 대포 1문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 명목상 이유는 조선의 치안이 불안하여 공사관과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당시 미국도 공사관을 경비할 해병대 병력을 서울에 올려 보낸 상태였다. 이렇게 겉으로는 ‘폭도’로부터 공사관을 보호한다고 내걸었지만 그 날짜를 따져보면 실제로는 고종을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였다. 의병봉기 - 러시아공사관 수비병 상경 –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잘 짜인 각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본에 따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민영환이 러시아에 간 까닭은
1896년(고종 33) 5월 26일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다. 조선에서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민영환(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민영환은 대관식 참석 이외에 별도의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러시아 경비병의 증파와 군사교관 파견 등 5개 사항에 대해 러시아에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민영환이 러시아로 출발할 무렵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다. 아관파천을 단행해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났지만 신변의 위협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여전히 서울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각계각층에서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명분상 환궁을 아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고종은 1896년(고종 33) 2월 13일 윤음을 내려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지만 여기서도 정세가 안정되면 즉각 환궁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따라서 장차 환궁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기반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민영환이 러시아에 건너간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군사지원을 얻어내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영환은 현지에서 러시아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부딪혀야만 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과 뒷거래를 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야마가타 로바노프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그 핵심은 한반도에서 러일간의 세력균형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조선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없었다. 민영환은 애당초 200명의 군사교관을 요청했지만 푸차타(Putiata) 대령이 이끄는 13명의 군사고문단과 함께 귀국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
민영환과 함께 조선에 온 러시아 군사고문단은 급한 대로 800명의 병력을 선발하여 러시아식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후일 환궁했을 때 이들을 궁궐의 호위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와 동시에 경운궁을 중건하는 공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이러한 준비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897년 2월 2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할 수 있었다.
[6] 대한 제국 선포로 마무리된 아관파천
고종은 1년간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돌아왔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시 고종은 국왕의 안위만이 보장된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킨 상태에서 환궁한 것이었다. 아직은 국가체제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정비와 정책노선의 재확립이 필요했다. 아관파천을 통해 친일적인 개화파 정부는 붕괴되었지만 새로운 정부가 곧바로 안정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특히 국왕의 정치적 위상은 분명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정책노선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였다. 단발령을 비롯한 개화파 정부의 정책은 상당수 백지화했지만 곧바로 위정척사파의 보수노선으로 환원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정비와 정책노선의 재확립 작업이 환궁 후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의 결과물이 외화된 것이 바로 대한 제국의 선포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관파천이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는 대한 제국을 선포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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