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오일쇼크와 해외건설 1973년, 1978년
■ 1973년 1차, 1978년 2차 오일쇼크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4051669871
제1차 오일쇼크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아랍의 석유수출국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에 대한 석유 선적을 중단했다. 이런 석유수출 금지는 아랍에 비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서유럽국가와 일본에까지 확대됐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까지 치솟았고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제1차 오일쇼크였다.
제2차 오일쇼크
1978년 12월 26일부터 79년 3월 5일까지 이란의 석유수출정지에 기인한 석유수급의 긴박, 가격상승, 세계경제의 혼란을 가리킨다.
이란의 석유 수출정지는 유전 노동자가 팔레비왕정 타도를 외치면서 파업에 돌입한 것을 계기로 이 결과 우선 원유의 현물가격이 폭등, 계속해서 장기계약에 기초한 원유가격도 급상승, 30달러 원유(1배럴당) 시대의 개막을 고했다.
■ 해외건설의 과거, 현재, 미래
http://www.koit.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318
우리 건설산업은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해외시장에 첫 진출하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토목 공종이 전체 해외건설의 3분의 2를 차지하였으며 저비용 단순 시공인력을 투입하는 도로 및 건축공사 중심으로 해외공사를 수행하였다.
이 당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자금원 역할을 담당하였다.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로 인하여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중동 산유국으로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면서 중동 지역의 인프라 수요가 폭증하였다.
우리 경제가 위기에 직면한 시기에 우리 기업들은 불굴의 의지와 도전으로 100억불대 수주라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해외건설 강국으로 등장함으로써 오일 쇼크로 인한 충격 흡수는 물론,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해외건설을 전략산업으로 인식하여 지원책을 강화함에 따라 1975년 12월에 해외건설촉진법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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