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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시간의 법칙〕끊임없는 탐구 정신 / 우장춘 박사

Paul Ahn 2020. 1. 20. 17:12

〔1만시간의 법칙〕끊임없는 탐구 정신 / 우장춘 박사


"꽃이 국민의 감성 치유할 것"…카네이션 개량 앞장선 우장춘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6050834041 

 

"꽃이 국민의 감성 치유할 것"…카네이션 개량 앞장선 우장춘

"꽃이 국민의 감성 치유할 것"…카네이션 개량 앞장선 우장춘, 국민이 뽑은 과학자 (3) '농학자' 우장춘 '씨 없는 수박' 개발은 와전 채소 자급자족 기틀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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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수박' 개발은 와전

 채소 자급자족 기틀 세워


“나는 몰라서 쉬지 못하지만, 식물이 쉬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쉬도록 하게.”

1950년대 채소와 과수 연구를 주도하던 국립중앙원예기술원(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원들은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봉급이 적어 월세도 내지 못하는 직원도 수두룩했다. 결국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술원 원장이던 우장춘 박사의 반응은 단호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우 박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한 홍영표 박사(88)는 “우 박사는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봤다”며 “연구가 힘들어 떠나는 사람은 막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막지 않는다는 게 그의 좌우명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당수 제자는 그가 무뚝뚝하지만 잔정이 많은 인물로 기억한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는 귀국길에 연구원에서 막일을 대신해주던 애주가 인부를 위해 정종 두 병을 짐 속에 꼭꼭 숨겨 넣어온 일화는 유명하다.

 

 

우 박사는 귀국 전부터 이미 ‘스타’였다. 그는 일제 치하 조선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도쿄제국대를 졸업한 뒤 농업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농림성 연구원, 교토 다키이연구농장장을 지낸 거물급 인사였다. 1950년 귀국한 뒤 줄곧 채소의 자급 자족을 위한 연구에 헌신했다.


대학 졸업 후 우 박사가 이끌던 원예시험장에서 과수 연구를 한 김종천 박사(84)는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보여준 ‘정중동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뛰어난 관찰력과 책임감을 지닌 학자였다. 그는 매일 오전 온실을 돌아다니며 수백 종이 넘는 식물을 둘러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 후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무관이던 우범선의 아들이었다. 일부에선 우 박사가 평소 아버지의 과거 행위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아버지 일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다만 그가 일본에서 조선 청년을 위해 농업 교육을 하고 귀국 후 한국의 농업을 일으키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 박사는 한때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는 우 박사와 친분이 있는 기하라 히토시 일본 교토대 박사였다. 홍 박사는 “종자 개념을 몰랐던 농민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직접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시연하다 보니 와전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업적은 지금도 우리 식탁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배추는 이파리만 크고 맛이 없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태어난 배추 원예 1호와 원예 2호가 나오면서 병충해에 강하고 맛도 있고 속이 꽉 찬 배추를 식탁 위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양파와 고추 역시 그의 노력으로 지금의 맛을 지닐 수 있었다. 우 박사는 꽃이 언젠가 국민의 감성을 치유할 시대가 온다고 예상했다.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카네이션도 그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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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우장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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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무뢰배)에게 살해된 일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되던 날 일본 낭인에게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조선인 우범선이다. 그는 당시 별기군 대대장이었는데 황궁을 지켜야 했던 군인이 오히려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 일로 보복을 두려워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 조선인 자객에게 그는 피살된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은 그의 아들은 고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농림성에 취직을 한다. 그러나 창씨 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반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도키이 종묘 회사의 농장장으로 직장을 옮긴다.

 

해방 뒤 일본에서 채소나 과일의 종자를 수입했던 우리나라는 우범선의 아들이 육종학(종자개발) 전문가임을 알고 그의 귀국을 추진한다. 그는 처자식 및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귀국해 한국농업과학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 뒤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개발해 한국 농업의 근대화에 커다란 공을 세운다. 정부에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종자 개발에만 헌신했다. 농업 근대화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는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다. 父子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아이러니하지만 본분을 알고 취사선택 처신의 훌륭함은 존경할만하다.

 

2016.09.09.

-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