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지도가 바뀐다.
강원서 사과 풍년, 인천선 귤까지…
인천광역시 계양구 선주지동에 있는 한 비닐하우스 농장. 이곳에선 현재 귤나무 320그루가 자라고 있다. 김주철 신선한농원 대표는 2019년부터 기르기 시작한 귤나무에서 작년 말 처음으로 샛노란 귤을 수확했다. 수확량은 2㎏짜리 1000상자가량. 나무가 더 영그는 올해 말에는 최고 5000상자 정도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 귀농 10년 차인 김 대표는 "지구온난화에 빨리 적응하는 것만이 농업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해 귤 재배를 시도했다"며 "소비자들이 제주산보다 신선한 귤을 맛볼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수확한 귤은 제주 토종 밀감을 직접 개량한 만감류다. 제주에서는 한라봉이라고 하지만 김 대표는 지역명을 따서 '계양봉'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귤 수확 체험농장으로 운영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수도권에서도 직접 귤 따기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 기후변화가 바꾸는 농업 생산 지도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가 한국의 농업 생산 지도를 바꾸고 있다. 노지 재배가 아니라 비닐하우스이긴 하지만 인천에서 귤을 재배하는 건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만큼 겨울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난방비가 좀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귤 농장으로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방증이다.
귤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일 중 하나다. 연간 생산량이 63만t으로 국내 과일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2019년 기준). 지금까지는 제주도와 남부지방 극히 일부에서만 귤을 재배했지만, 인천에서 귤 재배에 성공했다는 건 이제 전국 어디서든 귤 재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귤 재배지 확대의 원인은 당연히 기후변화다. 기후변화는 온실가스 효과로 지구 기온이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지난 100년간 지구 평균기온이 0.74도 상승했고, 이런 기온상승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2100년께 지구 평균기온은 지금보다 4.7도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반도는 세계 평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은 약 1.7도 상승해 세계 평균의 2배를 훌쩍 넘었다. 21세기 말에는 5.7도 이상 상승해 한반도 강수량이 2000년 대비 20%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는 아열대기후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 강원도에서 급증하고 있는 사과 생산량
연간 생산량 2위 과일인 사과(53만5000t)도 마찬가지다. 이제 '대구 능금'이라는 건 옛말이 되고 있다. 여전히 대구·경북 지역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사과 재배 지역이 점차 북상하면서 요즘은 강원도가 새로운 사과 생산지로 각광받고 있다.
사과는 생육기 평균기온이 15~18도 수준인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호냉성 작물이다 보니 강원도가 '재배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강원도는 해발이 높고 연평균 기온이 낮은 데다 일교차가 크다 보니 사과의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해 식감이 좋고 보관성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남한 최북단으로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양구군 펀치볼 지역이 유명 사과 산지로 급부상하고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 2016년부터 사과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철호 애플카인드 대표는 작년 12월 '2021 대한민국 과일 산업대전'에서 사과 부문 최우수상(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김 대표는 "사과는 여름철 열대야 현상을 겪으면 물러지는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며 "펀치볼 지역은 열대야가 없고, 일교차가 큰 데다 바람이 잘 불어 사과 맛도 좋고 병충해도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사과 재배면적은 2011년 321㏊에서 작년 말 기준 1579㏊로 10년 새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생산량은 같은 기간 1027t에서 2만3503t으로 무려 23배 증가했다.
농촌진흥청이 기후변화를 감안해 2020년대부터 2090년대까지 주요 과일의 재배지가 어떻게 변동될 것인지를 예측한 결과에서도 사과를 잘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과거 30년(1981~2010년) 평균을 기준으로는 사과 재배에 적합한 지역, 즉 재배적지가 전 국토의 41%에 달했지만 2020년대에는 15.6%로 줄어드는 데 이어 2030년대 11.5%, 2040년대는 6.4%, 2050년대 4.6%, 2060년대 2.4%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2070년대에는 재배적지가 전 국토의 0.8%까지 급감할 전망이어서 강원도 산간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사과를 재배할 곳이 사실상 사라질 전망이다.
◆ 배와 포도 등 다른 주요 과일도 마찬가지
사과보다는 덜하지만 배와 포도의 운명도 비슷하다. 농촌진흥청 분석에 따르면 과거 30년간 배 재배적지는 전 국토의 57.5%에 달했지만 2040년대 38.6%, 2060년대 19.5%에 이어 2070년대 7.5%로 줄어들 전망이다. 한국산 과일 가운데 가장 수출 경쟁력이 높은 것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배마저 21세기 말에는 국내에서 재배 가능한 곳이 강원도 일부 지역만 남게 될 것이라는 전망인 셈이다.
포도는 과거 30년 평균으로 재배적지가 전 국토의 46.8%에 달했지만 2050년대 8.8%로 줄어들고, 2090년대에는 1.2%까지 쪼그라들 전망이다. 역시 21세기 말에는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만 포도 재배가 가능하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재배적지의 변화는 농가들 입장에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다. 농업은 기본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경북에서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사과 재배적지가 북상함에 따라 터전을 옮겨 농사를 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원래 농사를 짓던 곳에서 버티는 것도 쉽지 않다.
김동환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장은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과일나무의 꽃이 일찍 피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꽃이 핀 뒤에는 추위가 오지 않아야 열매가 잘 맺히는데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봄에 냉해가 닥치면서 꽃이 제대로 피지 않아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재배적지 북상과 함께 기존 재배지가 기후변화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과일의 국내 생산이 앞으로는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재배적지가 줄어들면 똑같은 과일이라도 이전처럼 맛있는 과일을 생산하기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높다. 문경환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 농업연구관은 "나중에는 사과와 배, 포도 같은 선호 과일을 수입해 먹어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기상이변 따른 수급 불안·토양 유실 문제
기후변화가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재배적지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지구온난화만이 아니라 잦은 기상이변을 초래한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집중 호우와 태풍으로 농지가 침수되고, 폭염이나 가뭄으로 농작물 생산량이 급감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상추나 배추 등 채소의 경우 매년 기상이변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가격 폭등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작년 맥도날드에서 양상추가 빠진 햄버거가 팔렸던 이유도 기상이변 때문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10월에는 강원도에서 양상추가 나와야 하는데 가을장마가 겹치면서 일조량 부족으로 양상추 농사를 망친 것이 공급 부족과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그 전년도에 토마토가 사상 최장의 여름 장마 여파로 작황이 부진해지면서 수급난을 겪었던 것도 기후변화 탓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토양 유실과 새로운 병해충 등장에 따른 피해도 심각하다. 강수량 증가나 가뭄 등의 기상이변은 작물이 자라는 표층 토양을 유실시킨다. 이는 지력을 악화시켜 농업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최근 들어 고랭지 배추나 무 생산이 예전만 못한 것은 경사지의 토양이 유실된 여파가 크다는 분석이다.
또한 겨울철 기온 상승은 그동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병해충 발생의 원인이 되고 있다. 외래종 잡초가 유입된 뒤 기온 상승을 틈타 대량 번식하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농산물만이 아니라 축산 분야에서도 기후변화의 피해가 나타난다. 가축의 면역력 약화와 전염병 출현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상고온이 닥칠 경우 소는 스트레스로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농가들 입장에서는 축사 기온을 낮추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돼지의 경우도 고온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발정기가 지연되고 배란이 줄어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 아열대 과일 재배 등 대응책 마련
기후변화로 인한 재배적지 변화로 기존 과수 농가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사이 다른 쪽에서는 아열대 작물 재배를 시도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농진청은 우리나라 전체 아열대 작목 재배 농가는 약 1400호(2020년 2월 기준)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재배면적은 310㏊, 생산량은 5700t 정도로 아직은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과일 중에서는 망고와 파파야, 용과 등이 눈에 띄는 재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망고는 재배면적과 농가 수가 2018년 42.4㏊, 97곳에서 2020년 62.0㏊, 159곳으로 늘었다. 파파야는 같은 기간 3.5㏊, 18농가에서 15.1㏊, 42농가로, 용과는 3.8㏊, 19농가에서 6.4㏊, 25농가로 늘었다. 이 밖에 여주와 강황, 삼채 등 아열대 채소 재배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김동환 소장은 "국내에서 재배되는 아열대 과일과 채소는 아무래도 수입산에 비해 비싼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비자들이 고품질의 신선 농산물에 대한 선호도가 커지고 있는 데다 각 지자체에서 신소득 작목 발굴과 육성을 위한 지원책을 잇달아 도입하면서 아열대 작물 재배가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식량작물인 벼는 기온 상승 영향으로 발육 속도가 빨라지면서 생육기간이 단축되는 이점을 누릴 수 있을 전망이다. 벼를 수확한 뒤 다른 작물을 추가로 재배하는 방식의 이모작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매일경제 & mk.co.kr,
2022.02.06 16:35:56
정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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