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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 낙원상가 4층

Paul Ahn 2019. 9. 3. 08:31

■ 낙원상가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70701033539179001

 

실버극장서 ‘靑春을 리메이크하다.

 

-실버영화관의 낭만

 

2017년 7월 5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낙원동 낙원상가 4층. 넓은 홀 안 왼쪽 ‘실버영화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출입구에서 60대쯤으로 보이는 커플이 팔짱을 끼고 걸어 나왔다. 밀짚 페도라로 멋을 낸 남성과 황금색 블라우스 차림의 중년 여성. 이들은 실버영화관에서 상영된 외화 ‘내 심혼의 음악’(1940)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영화 속 남녀 주인공 토니 마틴과 리타 헤이워드처럼 감동의 여운을 간직한 채 미소 지었다.

 

 

▲황석(오른쪽)·양명순 부부가 서울 종로구 낙원동 낙원상가 4층 실버영화관 앞의 녹지대에서 꽃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 두 사람은 황혼에 접어든 나이지만 영화와 신앙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통해 재혼에 성공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황석(75)·양명순(72) 부부는 5년 전 ‘한몸’이 됐다. 오래전 배우자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던 두 사람은 고심 끝에 용기를 내 경기 용인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뭔가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라고 여겼던 60대,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영화라는 공통점과 신앙이라는 연결고리였다.

황 씨는 2005년 은퇴하기 전까지 건축업에 종사했다. 6070세대가 그러하듯 그도 평생 일에 쫓기며 변변한 취미생활 하나 갖지 못했다. 그러나 사업을 정리하고 배우자마저 떠나보낸 후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때 그를 구원해준 게 영화와 신앙이었다. 

 

황 씨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는 종로 거리를 다니다가 2009년 옛 허리우드 극장에 새로 문을 연 실버영화관을 알게 됐고, 이후로 8년간 꾸준히 극장을 다녔다. 영화관은 외로운 노년에 안성맞춤인 친구이자 양 씨와의 교제에 더없이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는 “노년 세대에게 영화는 비교적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드나들며 시간을 보냈고, 데이트도 했다”고 말했다.

 

양씨 역시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젊어서는 연극을 한 적도 있다. 1996년 은퇴하기 전까지 생명보험 회사에서 근무했기에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황 씨를 처음 만난 곳은 동네 교회였지만 황 씨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영화관 데이트였다.

 

양씨는 “노년에 재결합하는 것에 대해 민망하기도 하고 자식들에게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결국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에 황혼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 영화, 신앙, 산책 등 남편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점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결합은 올해 초 일본 NHK 방송에 특집 프로그램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3.5%에 이른 한국의 고령화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은 은퇴 후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가는 커플로 등장했다.

 

실버영화관에서 나란히 영화를 관람하고 종로 3가 인근의 노인들을 위한 카페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귀가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도 한국의 노년층 문화소비 생활에 주목했다.

 

양 씨는 “요즘 60∼70대에 오히려 졸혼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데 나는 결합을 권유하고 싶다. 아플 때나 외로울 때 서로 큰 의지가 된다”며 “행복한 노년을 위해선 노력해야 할 것이 많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노후에 대한 설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씨는 “실버영화관은 추억의 외화를 많이 편성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자주 찾는다”며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이용 등에서 다소 아쉬운 점도 있으나 이런 시설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낙원상가 4층에는 현재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2개 관이 운영되고 있다. 낭만극장은 실버영화관의 흥행에 힘입어 지난해 추가로 문을 연 극장이다. 모두 고용노동부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 기업이다.

 

 

▲낭만극장과 실버영화관을 홍보하는 포스터.

입장 요금 2000원이면 1950∼1960년대 할리우드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김선규 기자 


각 극장 300석씩 모두 600석으로 운영된다. 극장별로 일주일에 약 2편씩 총 4편의 영화가 새로 올라온다. 

55세 이상 기본 관람료는 2000원. 일요일에만 운영되는 특별 예술공연은 5000원이다.

 

실버영화관을 맡고 있는 김은주 대표는 “영화 마케팅과 서대문 화양극장 재개봉관 운영 등의 일을 하면서 어르신을 위한 실버영화관을 생각해냈다”면서 “최근엔 영화 관람 외에도 어르신들이 음료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 음악·미술·메이크업 등 다양한 취미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주변에 만들어가고 있다. 여전히 적자지만 어르신들의 격려에 힘을 내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낙원상가 인근엔 노년층의 ‘아지트’가 제법 많다.

 

옆 건물 1층에 있는 ‘추억 더하기’는 저렴한 음식점 겸 카페다. 잔치국수 등 대부분 메뉴가 3000원을 넘지 않는다. DJ가 있어서 차를 마시면서 노래를 신청할 수도 있다.

 

40년간 DJ 활동을 해왔다는 장민욱(64) 씨는 “이곳에서 일한 지는 7년쯤 됐다. 2만5000장의 LP와 1만5000장의 CD를 구비해 놓고 그때그때 신청곡을 받고 있다”며 “주로 1950∼1960년대 팝송, ‘닥터 지바고’의 ‘라라의 테마’ 등 영화음악 등이 인기다. 고객들이 신청곡을 적어내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옆에는 기타, 하모니카 등을 배우는 ‘촌티 서울’이라는 음악 교실도 있다. 이날도 약 20명의 중년 남녀가 모여 열심히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경기 남양주 별내에서 왔다는 김우진(75) 씨는 “은퇴 후 시간이 여유로운 반면, 보람 있게 쓰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는데 실버영화관 같은 곳은 그런 은퇴자들에게 훌륭한 쉼터가 된다.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만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이곳으로 와 2000∼3000원짜리 국밥을 먹고 운현궁 앞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운동도 한다. 한 달에 1만 원밖에 안 드니 얼마나 좋은가”라며 “최근엔 남는 시간을 이용해 70여 년 평생 처음으로 수채화도 배우고 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삼성동에서 온 60대 남성 유 씨도 “아직도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영화도 보고 점심도 먹을 수 있는 이곳을 가끔 찾는다”며 “특히 집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오가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혼자 살고 있지만 아직 외로운 줄 모른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운영되는 실버영화관은 약 6개다.

 

낙원상가의 2개 관을 비롯해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홀에 마련된 청춘극장, 내곡동의 명작극장, 경기 안산의 명화극장, 충남 천안의 낭만극장 등이다. 통합된 홈페이지가 있어서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극장별 영화 상영 스케줄을 검색할 수 있다.

 

제기동에 거주 중인 곽지문(82) 씨는 “술, 담배를 끊은 지 오래됐다. 부인과 사별한지도 한 10년 됐다. 그러다 보니 외롭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3∼4년 전 실버영화관을 알게 된 후 이제는 거의 영화관으로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다”며 “실버영화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상영 스케줄을 미리 확인한 후 집을 나선다. 낙원상가 지하의 2000원짜리 멸치국수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후 영화를 보고, 오후 늦게 귀가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다 몇 년 전 영구귀국했다는 유동근(78) 씨는 “남들에 비해 은퇴 후 생활에 부족한 건 없지만 이런 문화생활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라며 “서대문에 있는 청춘극장에도 자주 간다. 청춘극장에선 한국영화를, 이곳에서는 외국의 명작을 상영하고 있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2017년 07월 07일()

김인구 기자 cl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