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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혼바시 도큐백화점 / 336년 역사 마감

Paul Ahn 2020. 7. 31. 11:00

니혼바시 도큐백화점 / 336년 역사 마감

 

 

니혼바시 도큐백화점, 336년 역사 마감

(chosun.com)

 

에도 시대 포목점으로 출발불황·젊은층 외면에 끝내 쓰러져.

 

"고객이란 참 잔혹하군요."

매장 안을 북새통처럼 가득 메운 인파를 보고 도큐백화점 니혼바시점의 한 직원은 이렇게 되뇌었다. "그동안 그렇게 오질 않더니…. 망했다니까 그제서야 시체를 뜯어먹으려고 몰려 들다니요." 그의 착잡한 표정은 "고객은 하이에나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다. 폐점을 위한 재고 떨이 바겐세일이 막바지 열기를 띠던 날이었다.

 

그 며칠 뒤인 1 31일 니혼바시 도큐백화점은 336년의 역사를 접고 문을 닫았다. 도큐의 폐점 소식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본 언론에서도 꽤 크게 다뤄졌는데, 그것은 단순히 니혼바시 도큐가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긴 명문 백화점이란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니혼바시 도큐의 몰락은 도쿄상권의 판도 변화, 소비자 심리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일본유통업계의 일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니혼바시 도큐백화점의 역사는 '메트로폴리탄 도쿄'의 발전사와 역사를 같이한다. 에도시대 초기인 1662, 에도(도쿄의 옛 지명)의 중심가 니혼바시에 도큐백화점의 전신인 시로키야라는 상점이 문을 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바쿠후를 세우고 에도정권을 연 50여년 뒤의 일이었다.

 

시로키야는 비단 등의 옷감을 주종목으로 하는 포목점이자 일종의 잡화 백화점이었다. 비슷한 시기 시로키야 옆에는 미쓰코시백화점 본점의 전신인 에쓰고야가 들어서 두 노포간의 '300년 전쟁'이 시작됐다. 시로키야와 에쓰고야를 중심으로 하는 니혼바시 일대는 포목점과 화복을 비롯한 각종 상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본 최대의 상점가로 번창을 거듭했다.

 

시로키야가 일본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32년 발생했던 화재사건 때문이었다. 메이지·다이쇼시대를 거치며 일본 최대급의 근대식백화점으로 성장해 있던 시로키야는 쇼와시대 초기에 전기 합선으로 발생한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불타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 중엔 특히 매장에서 일하던 여점원이 많았는데, 당시 기모노속에 속옷을 입지 않았던 여점원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길 주저하다 불길에 휩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선 여성들이 속옷을 입자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일본근대사 연구가들은 "시로키야의 대화재가 없었다면 일본 여성의 속옷 착용이 10년은 늦어졌을 것" 이라고 말한다.

 

시로키야백화점은 1958년 도큐전철에 매각돼 도큐백화점 니혼바시점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철도운송·유통업의 명문 기업인 도큐그룹 계열사로 들어온 도큐 니혼바시는 전후 일본경제의 고속 성장과 함께 급격한 성장을 거듭했으며, 니혼바시 지역은 백화점과 대형 상점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일본 최대의 상가지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니혼바시 상권의 지배자는 역시 도큐 니혼바시와 미쓰코시 본점, 그리고 다카시마야 니혼바시의 3대 백화점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진행돼 오던 도큐·미쓰코시간 상권 전쟁은 창업지가 오사카인 다카시마야가 1920년대 니혼바시에 진출, 뒤늦게 뛰어들면서 3자간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니혼바시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세 명문 백화점의 경쟁은 일본사회가 윤택해지는 것과 비례해 갈수록 치열해져 갔다.

 

80년대말까지 니혼바시 상권과 세 백화점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버블(거품)경기가 꺼지고 불황이 찾아오면서 상황은 단숨에 바뀌어버렸다. 소비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 백화점 업계였고, 니혼바시 지역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니혼바시의 상권을 이끌어오던 세 백화점도 판매 부진과 매출 감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우선 소비자가 물건을 살 때 가격을 꼼꼼히 따져보는 소비패턴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백화점은 매력을 상실했다. 백화점은 속속 등장하는 가격파괴점이나 교외형 슈퍼마켓, 전문할인점 등에 고객을 빼앗겨갔고,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그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을 살수 있다는 백화점의 매력도 연간 1600만명의 일본인이 해외여행을 하는 시대에선 별로 먹혀 들지 않게 됐다.

 

도쿄 상권의 중심이 니혼바시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도 뚜렷해졌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쇼핑나간다고 하면 니혼바시에 간다는 뜻으로 통했고, 지금도 50대 이상의 중·고령층들은 니혼바시의 물건이 최고라는 인식이 머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의 '니혼바시 이탈'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니혼바시가 젊은 층에게 외면당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니혼바시의 약한오락 기능이 지적된다. 에도시대 이후 수백년간 상점의 거리로 발전해온 니혼바시 지역은 다른 도심지에 비해 영화관이나 음식점, 술집 같은 위락·문화시설이 적다. 전통적인 일본 소비자의 쇼핑 스타일은 니혼바시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사고 소바(메밀국수)나 초밥 한 접시 먹은 뒤 귀가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쇼핑 그 자체보다 재미와 오락을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중·고령층과 확연한 차이를 이룬다. 젊은 소비자들은 물건만 사려고 시내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 한편 보거나 친구들과 만나 놀다가 내친 김에 백화점에 들러 쇼핑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젊은 세대 취향에는 상점만 줄지어 선 니혼바시는 삭막하기만 하다. 긴자나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같은 곳에 가면 놀기도 좋고 필요한 물건도 다 있다. 이들은 도큐백화점의 300년 역사에 크게 감동받지도 않고, 고급품의 상징인 미쓰코시나 다카시마야백화점의 포장지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도쿄 상권은 현재 동쪽의 구상권(니혼바시·긴자)에서 서쪽의 신상권(신주쿠·시부야·이케부쿠로)으로 이동중이라고 한다.

 

니혼바시의 3대 백화점 중 건물과 매장 규모가 가장 작은 도큐의 타격이 특히 컸다. 도큐 니혼바시점의 매출은 91년의 565억엔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 작년엔 370억으로 줄어들었다. 7년 사이에 매출이 65%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었다.

 

결국 판매난을 견디다 못해 도큐백화점은 니혼바시점을 없애고 건물을 팔아치우기로 결정했다. 작년 9월 폐점 발표 때 도큐측은 건물과 땅값으로 700억엔은 받아야겠다고 밝혔으나 원매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있다. 잘해도 400억엔 이상은 받기 힘들 것이라고 부동산 업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도큐 니혼바시는 폐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폐점에 앞서 1월 한달 동안 실시한 재고처분 세일에는 근래 보기 힘들던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세일 첫날인 지난 1 2일엔 107000명의 고객이 몰려 74000만엔( 74억원)어치의 물건이 팔렸다. 도큐백화점 개점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이날 백화점 문이 열리기도 전에 새벽부터 1만명이 몰려들어 기다리는 행렬이 1.5㎞나 늘어섰다.

 

한달 가량의 세일기간 중 액세서리는 예년보다 57, 와이셔츠는 32, 미술품은 34배 더 많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하루 평균 20명씩의 미아가 생기고, 계산대 앞에서 1시간씩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도큐백화점 홍보실 고구시차장은 "최고급 백화점의 고급품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자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고객의 구매심리가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도큐 니혼바시와 '300년 전쟁'을 치뤄왔던 미쓰코시 본점 측은 도큐의 폐점에 착잡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하며 "그렇다고 니혼바시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강조했다. 미쓰코시는 니혼바시 상권의 재건을 위해서라면 또 다른 라이벌인 다카시마야백화점과의 '적과의 동침'도 서슴치 않겠다는 자세이다. 합동 이벤트 개최 등을 통해 떠나가는 고객을 되돌아오게 만들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1999.02.03. 15:20

도쿄=박정훈 특파원·jh-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