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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양복점(鍾路洋服店) / 1916, 서울미래유산

Paul Ahn 2021. 7. 20. 10:49

★종로양복점(鍾路洋服店) / 100년 넘은 노포

종로양복점 (bellstreet.co.kr)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2 78 을지비즈센터 618 

•창업 : 1916년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

 

 

대표 : 이경주 kyung@bellstreet.co.kr

상담 / 주문전화: 02-733-6216(주야)

 

▲ 종로양복점 창업자 故 이두용

 

 1916년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문을 연 종로양복점 모습.

 

 

"오래된 집보다 양복 잘 만드는 집으로 기억됐으면"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05/2016100501257.html?pmletter

 

'종로양복점'은 1916년 개업한 이래로 올해 100년을 맞았다.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종로양복점'은 한국 양복 역사 그 자체다.

 

‘신스(since) 1916’, 벌써 100년이다. 한국의 양복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종로양복점’ 이야기다. 재건축과 재개발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하늘을 향해 30~40층씩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는 현대식 빌딩들. 그리고 그 아래로 족히 40~50년은 됐을 법한 회색빛의 낡고 허름한 2~5층짜리 오래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을지로3가 일대.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서울 한복판 을지로3가에 올해 100년이 된 노포(老鋪), 종로양복점이 있다.

 

지난 9월 초,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근처 한 건물 6층, 23㎡(약 7평)짜리 작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종로양복점을 찾았다. 자그마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3대째 종로양복점을 이어오고 있는 이경주(71)씨가 “생각보다 작지요”라며 웃으면서 기자를 맞았다.

 

100년 동안 단 한 번도 ‘종로양복점’이라는 이름을 바꿔 본 적이 없는 이곳. 재미있게도 종로양복점이 현재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은 종로가 아니다.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의 바로 옆 동네인 중구 저동이다. 흔히 을지로3가로 불리는 곳이다.

 

이경주씨는 “종로양복점이 종로를 떠나 지금 자리로 옮겨온 건 2011년”이라며 “종로에 재개발 바람이 불며 양복점이 있던 종로 신문로 건물이 헐렸고, 그로 인해 5년 전 종로가 아닌 이곳에 가게를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물론 손님들의 치수를 재고 양복감을 소개하는 가게는 이곳이지만 6명의 재단사와 재봉사들이 일하는 종로양복점 공장은 여전히 종로에 있다”며 “종로양복점의 맥이 지금도 종로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종로양복점과 관련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양복점이라는 설이 있다. 종로양복점은 1916년, 이경주씨의 조부인 고 이두용씨가 종로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내며 시작됐다. 당시 한국에 양복점은 주로 일본인과 중국인이 운영했다. 그런 틈새를 비집고 한국인 이두용씨가 양복점을 열며 한국 양복사의 또 다른 전환점을 찍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일 양복 전쟁

 

1894년 세워진 당시 한국 땅에서 꽤 유명한 양복점이 있었다. 오쿠다양복점이다. 이두용씨는 오쿠다양복점을 통해 처음으로 양복을 만나게 됐다. 가난한 한국 청년 이두용이 이곳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양복기술을 익힌 것이다. 청년 이두용은 자신의 손으로 지어내는 양복이 좋았다. 결국 양복기술을 더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1912년 도쿄양복상공학교를 졸업하고 2년을 더 일본에 머무르다 191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2년쯤을 평양의 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6년, 그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 드디어 종로 보신각 인근 한 가게를 빌려 자신의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을 열었다. 이것이 노포 종로양복점의 시작이다.

 

이경주씨는 할아버지 이두용씨가 종로에 양복점을 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희 집안이 종로 토박이입니다. 누구보다 종로가 편하고 좋았을 겁니다. 또 하나, 그때도 지금처럼 종로가 장사하는 사람들의 중심이었어요. 당시 일본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던 중심지에서 뭔가 이뤄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종로에 양복점을 연 이유였을 겁니다.”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문을 연 종로양복점은 문을 열자마자 기존 양복점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특히 양복 형태를 띤 당시 학생들 교복을 두고 일본인들과 경쟁을 벌이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경주씨가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전해 들은 당시 이야기라며 입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 교복은 양복과 비슷했어요. 그러니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양복집에서 교복을 맞춰야 했지요. 그런데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교복을 반드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에서 맞추라’고 지시한 겁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들의 말을 듣지 않은 거지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 양복점에서 맞추라고 할수록 한국 사람은 한국인이 하는 양복점에서 교복을 맞춰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던 거지요. 그런 생각을 가진 한국 학생들이 종로양복점으로 몰려들었지요.”

 

1930~1940년대 교복 한·일전(戰)을 통해 종로양복점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940년대 서울 종로는 물론 함경남도 함흥에까지 분점을 내며 직원만 100명이 넘을 만큼 번창했었다.

 

그런 종로양복점을 물려받은 것이 이두용씨의 4남 고 이해주씨다.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상과(현재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을 만큼 그 시대의 엘리트였던 이해주씨.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은행 취업이 결정된 상태, 이두용씨가 아들 이해주씨에게 “네가 가업을 이어줄 수 있겠느냐”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에 이해주씨는 망설임 없이 은행 취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바로 중국 만주에 있는 조지아백화점의 한 양복집으로 양복기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

 

양복기술도 배우고 종로양복점의 만주 분점까지 꿈꾸며 만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1942년 종로양복점 창업주 이두용씨가 고인이 되며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945년 광복과 함께 이해주씨가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이어 종로양복점 경영을 시작했다.

 

 

◇"손님이 좋아하는 양복이 좋은 양복"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잠시 종로를 떠나 피란을 갔던 경북 경산에서 종로양복점을 임시로 열며 그 명맥을 잇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다시 종로로 돌아와 종로양복점을 재정비했다. 그렇게 전쟁과 가난이 한국 사회를 괴롭혔던 1950년대를 지나 ‘맞춤 양복의 전성기’라 불리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종로양복점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정치인과 배우는 물론, 멋 좀 아는 이들이면 종로양복점에서 양복 한 벌쯤은 맞췄을 만큼 장사가 잘되던 시대를 누리기도 했다. 종로양복점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이경주씨 역시 이 같은 양복 전성기이던 1969년 양복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47년 동안 양복을 만들고 있다.

 

이경주씨는 “원래 양복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며 웃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군 제대 후 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아버지가 아프셔서 가게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때 제가 아버지 대신 하루 동안 가게를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우연히 하루를 맡아 해본 양복점 일이 나쁘지 않았어요. 치수를 재고, 손님을 맞고 하는 일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경주씨는 “아버지 대신 종로양복점을 맡아 하루 동안 일을 했던 당시가 종로양복점이 50년을 조금 넘겼던 때였다”며 “내 손으로 이 가게를 이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1969년부터 이경주씨는 아버지 이해주씨 밑에서 재단과 봉재는 물론, 양복점 경영까지 꼼꼼하게 배웠다. 이경주씨에게 종로양복점 2대 주인 아버지 이해주씨는 양복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라고 했다. 양복을 향한 이해주씨의 열정과 철저함은 종로양복점이 100년을 이어지게 한 힘 중 하나였음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늘 ‘손님이 좋아하는 양복이 좋은 양복’이라고 하셨지요. ‘손님 마음에 안 드는 옷은 옷이 아니다’란 게 아버지 생각이었습니다. 늘 손님이 우선이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주인이 없으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얘기하셨죠. 아주 잠깐이라도 손님이 찾아왔을 때 주인이 없거나, 문이 잠겨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결국 제가 종로양복점을 지키느라 여동생 결혼식에도 못 갔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11년을 아버지에게서 양복기술과 양복점 경영을 배운 이경주씨. 1980년 드디어 어버지로부터 종로양복점의 열쇠를 넘겨받았다. 그는 그때를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곳간 열쇠를 넘겨주셨다”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올해, 종로양복점이 100년이 됐다.

 

 

◇위기를 이겨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었고, 가난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 맞춤양복의 전성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풍요로움이 시작된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이어온 종로양복점.

 

그 사이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김두한씨 등 유명 정치인 단골들이 찾았던 양복이자, 또 유명 배우를 비롯한 서울 멋쟁이들이 한 벌쯤 맞춰 입었던 종로양복점. 그런 종로양복점도 생존을 고민했던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이경주씨는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 전쟁 때도 종로양복점은 위기였다”고 했다. 1960년대 말 종로 일대에서 벌어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손님들의 접근을 막아 가게가 고사할 뻔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 불어닥친 대기업들이 만든 기성복 파도에 맞춤양복이 설 자리를 잃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도심 재개발 바람이 불며 2001년 종로 보신각 근처 종로양복점이 시작됐던 건물을 비워야 하기도 했다. 또 2011년에도 역시 종로 주변 재개발 바람에 10년을 정착했던 종로구 신문로의 두 번째 종로양복점도 비워줘야 했다. 그런 풍파를 견디고 종로양복점이 100년을 이어온 것이다.

 

이경주씨는 ‘종로양복점의 다음 세대를 누가 이어줄 수 있을지’가 요즘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라고 했다. 이씨는 “화가인 아들이 종로양복점의 다음 주인이 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아들이 아직까지 종로양복점을 이어받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1969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 역시 종로양복점의 가치를 알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성복에 밀려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던 맞춤양복 수요가 2010년대 들어서며 독창적이고 자기 것에 대한 욕구가 큰 젊은이들 위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게 이경주씨의 설명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가게를 나가려는 기자에게 이경주씨가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양복집이기보다 양복 잘 만드는 집’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2016.10.24

조동진 주간조선 기자 

 

 

종로양복점

(seoul.go.kr)

 

19세기 말 개화기에 들어서며 우리 사회는 교육에서부터 교통, 통신,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서양 문물을 수용하게 됐다.

 

그 가운데에서도 의식주의 변화는 삶과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른 적응을 요구했다.

상류사회부터 입기 시작한 서양 의복은 1895년 공식적인 의복제도로 인정받으면서 1900년대 초 최초의 조선인 양복점을 등장시켰다.

 

이후 기성복이 대세를 이루는 20세기 말까지 맞춤양복은 전성기를 누리며 역사의 한쪽을 장식했다.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함께한 양복점이 바로종로양복점이다.

 

과거 기성양복이 없던 시절, 정장이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와 함께 맞추러 가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양복은 날개라는 말을 하듯 고객들에게 꼭 맞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맞춤양복에만 평생 공을 쏟아 온 재봉사가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이경주 대표다.

 

원래 종로양복점은 보신각종 근처에 있었다. 조부였던 창업주 이두용 씨가 일본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1916년에 세운 것이다. 가게의 이름도, 상징도 모두 근처에 있는 보신각종의 종을 모토로 했다.

 

 

당시에는 양복에 대한 수요가 부족해 주로 교복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개성과 함흥에 분점을 내고 한때 종업원 수가 2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조부는 양복 만드는 솜씨만큼 뛰어난 마케팅 감각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 온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을 비롯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면서 정치가로 잘 알려진 김두한 등 장안의 많은 유명 인사가 이곳에서 양복을 맞추었다고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2대째 가게를 이어받은 부친 이해주 씨 역시 한국 양복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 공로로 1994년에는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3대째 이경주 대표가 종로양복점을 이어받았다. 그의 양복점 시기는 곡절도, 변화도 많았다.

 

시위가 많아 최루탄 가스가 거리를 메울 때는 양복점 문을 닫고 피신도 했고, 때로는 가게 안으로 도망 온 학생들을 뒷문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위협적인 것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잠식해 온 대기업 기성양복의 공격이었다.

 

맞춤양복의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고, 주변에 있던 양복점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현실을 말해주듯 종로양복점도 창업했던 자리를 떠나 광화문 주변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을지로로 이사를 왔다. 곧 창업 100주년을 맞는 종로양복점은 그 어느 가게보다도 묵직하게 서울을 말해주는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가게 스케치를 마치고, 건물을 나와 을지로 거리에 섰다. 도로는 차들로 정체를 이루고, 많은 이들은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바쁘게 오간다. 난 그들 뒤로 올려다보이는 커다란 건물의 많은 창들 사이에서종로양복점이란 글자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창틀에 걸어 놓은 양복은 분주한 을지로 거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시간을 어루만지는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일 년에 경조사가 있는 날에만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양복을 꺼내 입는 그림쟁이에게 맞춤양복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학교를 졸업할 10여 년 뒤에는 함께 양복을 맞추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도 더 된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울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가장 잘맞는 근사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