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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설농탕 / 1981 설렁탕 전문점

Paul Ahn 2019. 3. 8. 08:22

 

신선설농탕

(shinsunseolnongtang.co.kr)

 

• 상호명 : 주식회사 신선에프앤비

• 본부 :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로 107

 

신선설농탕 운영사, 폐점 뒤 권고사직 논란

노조거부하면 원거리 발령, 사실상 해고” … 사측임대종료에 따른 폐업

(labortoday.co.kr)

 

2020.06.17 08:00

 

 

신선설농탕 오청 대표, 나눔 천사인 줄 알았는데갑질 논란에 휘청

(ntoday.co.kr)

 

2017.07.27 16:09

 

 

(주)KOOD 신선설농탕 오억근 회장 & 오청 대표

신뢰와 열정으로 끓여내는 설렁탕 父子

 

최근 외식업계에도 부모님의 대를 이어 외식업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는 젊은 2세 경영주들이 부쩍 늘었다.

 

 

 

‘내 자식은 절대로 식당일을 시키지 않겠다’던 과거와는 달리 외식업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져 요즘은 부모도 자식도 가업을 이어 외식업에 투신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다. 이에 Old & New에서는 외식업 창업주와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2세 경영주와의 세대공감 혹은 동상이몽에 대해 들여다 보았다.

 

 

하루에 한번씩 꼭 설렁탕 드시는 회장님

 

요즘도 아버님은 하루에 한번씩 이 매장, 저 매장에 들러 설렁탕을 드세요. 그리고 맛에 대해 바로 바로 체크해 공장장에게 개선할 것을 지시하십니다

 

오억근 회장은 하루에 한번씩 꼭 설렁탕을 먹고 맛을 체크해 즉시 수정하도록 지시하는 등 맛에 대해서만은 철두철미하다. 기업의 경쟁력이 제품이듯 음식점의 경쟁력은 맛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설렁탕에 관한한 오억근 대표는 맛에서부터 설비까지 발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뜨거운 불에 직접 닿는 뚝배기가 하도 많이 깨지자 스테인리스 재질로 바꿨는데, 보온성이 문제였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이중 스테인리스 탕그릇. 또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테이블에 김치통을 장착, 고객이 직접 꺼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 오청 대표는 오억근 회장을 맥가이버 같은 분이라고 표현한다.

 

 

손수레를 끌더라도 자립을 하라

 

신선설농탕이 오늘날 이렇게 외식기업으로 거듭난 것은 순전히 아들 덕이야. 나야 뒤로 물러나 맛이나 볼뿐이고 경영은 온전히 아들이 알아서 하니까

 

오청 대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손수레를 끌더라도 자립을 하라’는 말이었다.

 

비록 부모님이 일궈 놓은 기본 토양에서 시작해 어려움은 덜했지만, 그는 가업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원죄가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사람과는 달리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내 꿈을 펼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그 또한 외식업에 첫 발을 딛을 때 부모님과는 다르게 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는 현명했다. 부모님의 창업자로서의 자부심과 장인정신을 인정하고 시작한 것. 그렇게 하고 나니 아버님의 말씀이 잔소리가 아니라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보약이 되었다.

 

 

‘맛’은 고수하고 조직은 ‘차별화’

 

오억근 대표는 가업을 이어 기업으로 번창시킨 아들이 자랑스럽다. 아들 오청은 2개의 매장으로 시작한 신선설농탕을 (주)쿠드라는 외식기업으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시켜 놓았으니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한없이 미덥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오청 대표는 ‘맛’에 있어서는 전적이라고 할 만큼 아버님의 뜻을 존중한다. 실행하기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날 만들어서 배송시키고 소비시켜라’는 아버님이 세우신 원칙을 죽을 힘을 다해 따라가고 나니 결국 옳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은 부모님과의 차별화였다. 즉, 몸은 식당에 있어도 머리는 밖에 있겠다는 것. 더 많이 보고, 듣고 배우기 위해 중앙대학교 외식산업 경영자과정에 등록해 선배 경영주들로 부터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기도 했다.

 

오청 대표가 10년간 신선설농탕을 이끌어 오는 동안 탄탄대로만 걸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단 듯 했지만 곧 위기가 닥쳐왔다. CK공장을 만들고 조직을 확장하는 데 급급해 시스템과 조직관리에 소홀했던 것. 사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나니 나태해 지기 시작했고 대표가 나태하니 직원들도 함께 나태해졌다. 결국 조직만 확대해 놓고 투자한 만큼의 효과는커녕 비용 지출만 늘어갔고, 본사와 점포 사이에도 신의가 없어지면서 조직이 와해됨을 느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우병 파동에 이어 인사사고 등 내·외부 위기가 한꺼번에 몰아 닥쳐 그야말로 직원 급여를 걱정할 정도로 힘든 시기도 있었다. 단 하나, 아버님이 철칙으로 여겼던 ‘맛’은 갖춰져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때부터 뼈를 깎는 아픔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한 오청 대표는 30여명의 본사 직원을 현재의 12명 체제로 만들었고 전체 400여명에 가까운 직원을 300여명으로 정리했다. 자신을 비롯해 직원 모두 1인 2역을 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이러한 위기관리를 통해 조직관리 마인드와 리더십이 생겨났고, 일한 만큼 얻는다는 것과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못할 자신감이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다.

 

오억근 회장은 그런 위기를 이겨내고, 300여명의 직원들이 회사에 긍지를 갖고 활기차게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온 아들이 더없이 든든했다. 또 그런 조직을 만드느라 고생했을 아들의 수고가 느껴져 더욱 고맙다.

 

 

스스로 연예인이 돼 직원들에게 기쁨을 주는 대표

 

오청 대표는 ‘일하기 좋은 직장 만들기’등 감성경영을 추구한다. 사실 감성경영의 시초는 구조조정 후 갈갈이 찢어진 직원들의 마음을 한 데로 뭉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 경영에 있어서 화두는 사람이며, 사람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예전에는 브랜드, 음식이 성공요인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사람이 성공을 일군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직원만족 감성경영 실천을 위해 올해만 직원들과 10번의 산행을 했고, 5번의 워크샵, 16회의 사내교육을 통해 연인원 약 700여명을 직원들을 만났으며 행사 후 소감을 일일이 피드백 한 후 개선에 개선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구축했다.

 

사실 그는 직원들에게 연예인으로 통한다. 그 가운데는 튀는 외모도 한 몫을 한다. 예전에 그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변신이 새삼스러워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변신을 한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 회사 경영을 맡은 후 매장을 순회하면서 이곳저곳 살펴보고 주방에 들어가 보기도하고 하는데 대부분 직원들의 반응이 ‘누군데 함부로 주방엘 들어가나’ 하는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내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차별화 한 것이 바로 직원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컨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 직원들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며 매장에 연예인이 왔다고 즐거워한단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조직으로 운영

 

배우지 못한 무학의 한을 뒤늦게 불태우며 한국사고도연구원을 설립,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오억근 회장은 아들이 사업보다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학문적인 뜻을 이어 받아 함께 동참해 주길 원한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을 둬도 괜찮지만 앎, 즉 지식은 누구도 대신 습득해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오청 대표의 꿈은 다채로운 한국 음식과 문화를 접목, 설렁탕뿐만 아니라 한식을 세계화 해 외국에서 오히려 벤치마킹하는 회사로 성장하고 싶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역량을 성숙시켜 세계화에 걸맞는 인재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올해는 직원들의 일본 연수 등 견문을 넓혀줄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준 덕에 나도 이곳에서 뜻을 펼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 것이 가장 큰 보람이고 수확이라고 말하는 오청 대표. 무엇보다 내실을 중요하게 여기며 따뜻하면서도 강한 조직을 만들어 가는 그의 경영철학이 빛나 보이는 대목이다.

 

오청 대표는 스스로를 삼국지의 유비에 비유한다. 다른 사람의 재능과 지식,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완전히 그의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주위에는 제갈공명 같은 인재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치밀함과 인재를 중용할 줄 아는 지혜를 겸비한 오너로 자리매김한 오청 대표지만 아직까지도 점퍼차림으로 소탈하게 생활하시는 아버지 앞에 서면 오히려 작아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인터뷰 내내 아버지의 말을 경청하며 옷매무새, 손엣가시 등을 세심히 살펴주는 오청 대표.

 

창업주의 강한 의지와 열정, 성실함과 부지런함, 이를 바탕으로 조직과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가는 부자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신뢰와 존경이라는 버팀목을 세운 것이 오늘의 신선설농탕을 일궈온 토양과 자양분이었다.

 

 

Father’s Story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젊은 시절, 실제로는 자동차 쪽 일이 하고 싶었으나 호구지책으로 중국집에 취직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되었다는 신선설농탕의 창업주 오억근 회장. 그의 외식업계 입문기와 인생역전 또한 한편의 드라마다.

 

임시정거장 삼아 중국집 종업원으로 취업한 후, 31살에 독립해 보광동에 중국집을 연 오억근 회장. 처음 문을 연 이곳에선 장사가 무척 잘 돼 개업 6개월 만에 빌린 돈을 갚고 돌아오는 길에 산허리에 뜬 보름달을 보고 기쁨의 포효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며 회상에 잠겼다.

 

그러나 1년 만에 집주인이 본인이 직접 하겠다며 가게를 비워 달라고 요구했고 할 수 없이 한남동으로 장소를 옮겨 개업한 이후 45세까지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잠원동에 설렁탕 점포를 냈다. 주방 할머니가 개인 사정으로 며칠 주방을 비우면서 요샛말로 레시피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설렁탕을 안쳐놓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솥단지 안의 재료는 흐물거리고, 국물은 졸아들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손님상에 내놓기는 했는데 오히려 손님의 반응은 너무 맛있다는 것이었다.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 이렇게 실수한 설렁탕 맛을 기초로 조금씩 개선해 오늘날의 신선설렁탕의 레시피를 확립했다.

 

 

Son’s Story

2개의 점포로 출발해 외식기업 일궈

 

중·고등학교 때부터 일손이 부족할 때는 항상 부모님을 도와 일손을 보태곤 했다는 오청 대표. 그 때 당시 그는 식당 일만은 하지말자고 다짐했었다. 항상 가게를 운영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매출에 일희일비하는 팍팍한 부모님의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 전공으로 금속공학과를 택한 것도, 졸업 후 아버님이 신촌점을 맡아 운영할 것을 권했으나 내 길을 가겠노라며 컴퓨터 관련업계에 취업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첫 직장은 그의 무한한 창의력을 표현하기에는 조직이 유연하지 못했다. 결국 잠깐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태어나면서부터 부대끼며 자랐던 외식업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30세. 아버지 오억근 회장보다 1년 빠른 승부수였다.

 

처음 잠원동 본점의 점장으로 출발, 직접 주방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직원들에게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 후 잠원동의 허름한 본점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 운영방식인 아웃소싱을 도입하고, 1996년부터는 카페식으로 분위기를 탈바꿈하는 등 일대 변혁에 돌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도곡점을 오픈한 오청 대표. 외식업계 입문 10년 만에 2개의 점포에서 출발해 현재 26개의 점포와 CK공장, 3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외식기업 대표로 거듭났다.

 

 

오억근 회장의 철칙

 

- 전문화. 빠른 회전을 위해 다른 메뉴를 팔지 말고, 고객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

- 맛은 정직하다. 당일 소비 원칙, 그날 만들어서 배송시키고 소비시켜라.

- 하루도 쉬지 말아라.

 

 

오청대표의 Want

 

- 고객의 니즈, 트렌드는 변한다. 기본 컨셉에 어긋나지 않는 신메뉴도 필요하다.

-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해냈고, 해내고 보니 아버님의 원칙이 옳다.

- 현장은 24시간 363일 가동, 추석과 설날은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