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경성부의 백화점
〈일본계 백화점 위치 및 개점년도〉
*미쓰코시(三越) : 현 신세계 본점, 1930년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 : 현 롯데영플라자, 구 미도파 본점,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 1933년
*히라타(平田) : 현 대연각빌딩, 1926년
■ 미쓰코시(三越) 경성점 / 1906-1945
서울 최초의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
서울특별시에 세워진 최초의 백화점은 1906년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1가에 일본인이 세운 미츠코시 오복점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미츠코시 백화점의 서울출장소이자 소규모 잡화점의 역할을 하던 미츠코시 오복점은 1929년 서울 출장소가 지점으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으로 백화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지상 4층, 지하 1층, 종업원 360여 명 규모의 근대식 대형 백화점이 들어선 것이다. 미츠코시 백화점의 설립은 우리나라 유통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형 매장, 정찰제 판매, 박리다매 전략을 쓰는 백화점의 등장에 조선 사람들의 소비문화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30년 10월 24일,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옛 경성부청 터에 화려한 개막식을 열었다. 백화점은 조선은행, 경성우편국과 함께 경성 남촌을 대표하는 건물로 자리 잡았다.
지하에는 주방용품, 식료품 등을 파는 잡화코너와 간이식당이 있었고, 1층에는 화장품을 비롯한 고급 식료품 매장이 있었다. 2층에서 4층까지는 귀금속, 가구, 기성복 등을 파는 다양한 매장과 커피숍, 대형식당 등이 자리를 채웠다. 화려한 신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쇼윈도우, 엘리베이터, 당시 최고의 명소로 소문난 옥상정원 등 모던한 멋을 뽐내는 미츠코시 백화점은 경성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고 백화점 내외를 얼빠진 듯 방황하는 이른바 ‘혼부라당’ 풍습까지 생겨났다. ‘혼부라당’은 혼마치(현, 서울중구 충무로)를 어슬렁거리는 무리라는 뜻이다.
미쓰코시는 1945년 8.15 광복 후엔 귀속재산이 되어 동화백화점으로 영업을 하다가, 1962년 동방생명을 거쳐 1963년에 동방생명과 함께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신세계백화점으로 개칭하였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출발한 건물 외관은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 조지야 백화점(丁子屋百貨店) / 1904 - 1945
• 창립 : 1904년
• 폐쇄 : 1945년 8월 15일
• 창립자 : 小林源六
• 위치 : 경성부 메이지마치 (현 롯데 영플라자, 구 미도파 자리)
전신 : 쵸우지야 양복점
후신 : 미도파백화점
쵸우지야 백화점(丁子屋百貨店)은 20세기 초반 일본제국 조선과 만주국에 점포를 개점했던 일본 제국의 백화점이다.
경성부의 5대 백화점 중 하나로 불리었다.
〈조지아백화점 개점〉
1867년부터 일본 제국 미에현 쓰시에서 양품점을 운영하고 있던 창업주가 러일전쟁이 끝나고 당시 대한제국 부산의 거상이었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소유의 건물을 빌려서 1904년 4월, 부산부 변천마치(弁天町)에 "쵸우지야" 양복점을 개점, 10월에는 한성(후에 경성부)에도 점포를 개점했다. 1921년 "주식회사쵸우지야백화점"이 된 후, 경성부 메이지마치(明治町)에 본점을 두었다. 1929년에는 본점을 증축하여 총 2,200평 면적의 백화점이 되었다. 1935년 만주쵸우지야를 개업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전으로 종결되면서 쵸우지야 백화점 또한 일본 대외에 보유한 일체의 자산을 상실하여 해체되었다. 한편, 미에현 쓰시에는 지금도 과거 쵸우지야 백화점 창업주의 일족이 신사복점 쵸우지야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
〈중앙백화점과 미군 PX 〉
해방 후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은 1946년 『중앙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1948년 주한미군 24군단 PX로 미군 상대 영업을 했고, 1949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무역관'이 되어 한국무역협회 등이 입주하고 한국무역진흥을 위한 국산품 장려관으로 이용되었다.
〈미도파백화점〉
1954년 대한부동산이 인수해 '미도파백화점'으로 바꿨으나, 이후 무역협회으로 넘어간 뒤 1964년 (주)무역협회로 독립했다가 1969년에 대한농산의 산하에 들어가 미도파백화점으로 경영을 이어나갔다.
〈롯데영플러스 명동점〉
대농그룹이 해체되고 2002년 9월 롯데그룹에 인수돼, 2003년에 점명을 롯데미도파로 변경, 2013년에 롯데쇼핑에 흡수합병되었다. 미도파백화점이 있던 곳은 현재 롯데영플러스 명동점이 되어있다.
■ 미나카이 백화점(三中井百貨店) / 1905 - 1945
• 창립 : 1905년
• 해체 : 1945년 8월
• 창립자 : 나카에 가쓰지로 (中江勝次郎)(1872~1944)
후신 : 미나카이 양과점
본사 : 일본 시가현 칸자키군 미나미고카쇼촌 (南五個荘村)
미나카이 백화점(三中井百貨店)은 20세기 초반 일본제국령 조선과 만주, 중국대륙등에 개점했던 일본 제국의 백화점이다. 일본 제국시기 조선에서 미나카이 백화점은 쵸우지야 백화점, 히라타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화신백화점과 더불어 경성부의 제5대 백화점 중 하나로 불리었다.
창업자 나카에 가쓰지로(中江勝次郎, 1872년 - 1944년)가 일본 시가현 간자키군 미나미고카쇼촌(현 히가시오미시)에서 미나카이 오복점(三中井呉服店)을 창업한 것이 시초이다.
1905년에 대한제국으로 넘어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형제 3명과 함께 미나카이 상점을 설립하고 한일합병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11년 경성에 본점을 옮겼다.
이후 조선 각지와 만주, 중국 대륙으로 여러 개의 점포를 새로 개점하였다. 조선에는 경성, 부산, 대구, 평양, 함흥, 원산, 군산, 목포, 대전, 광주 총 10개 점포를 열었다.
1945년 종전 당시 조선에 12개 점포, 만주에 3개 점포, 중국에 3개 점포, 일본 내지에 총본부로 교토본사, 오사카와 도쿄에 입사부(仕入部)를 두었다. 당시 조선, 만주, 중국대륙에 최대의 백화점 체인을 건설했다.
전성기 최대 종업원 수는 약 4천여명에 매출액은 최대 1억엔 규모였다. 당시 조선에서의 매출액은 경쟁하던 일본 최대 백화점인 미쓰코시 백화점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여 전쟁이 종결되자, 미나카이 백화점이 가지고 있던 일체의 해외자산은 소멸 및 해체되었다.
창립자인 가쓰지로가 사망한 이후, 가족은 본부가 있던 일본의 시가현 간자키군으로 돌아가, 1949년에 전병점을 개점했다. 그후 취급품목을 양과자로 변경하여 1954년 7월 7일 시가현 히코네시 혼마치에 미나카이 양과점(후에 '미나카이'로 개칭)을 개점하였다. 1999년 이곳에 완성된 [유메쿄바시 캐슬 로드] 내의 점포 중 하나로 현재도 영업하고 미나카이 백화점의 심볼 마크인 이타비시를 계승하고 있다. 가쓰지로의 생가는 고카소 긴도쵸에 현존하며 오미 상인 저택 나카에 준고로 저택으로 일반 공개되어 있다.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917
미나카이 백화점의 취급 종목은 오복(吳服, 기모노)·양복과 식료품, 서양 가구 등 여러 잡화와 주방 및 철물 용구, 완구, 문방구, 운동구, 서적, 귀금속, 악기, 시계, 미술품 등이었고, 약의 조제와 판매, 관청 및 회사에의 납품 등을 행하였다. 또 맨 위층인 5층에는 유원 시설인 목마, 요지경 등 각종 놀이 시설이 있었다.
〈미나카이 상점과 백화점 창업〉
•미나카이 백화점의 대표이자 중역들인 나카에 가쓰지로(中江勝次郞), 규지로(久治郞), 도미주로(富十郞), 준고로(準五郞) 형제는 일본 시가 현 출신으로 러일 전쟁 당시 일확천금을 꿈꾸며 조선에 들어왔다.
처음 조선에 진출할 당시에는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선점하고 있던 부산이 아닌 경부선이 지나는 대구의 시장성을 보고 1905년 생활용품 잡화점인 미나카이 상점을 창업하였다.
미나카이 상점은 대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지에 포목점을 개설하였는데, 부산지점은 1917년 문을 열었다. 그 후 미쓰코시 백화점, 조지야 백화점이 경성에 개설되자, 미나카이도 1919년 경성에 미나카이 포목점 경성본점을 개점하여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백화점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1933년 경성본점을 지상 6층 지하 1층의 흰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증축하면서 미나카이도 본격적인 백화점 반열에 올랐다. 이어 각 지역에 지점을 개설하였는데, 부산을 비롯한 대구, 대전 등에 12개 점포를 두고 만주의 신경, 하얼빈, 중국의 북경과 남경에도 진출하는 등 거대 백화점으로 성장하였다.
〈미나카이 부산점〉
• 부산점 위치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롯데백화점 광복점),
• 개점 : 1937년
미나카이 백화점은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최초이자 최대의 백화점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타기 위해 백화점에 가기도 하였다. 해방 후까지도 부산 사람들은 백화점에 간다는 말을 ‘미나카이 간다’로 표현할 만큼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미나카이 경성본점이 면모를 일신하면서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백화점 사업을 본격화하였는데, 부산지점 역시 그 일환으로 개설되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의 소비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백화점 사업은 일본인 기업가들에게 이윤을 확대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 업종 가운데 하나였다.
미나카이 백화점 부산지점은 1937년 9월 부지 2,310㎡(700평)에 5층 건물로 신축되었으며, 부지는 부산부청 인근의 일등지였다.
6·25 전쟁 시기 부산의 미나카이 백화점 건물은 야전 군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1967년 10월 25일 부산상공회의소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상공회의소 회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1976년 5층 건물에 2층을 더 올려 7층 건물로 증축하였다. 1987년 부산상공회의소가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범천동 신청사로 이전한 이후 부산시청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98년 1월 부산광역시청이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으로 옮길 때까지 엘리베이터가 사용되었다.
이후 건물은 롯데 백화점 광복동점 신축으로 1998년 10월 철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2009년 12월 그 자리에 역시 백화점이 들어서서 옛 미나카이와 같이 성업 중이다.
■ 히라타 백화점(平田百貨店) / 1908 - 1945
• 위치 : 조선 경성부 혼마치 1쵸우메 ( 平田· 현 고려대연각타워)
• 창립 : 1908년 (1926년 백화점으로 전환)
• 창립자 : 平田智恵人
• 해체 : 1945년 8월
후신 : 서울만물전
히라타 백화점(平田百貨店)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성에서 영업했던 일본 백화점이다. 일본제국 시기 조선 경성부의 5대 백화점 중 하나였다.
히라타 백화점의 창업주인 히라다씨는 1908년 일본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와 와양잡화(和洋雑貨, 일본과 서양의 잡화)와 가구점을 개업했다. 1915년과 1922년 점포를 확장하고 1926년에는 혼마치거리(현 충무로)에 접하고 있던 목조 2층건물을 점포로 개장했다. 매장 면적은 당시 다른 백화점들에 비하여 작지만, 혼마치의 입구에 위치하여 입지가 좋았다. 당시 히라타 백화점은 일상용품과 식료품등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저가로 판매하는, 오늘날의 '마트'와 비슷한 형태로 영업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일본인이 소유한 히라타 백화점은 소유권을 잃고 소멸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이 성립되고 히라타 백화점 건물은 1946년 2월 "서울만물전"이라는 건물로 바뀌었으나 1947년 3월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후 같은 자리에 1969년 "대연각빌딩"이 준공되었고, 다시 이름이 바뀌어 현재는 "고려대연각타워"라는 이름의 건물로 남아있다.
■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 1931-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은 1931년 박흥식이 설립한 지상 5층의 백화점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현재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의 제5대 백화점 중 하나로, 그 중 유일한 조선인 운영 백화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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