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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빈도림(賓道林)꿀초 / 꿀초공방

Paul Ahn 2018. 11. 30. 09:25

★빈도림꿀초 / 꿀초공방

honeycandle.co.kr

 

•위치 :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용산로 265-91

 

빈도림의 한자는 객빈() 길도() 수풀림()이다. 그가 손수 지은 이름으로자연에 사는 나그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 결혼해 1 2녀를 길렀다. 어찌 보면 여느 한국인과 똑같은 삶을 산 것이다. 2005년에는 귀화해 아예 한국인이 됐다.

 

 

꿀내음 가득한 옥천골…꿀초 만드는 빈도림·이영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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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에 가면 꼭 한번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옥천골 깊은 골짜기에 있는 빈도림씨의 꿀초 공방이 그곳. 국내에서 유일하게 천연 재료인 밀랍으로 초를 만드는 이 부부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사이좋게 초를 만들고 독일어와 한국어를 번역하며 느린 삶을 살고 있다. 뜨거운 햇살도 잠시 쉬었다 가는 동몽헌에 깃든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쑥 찾아오는 손님도 그저 반가운 시골 생활에는 느림의 미학과 행복이 있습니다

 

자연이 내린 선물, 밀랍초를 되살리다

 

그들은 몇 차례의 방송 출연과 인터뷰 등으로 꽤나 유명세를 탔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많은데도 반갑게 맞아들이는 걸 보니 사람들이 모여들 운인가 보다.

 

꿀초 공방을 꾸린 주인장 빈도림씨(54)는 독일 출신의 귀화 한국인이다. 국문학을 공부해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주한독일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부인 이영희씨(49)는 반대로 독문학을 전공했다. 서울토박이지만 시골 아낙으로 사는 것이 체질에 맞는지 집 풍경과 그림처럼 어울린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번역가로 일하던 그녀는 빈도림씨와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꿀초를 만들고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투잡(Two-job)에 공동 작업이지만 이 부부에게는 그런 표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물 흐르듯 때가 되면 초를 만들고 의뢰가 들어오면 함께 번역 작업을 하는 식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텃밭을 돌보고 개들에게 사료를 먹이고 밥을 짓고, 또 일을 한다. 이것이 일과다.

 

거창한 목표나 계획 없이 시작한 꿀초 만들기가 만 5년을 채웠다. 밀랍으로 초를 만들게 된 것은 빈도림씨 말대로우연처럼 찾아온 운명이었다. 이곳 옥천골에 집을 짓고 정착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즈음 군립묘지가 들어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담양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 집터를 찾다가 추월산 자락에 자리한 어느 한봉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집을 보러 농가에 들렀다가 벌집채로 꿀을 먹었어요. 꿀만 빨아먹고 입 안에 남은 밀랍을 내뱉다가 꿀을 내려서 팔고 나면 밀랍이 남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버린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밀랍을 버리지 말고 모아서 주시면 초를 만들어드린다고 한 것이 꿀초 만들기의 시작이었어요. 벌꿀이 6배의 꿀을 먹어야 생산해낸다는 귀한 밀랍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거든요.”

 

그러나 밀랍초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빈도림씨는 독일에서 벌집을 가열한 뒤 죽은 벌이나 애벌레 등 불순물을 제거하고 갖가지 모양의 틀에 담아 노란 초를 만드는 것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 책과 인터넷 등의 정보를 토대로 초를 만들어봤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독일까지 날아가 초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다. 한국에는 파라핀으로 만든 양초가 들어오면서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밀랍초의 명맥이 끊겼고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버려지는 밀랍을 이용해 아름다운 초를 만드는 빈도림씨의 작업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다.

 

“밀랍은 자연이 내린 선물입니다. 벌집의 주재료인 밀랍은 벌들이 자연에서 채취하는 물질이 아니라 신진대사를 통해 만들어내는 물질이지요. 벌이 밀랍 1kg을 생산하려면 꿀을 6kg이나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봉과는 달리 파라핀을 사용하지 않고 벌들이 혼자 힘으로 집을 짓도록 하는 한봉 밀랍만을 사용합니다.”

 

초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길쭉한 모양의 초는 옷걸이를 이용해 직접 만든 초틀에 심지를 매달고, 밀랍을 녹여 부은 커다란 통에 수십 번씩 담갔다 빼는 담금질을 해서 만든다. 용기를 이용한 초는 대나무나 도자기 등 각종 틀에 심지를 세우고 밀랍을 녹여 붓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완제품 초를 찾는 이들도 많지만 요즘은 밀랍과 용기, 심지로 구성돼 집에서 직접 초를 만들 수 있는 DIY 세트가 인기라고 한다.

 

주위 사람들과 나눠 쓰려고 소박하게 시작한 초 만들기는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구색을 갖추어갔다. 2년 전에는 번듯한 공방까지 지어 한결 작업하기가 수월해졌다. 예년 같으면 비수기인 여름철인데도 주문이 적지 않아 아르바이트생까지 들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온 대학생들이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담금 작업은 빈도림씨가 직접 하지만 심지나 포장 등의 단순 작업은 학생들에게 맡겼다. 일체의 화학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노동은 위험하지 않고, 단순하고 소박하다.

 

 

◇군사분계선 사라진 독일인에서 분단 치하 한국인 되기까지

 

만드는 이들의 꾸준함과 한결같음 덕분일까. 꿀초는 꾸준히 입소문을 타고 파라핀 양초를 좋아하지 않는 꿀초 마니아를 형성했다. 특히 담양 특산물인 대나무에 밀랍을 부어 만든 대나무꿀초는 담양 특산품으로 지정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손 작업을 좋아하는 빈도림씨는 만드는 것마다작품이 된다. 일하는 틈틈이 만든 작품들로 작년 겨울 달뫼미술관에서 밀랍의부드러움의 힘을 보여주는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아무래도 선비보다는 예술가 체질인 모양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거실 벽의 한지공예도 지인과 직접 작업한 것이란다. 작업실에 인상적인 문구가 붙어 있다. ‘두 손만 써서 작업하는 사람은 노동자고, 머리를 쓰는 사람은 기술자지만 가슴까지 쓰는 사람은 예술가’.

 

그의 작업에는 삶의 철학이 함께 녹아 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라이프치히 촛불모임을 떠올리며 만든 작품에는 군사분계선과 철조망, 그리고 촛불이 등장한다. 군화 아래에 밀랍으로 날카로운 부분을 감싼 못들이 놓여 있는 작품은 그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을 앓는다고는 하지만 이제 한국 사람이 된 그는 다시, 여전히 통일을 꿈꾼다. 이제는 유일한 분단국이 됐지만, 독일과 한국은 20세기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기구한 운명마저 공유하지 않았던가.

 

빈도림씨는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것 같다. 그는 독일에서 동양학과 한국학을 전공하고 1974년부터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이어 1984년 독일에서 한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단에 섰고 독일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한국 생활이 벌써 30여 년. 독일에서 지낸 기간보다 더 길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12년 전 부부가 된 아내 이영희씨는 독문학 전공자. 두 사람은 10년 가까운 대사관 근무를 접고 별장터로 점찍어두었던 담양 골짜기에 집을 짓고 알콩달콩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2005년에 비로소 독일인 디르크 휜들링에서 담양 빈씨 1대 한국인이 되는 절차를 마쳤다.

 

“어차피 독일에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한국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70년대 유신 치하 서슬 퍼런 한국에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서울대 어학원 재학 당시 외국 유학생들만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교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며 한국어를 공부했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고 한국 사회도 민주화란 지난한 과정을 겪었지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이제 됐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국인으로 귀화한 겁니다.”

 

애초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영희씨보다 한국인이 되기를선택한 빈도림씨가 더 한국인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서로 한국어와 독일어 전공자라는 징검다리를 갖고 있는 이 부부는 번역 작업도따로 또 같이한다. 이제껏 부부가 번역한 책만 수십 권에 달한다. 한국책을 독일어로 번역할 땐 남편이, 독일책을 한국어로 번역할 땐 아내가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영희씨는 「문명의 공존」,「휴머니즘 동물학」 등 수십 권의 독일서적을 한국어로 옮겼다. 빈도림씨는 동양학에 조예가 깊어 원불교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반면 가사 일은 손재주와 요리 솜씨 좋은 빈도림씨가 도맡아 한다.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설계에서부터 짓고 꾸미기, 리모델링까지 모두 빈씨가 직접 했다. 1층은 거실과 부엌, 남편 서재로, 2층은 침실과 아내 서재가 있는 나무집은 구석구석 재주 많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두 번째 결혼, 느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장난기가 뚝뚝 묻어나는 빈도림씨와 서글서글하니 함박웃음을 짓는 이영희씨. 두 사람은천생연분이란 표현이 모자람을 느끼게 하는 부부다. 각각 사별과 이혼을 겪은 후 만나 오히려 더욱 단단한 사랑의 결실을 이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으로 가족의 연을 맺은 세 자녀가 있다. 큰딸 용화씨는 호주에서 로스쿨을 다니다 얼마 전 호주 사람과 결혼, 하와이에 신혼집을 차렸다. 용수씨와 경민씨는아버지의 나라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부인에게 잘하기로 소문난 빈도림씨도 이제는 사위에게 한 수 배워야 할 처지가 됐다며 너스레다.

“저는 이 사람만 잘해주는 줄 알았더니, 세상에 그런 남편이 없대요. 이 사람 같으면 트렁크 세 개를 들고 저는 핸드백만 들게 할 텐데 사위는 글쎄 핸드백까지 자기가 몽땅 다 든다니까요(웃음).”

 

이영희씨는 피부색 다른 사위 자랑에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진다. 하긴 큰딸은 집안일 도맡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웬만한 한국 남자는 성에 차지도 않았을 터다. 24시간 같이 지내는데도 결혼 초기 외에는 싸울 일조차 없었다는 이 부부가 사는 법, 많은 부부에게 귀감이 될 듯하다.

 

“우리도 서울 살 때는 마음이 늘 바빴어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도 지인들 얼굴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강 건너가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죠. 문화생활도 큰맘 먹어야 가능했고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마음도 여유롭고 문화생활도 더 자주 해요. 교통이 불편한 거 같아도 광주까지 40분이면 충분하니까요. 주변 사람들과도 자주 왕래하게 되고 얼마나 좋은데요.”

 

매달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월급 통장이 없으니 머리 아프게 주판알 튕길 일도 없다. 돈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수입이 적어도 상관없다. 일단 주문이 들어오면 입금 여부 확인은 나중 일이고 정성껏 포장해서 보내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으는 부부. 그런 여유와 넉넉함이 마냥 부럽다.

 

“텃밭에서 부식거리도 다 키우니까, 돈 나갈 일이 드물지요. 밀랍이 형태를 가진 초가 되면 추수하는 것 같이 마음이 넉넉해져요. 돈이야 늦게 들어올 수도 있지만 여태껏 한 번도 떼인 일이 없답니다. 우리 사는 모습이 보기 좋은지 불쑥 찾아오는 손님들이 더러 있어요. 행복하지요.”

 

골짜기에 석양이 찾아들면 둘은 촛불을 켜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TV에 한 번씩 나올 때마다 부쩍 사람들이 알아보고 찾아주는 게 반갑지만 한편으론 놀랍다. 한 달에 한 번 플러그를 뽑고 초를 켜자는 환경운동캔들 나이트에 적극 동감하는 그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 저녁 9시면 촛불마저 꺼지고 하얀 집은 이내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반갑지 않은 손님’ 1순위는 9시가 넘어 전화하는 사람이라고. 서울에서는 아무도 잠들지 않는 시간, 느리디느린 동몽헌에서 유일하게 빠른 것은 한밤중이다.

 

레이디경향 2007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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