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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거랑(馳馬渠蒗) 마을

Paul Ahn 2022. 3. 24. 19:12

치마거랑(馳馬渠) 마을

 

박근혜 대통령님 사저

 

•위치 : 대구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649-2

 

 

쌍계동(雙溪洞)의 자연부락

(daum.net)

 

본래 현풍군 동부면 지역으로서 인근에 산재한 삼국시대의 유물들로 추정해보면 마을의 형성이 삼국시대 이전이라고 본다.

 

쌍계1(雙溪一里)는 현풍소재지에서 유가사에서 내려오는 큰 내(龜川)와 초곡(草谷)에서 내려오는 두천()이 합류하는 마을이 치마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동으로는 여랫들을 사이에 두고 현풍면 상2리와 접해있고 북으로는 상1리와 접하고 있다.

 

쌍계2(雙溪二里)는 현풍군의 동쪽에 있는 면소재지라하여 동부라 하며 과녀성(寡女城)의 서쪽능성을 따라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한편 고양내는 장구 만댕이 산기슭에 남쪽을 향해 자리한 마을로, 여랫들을 끼고 초곡천이 흐른다.

서쪽은 쌍계1리와 접하고 북쪽은 산능성을 따라 쌍계1리의 중간골에 닿아있. 1914년 지역 개편에 따라 동부, 쌍계, 여개동(余介洞)을 병합하여 쌍계동이라 하였으며, 1952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쌍계1,2동이 되었다. 1988 53일자로 달성군(達城郡) ()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 제 1134에 의거하여 동()이 리()가 되었다.

 

고양내(高陽內)

고양내는 쌍계2리의 자연 부락이다. 이 마을은 중강골 위에 있는 장구만댕이 기슭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동부(東部)마을의 뒤에있는 와우산(牛山)으로인해 오전 한나절이 되어야 마을에 햇빛이 든다. 해가 높이 솟아야 햇빛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고양(高陽)’ 혹은고양내(高陽內)’라 한 것이다.

(제보자: 쌍계리 273번지, 오종수. 채록일자 2008.08.09)

 

동부(東部)

동부는 쌍계2리의 자연 부락이다. 본래 현풍군(玄風郡) 동부면(東部面)의 소재지(所在地)로서 현풍군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동부(東部)라고 하였다. (제보자: 쌍계리 273번지, 오종수. 채록일자 2008.08.09)

 

치마거랑(馳馬渠). 여개리(余介里). 쌍계동(雙溪洞)

치마거랑은 쌍계1리의 자연 부락이다. 치마거랑(馳馬渠), ‘여개리(余介)’, ‘쌍계동(雙溪洞)’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형세가 말이 달리는 형상을하고 있어 치마산(馳馬山)이라 하며, 치마산 아래 도랑이 있어 치마거랑이라고 한

. 치마(馳馬)능승의 꼬리 부분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양리(陽里)와 초곡리(草谷里)에서 흘러 오는 두 시내가 합류(合流)한다고 하여 쌍계동(雙溪洞)라고 하며, 이 이름을 딴 쌍계사(雙溪寺)라는 절도 동네에 있었다. 조선조 현풍현(玄風縣)에 속해 있을 때는 동으로는 여랫들이 있고 남으로는 한들이 있어 여랫들의()’와 한들의 크다는 의미의()’을 합쳐 여개리(余介里)라 불렀다. (제보자: 쌍계리 273번지, 오종수. 채록일자 2008.08.09)

 

 

450년 내력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치마거랑 마을'을 아십니까?

(yeongnam.com)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과 현풍읍 경계에 '쌍계리' 혹은 '치마거랑'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정확한 마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도동서원 전신인 쌍계서원이 1568년 이 마을에 처음 창건되었으니 그로부터 계산해도 450년 내력을 지닌 마을이다.

 

지난 1998 5 20일 풍영대 복원 고유제를 마치고 당산등에 모인 대구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 주민들의 모습.

(사진출처 쌍계마을지) 

 

2010년을 전후해 이 마을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마을 북쪽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남쪽에 달성테크노폴리스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 이때부터 쌍계리는 지역사회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쌍계리 주민은 세상이 이렇게 바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1990년대 후반부터 마을 역사를 정리하고, 마을에 산재한 유적을 대상으로 정화사업을 시작했다. 마을주민이 주축이 된 이 사업에는 달성군과 달성문화원장을 지낸 향토사학자 고 채수목 선생 등이 참여했다.

 

구천과 초곡천 두 물줄기가 합류해 쌍계리, 달리는 말(치마)과 도랑(거랑)을 합쳐 치마거랑이라 했다는 마을유래비와 도랑가에 방치되어 있던 순찰사 김명진 선정비를 마을 입구에 옮겨 세웠다. 초곡천 바위절벽, 풍영대 바위글씨 앞에도 표지석을 세웠다. 풍영대는 1634년 당시 현풍현감 김세렴이 지역 선비들과 시 모임을 열었던 장소로, 현재 풍영대 바위에는 김세렴을 비롯한 13인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달성 도동서원도 본래 이곳 쌍계리에 있었다. 초곡천변 쌍계서원이 그것인데,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된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세운 것이 도동서원이다. 쌍계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도 표지석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 때 쌍계리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잘랐던 마을 뒷산 장군만댕이와 당산등 사이 치마혈도 복원했다. 또 마을 수호신인 당산나무를 모시고 동제를 지내는 당산등도 새롭게 조성했다. 이 외에도 옛 금화사, 정자 조한정, 너럭바위 영귀암, 정월대보름 달불놀이 터 등도 찾아내 표지석을 세웠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0년에는 554쪽 분량 '쌍계마을지'도 펴냈다. 마을 역사, 자연, 전설, 민속, 민요, 유적, 인물 등 쌍계리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이 총 망라됐다. 20여 년 전 쌍계마을 역사정리와 정화사업을 주도했던 주민 상당수는 이제 고인이 됐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손때가 묻은 마을지와 표지석 등은 지금껏 살아남아 과거 화려했던 쌍계리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2021-01-20

글·사진=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雙溪里 馳馬渠 洞祭(Village Tutelary Festival in Chimageorang-Maeul)

(grandculture.net)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쌍계리 치마거랑마을 동제는 매년 정월 보름과 시월 보름에 마을 뒤편 구릉에 조성된 당산에서 마을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치마거랑마을은 말이 달리는 형국인 치마(馳馬)와 냇가의 방언인 거랑이 합친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쌍계리 치마거랑마을 동제는 일제 강점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전승하기 어려운 상황을 거치면서도 엄격한 금기와 절차에 준하여 지내 왔다. 그러다가 유가읍 일대에 대규모 택지 개발 사업이 전개되는 등 급격한 도시화의 영향으로 예전보다 많이 간소화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치마거랑마을의 신당은 마을 북쪽에 인접한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당산등이라 부르는 이 구릉의 정상에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동제를 지내는 당목이다. 한때 개인 소유였던 당산등 일대를 1993년에 동회에서 매입하여 주변을 정리하였다. 제단을 조성하면서 당산등에 오르는 돌계단을 쌓았는데, 당시 마을의 가구 수 만큼 47계단을 놓았다고 한다.

 

치마거랑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에 대내림을 통해 제관을 선정해 왔다. 세 명의 헌관과 한 명의 축관을 포함해서 모두 4명의 제관을 선정했다. 선정된 제관은 금기를 수행하였으며, 제사 당일에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천왕대를 가지고 당산등에서 제를 지냈다. 제당으로 옮겨간 천왕대 주변에서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울리며 천왕 내림을 소원한 뒤에 헌관이 잔을 치고 축관이 독축하는 순서로 제를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마을 회관에서 음복을 겸한 대동회를 개최하였으며, 종일 지신밟기를 하였다.

 

현재 쌍계리 치마거랑마을 동제는 많이 간소화되어 지내고 있다. 우선 각종 금기를 수행하는데 따른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금기를 수행하는 기간을 보름에서 삼일로, 제관도 네 명에서 한 명으로 각각 줄였다. 제관 선정 방식은 대내림이 아닌 이장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산돼지를 직접 잡아 사용하던 제수 장만도 삶은 돼지고기를 구입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2007년부터는 제사를 지내는 시간도 자정 무렵에서 보름날 오전 10시로 변경하여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14년부터는 풍물을 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천왕대를 옮길 때에도 별다른 의식을 행하지 않고 있다. 남성들만 참여하던 이전과는 달리 여성들의 동제 참여 기회가 늘어난 것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