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상(徽商)
명청(明淸)시기 안후이성(安徽省) 휘주부(徽州府) 지역에 적을 둔 상인(商人) 혹은 상인집단의 총칭으로 신안상인(新安商人)이라고도 하며 속칭 휘방(徽?)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휘주부(徽州府)는 안휘의 서현, 슈닝현, 우위안현, 치먼현, 이현, 지시현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휘상(徽商)은 동진(東晋) 시기에 태동되어 당송(唐宋) 대에 성장하였고 명대(明代)에 전성하였으며 청말(淸末)에 쇠퇴하였다.
휘상(徽商)은 모두 빈한한 산지 지역 출신으로 농업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조건하에서 상업에 전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소질을 갖추었고 또한 인적자본을 축적하며 경영활동에 한층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공 과정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전국에 퍼져 있었으며 취급하는 물품이 소금, 면포(棉布), 양식(粮食), 차(茶), 문구필묵(文具?墨) 등이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근검절약하며 소자본 경영을 위주로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부츨 축적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의 공익을 위한 사업과 자선활동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휘상은 돈을 버는 것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겨 청 건륭에서 가경제에 이르는 70여 년간 265명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당시의 진상(晋商)자제는 단지 22명에 불과하였다.
안후이성·저장성 휘파건축
남자들의 금고金庫, 여자들의 금고禁錮
http://www.k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783
중국에서는 상인집단을 상방(商邦)이라고 하는데, 가장 융성했던 상방으로 진상(晉商), 조상(潮商), 휘상(徽商)을 꼽는다.
휘상은 안후이성 남부 후이저우(徽州)의 상인들인데, 옛날의 후이저우는 지금의 황산시와 그 인근이다.
이들은 장사를 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하고(賈而好儒), 장사로 돈을 벌고 유학으로 이름을 높인다(賈爲厚利, 儒爲名高)는 말과 같이 유학의 기풍이 아주 짙게 배어 있었다. 중국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바로 이곳 사람이다.
후이저우가 유학과 장사로만 유명한 것은 아니다.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박학(朴學)과 각서(刻書)도 유명하고, 특산물로 붓, 먹, 벼루, 종이 등 문방사우가 손꼽히는 것 역시 후이저우의 유교적 기풍과 밀접하다. 의학에서의 신안의학(新安醫學)도 그렇고, 후이저우의 요리 휘채(徽菜)는 중국 8대 요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후이저우의 전통건축을 휘파건축이라 한다.
휘파건축은 장쑤성 동북부에서 안후이성과 저장성, 그리고 푸젠성 북부에 이르기까지 창강 하구 강남 지역의 민가건축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한다. 한국인들이 황산을 다녀오면서 근처의 훙춘(宏村)이나 황산 시내의 라오제(老街)를 들러 오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보는 전통주택들이 휘파건축이다. 좁은 골목 또는 상점 거리 양쪽으로 백색의 벽이 높고, 지붕에는 까만 기와를 얹었으며, 그 위에 비녀를 여러 개 꽂은 것 같은 집들이다.
휘파건축에서는 살림집뿐 아니라 사당과 패방(牌坊)도 유명한데, 이 셋을 일컬어 휘파 삼절(三絶)이라 한다.
패방은 패루라고도 하는데, 마을을 나서는 길의 출발점이고 멀리서부터 내방객의 시선을 끌어 인도하는 대문과 표지의 기능도 갖고 있다. 간단하게는 두 개의 기둥 위에 도리를 얹고 마을 이름을 써넣으면 한 칸짜리 패방이다. 기둥을 네 개를 세우면 세 칸짜리가, 여섯 개를 세우면 다섯 칸짜리가 된다. 높이에서도 1층, 2층, 3층 모양을 내기도 한다. 멋을 내기 위해 두공과 작체를 설치하거나 기와를 얹기도 한다.
패방은 우리나라의 열녀문과 같이 기념비 성격으로도 진화했다. 주민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로에 누군가의 공적을 새긴 패방을 세워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마을 전체에 스며들게끔 하는 것이다. 후이저우에는 이런 패방이 다른 지방에 비해 상당히 많다.
황산시 서현(歙县)의 휘주고성 안에 있는 허국석방(許國石坊, 사진 1)이 대표적이다. 휘주고성에서 서쪽 6km 거리에 있는 탕웨촌의 패방군(棠樾牌坊群) 역시 패방군으로 중국에서 제일로 쳐준다(사진 2). 허국석방은 허국이란 개인의 공적을 기리는 패방이다. 이와는 달리 일곱 개가 줄지어 세워진 탕웨촌의 패방군은 포(鮑)씨 가문의 충효절의를 기리는 것들이다. 포씨 마을 입구에 명대의 패방 세 개와 청대의 패방 네 개가 차례대로 세워져 있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돌을 재단하여 깎은 다음 못이나 리벳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맞물려서 세운 것이다. 세운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석공술이 꽤 뛰어났던 것 같다.
패방 일곱 개 하나하나마다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공덕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이 지역에 유교적 기풍이 얼마나 깊숙하게 배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패방인 포찬효자방(鮑燦孝子坊)은 포찬의 효도를 기리는 것이다.
포찬은 명대 가정(嘉靖)연간에 살았던 사람으로 책을 많이 읽어 학식은 높았으나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과거에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모친의 두 다리에 심각한 종기가 생겨 수년간 고생을 했으나 포찬이 혈농을 입으로 빨아내기를 계속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쳤고, 자손들을 잘 교육시켜 증손자 포상현이 훗날 공부상서(工部上書)까지 올랐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두 번째 패방 자효리방(慈孝里坊)은 송말의 포여암, 포수손 두 부자를 기념한 것이다.
원대 말기 이 지역 반란군에게 부자가 함께 포로로 잡혔다. 반군이 둘 가운데 하나를 죽일 것이니 누가 죽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윽박지르자 부자가 서로 죽음을 마다치 않다가 이를 참지 못한 반군들에게 둘 다 죽임을 당했다. 훗날 명나라 영락제가 이들을 기려 패방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줄지어 늘어선 패방은 모두 유교적 가치를 고양하는 것들이다. 이 마을에는 사당 역시 잘 보존되어 있다. 돈본당(敦本堂)이라고 하는 사당이 있는데, 그 옆에 포씨 집안의 부인들을 기리는 청의당(清懿堂)이 따로 있다는 게 특이하다. 전자를 남사(男祠)라 하고, 후자를 여사(女祠)라 한다. 여자를 위한 사당은 중국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여사도 있고 일곱 개의 패방 가운데 두 개가 부녀자였으니 유교적 기풍이 아무리 강했다고 해도 여자가 상당한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누군가의 수절과 희생을 찬양한다는 것은 나머지 여성들에게 이를 따르라는 강력한 압박이다. 정호와 정이를 거쳐 주희에 이르러 성리학은 이미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굳어져서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면 좁은 2층 구석방에서 거의 갇힌 채로 살아야 했다. 외출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나이가 들어 50세를 넘어서야 겨우 자유로운 외출이 허용되었던 삶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장삿길을 떠나 몇 개월 혹은 몇 년씩 집을 비우면 한눈 한번 팔 겨를 없이 시부모 봉양과 자식 양육에만 집중해야 했다. 집을 비운 채 장기간 출타를 하기 때문에 이들 부녀자를 얽어 매는 데 유교적 도덕규율이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집성촌 자연부락으로서 종중이 마을의 자치권을 갖고 있던 당시에 종법에서는 부녀자의 희생을 고상한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신체에서는 전족(纏足)으로 여성들의 활동성을 잡아맸고, 건축에서는 좁디좁은 구석의 규방(閨房)에 여자들을 가두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휘파건축을 설명할 때, 남자에게는 금고(金庫)지만 여자들에게는 금고(禁錮)였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휘파건축의 살림집은 외지에서 돈을 벌어 오는 남자들에게는 돈을 채워 넣는 돈통이지만, 여자들에게는 감옥살이였던 것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패방군을 보면서 그것이 세워진 뒷면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효와 절의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왔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유적은 아름답고 위대한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탕웨촌 마을을 걷다 보면 낡은 담벼락(96쪽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산뜻한 회칠 이었겠지만, 색이 바래면 덧칠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탓에 온전한 것은 없다. 찰과상에 딱지가 앉고, 딱지조차 다시 긁히고, 긁힌 상처 위에 또 딱지가 앉으면서 굳은살이 담벼락을 다 덮은 듯하다. 이제는 굳은살마저 군데군데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과거의 상처를 층층이 드러내 보여주는 게 아마도 세월의 풍화작용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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