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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Super Market) 이야기

Paul Ahn 2005. 1. 19. 00:11

⊙슈퍼마켓(supermarket )

 http://cafe.daum.net/UtongMD/2tno/86?docid=Xu9z|2tno|86|20040516014843&q=%BD%B4%C6%DB%B8%B6%C4%CF%20%BF%AA%BB%E7

 

 ◇슈퍼마켓 변천사
 

우리나라에 수퍼마켓이 들어온 것은 1968년. 이후 197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수퍼마켓도 성장을 거듭, 시장규모로 보면 98년 3조6천억원에서 2000년 5조4천억원으로 커졌다. 그러나 작금수퍼마켓이 처한 상황은 과거 소매물류-골목상권 대표주자로서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초라하게 변해 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수퍼마켓은 급변하고 있다. 물류와 유통분야의 혁명적인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햇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는 것은 자아성찰의 의미도 있지만 제2의 도약을 위한 준비운동이기도 하다. 지금 수퍼마켓은 과거 명성을 되찾기 위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제2의 수퍼마켓 전성시대,소매물류의 혁명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도 있는 것이다. 이에 수퍼마켓이 걸어온 여정과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한국수퍼마켓 역사의 산증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식으로 들어본다.

 

수퍼마켓은 누가 뭐래도 소매유통의 꽃이다.

사람이 몰리는 시장이나 동네 입구, 오가는 사람이 많은 도로변이면 어김없이 수퍼마켓은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식료품에서부터 잡화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 빼곡이 쌓여있다. 어떤 곳을 보기에도 좋게 그리고 멋있게, 그러나 어떤 곳은 그냥 대충, 먼지도 뽀앟게 내려 앉아 있는채로 그렇게.

 

초창기 수퍼마켓은 지역주민들의 삶과 꿈, 그리고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평소에 사고 싶었던 물건을 살 수도 있고, 돈 벌어 사고 싶는 물건도 있었다. 그래서 더러는 삶의 애착을 갖고 더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삶의 의지를 북돋워 주기도 했다. 이렇듯 지역주민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 해 온 수퍼마켓. 이 수퍼마켓은 언제,어느 나라에서 처음 생겼을까.

 

 

 세계 대공항이 산파역

 

수퍼마켓을 처음으로 연 사람은 마이클 컬렌(Michel Kullen)이라는 사람이었다.

1930년 미국 뉴옥의 자마이카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컬렌은 자기가 가진 돈과 주변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을 합쳐 창고를 개조한 건물에 온갖 상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지구상 최초의 가격파괴자(Price Wrecker)"라고 간판을 해 달았다. 수퍼마켓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1930년대 당시의 세계대공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살펴 보면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되었다.  대공황은 가장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엇으며, 여차는 39년까지 이어졌다.

 

이 공황은 파급범위나 지속기간, 격심한 점 등에서 그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고 두그러져 대공황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변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 과잉생산으로 실업자가 우굴거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0월의 주가대폭락은 미국 사회 전반에 연쇄적으로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과잉생산된 상품이 팔리지 않아 창고마다 쌓여 있어 공장은 조업단축이나 조업중단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근로자의 수입감소 혹은 실업자 양산으로로 이어졌다.

 

수입감소와 실업자 양산은 곧 구매력 감소로 이어졌고 더불어 공장은 상품이 팔리지 않아 조업단축이나 공장폐쇄로 이러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발생된 당시 미국의 실업자 수는 전체 근로자의 30%에 해당하는 1,500만명을 웃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마이클 컬렌이라는 사람은 모험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어 공장에 찾아갔다.

모든 공장은 팔리지 않은 상품으로 그득그득 쌓여있어 걱정이 태산같던 실정이었다.

 

이러한 때에 현금뭉치를 들고 와 상품을 대량으로 사가겠다는 컬렌의 등장은 공장 입장에서는 대환영일 수밖에 없었다.
도산위기에 처해 있던 공장은 컬렌에게 도매업자에게 주는 가격보다 훨씬 싸게 상품을 주었다. 마이클 컬렌은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위주로 물건을 사왔다.

 

당시 사람들은 대공황으로 수입이 줄어 식료품이나 생활필수품 외에는 다른 물건은 살 수가 없었다. 

 

 

◇자동차산업도 일조

 

"킹 컬렌" 이름의 이 수퍼마켓은 2,000㎡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반매장의 넓이 250㎡에 비해 무려 8배나 넓은 것이었다.  컬렌은 당시 일반매장의 판매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판매해 사람을 끌어 모았다. 우선 물건가격을 파격적으로 싸게 팔았다(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구상 최초의 가격파괴자란 말 상기).

 

이는 컬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대량매입으로 싸게 구입한 물건이므로 일반매장보다 가격이 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셀프서비스와 개방진열, 가격표시제를 도입했다. 물건을 싸게 팔자니 인건비가 적게 드는 셀프서비스를 해야 했고, 셀프서비스를 하려면 개방진열과 가격표시제는 당연히 해야 했다.

 

이같은 이유로 컬렌의 매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발달은 컬렌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미국은 1910년대부터 포드자동차 회사가 대량으로 자동차를 생산한 데다 기름없이 저렴하여 모든 가정에 자동차가 있었다.

 

컬렌의 매장은 도심이 아닌 외곽에 있었지만 주부들은 자동차를 이용하여 보다 싼 가격에 생활필수품이나 식료품을 사러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매장이 외곽에 있어 자주 나올 수는 없었지만 자동차를 이용하여 나온 관계로 한번 매장에 오면 일정기간 동안 먹을 식료품을 사야 해 소비규모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 매장을 수퍼마켓(supermarket)이라 불렀다.
도심에 있는 일반매장 규모의 8배나 되다보니 대형매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영문자로 표기할 때는 하나의 단어처럼 붙여써야 한다. 수퍼(super)와 마켓(market)을 띄어쓰거나, 하이펀(-)으로 연결하거나, 대문자로 표기해서는 안된다.)

 

 

◇대량매입과 대량매출

 

여기서 마이클 컬렌의 수퍼마켓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이유를 분석해 보면 이렇다.

 

첫째는 식료품을 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통구조는 식료품과 비식료품으로 구본되는데 그가 식료품을 취급한 것이 성공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당시 미국 뿐만이 아닌 전세계의 경제공황으로 수입감소와 실업자의 급증으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소비자들이 식료품 위주로 소비를 하도록 그 시대상황이 강요한 셈이다.

 

둘째는 대량매입과 대량판매였다.
 마이클 컬렌 역시 대량매입과 대량판매를 통하지 않았다면 그같은 성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량매입이 상품의 원가를 낮출 수 있는 첫째 요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언급했듯이 당시 미국은 자동차 산업이 매우 발달돼있어 이동거리가 문제되지 않았다. 따라서 굳이 인근 매장에서 구입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조금 멀리 나가더라도 싸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아니 그것이 더 경제적인 것이었다.

 

넷째는 비용절감을 위해 오픈진열과 셀프서비스를 시행했다는 점이다.
셀프서비스를 위해서는 오픈진열과 가격표시제가 수반되어 인건비가 절감됐다. 나아가 신속한 계산을 위해 전자계산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다섯째는 체인화했다는 점이다.
 수퍼마켓은 대량매입을 하므로 독자적으로는 할 수 없다. 1953년 당시 킹컬렌 스토아는 15개였으나 1941년에는 무려 8,000개로 늘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곧 세계2차대전이 일어났다. 전쟁 중엔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법. 덩달아 수퍼마켓도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53년, 미국의 수퍼마켓이 일본에 들어오게 되었다.
기노꾸니아라는 이름의 수퍼마켓이 일본에서 문을 열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일본은 이 기간중 2차대전패전국으로서의 처참했던 경제상황이 극적으로 호전되어 전후복구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동북아 지역의 안보전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시말해 중국과 소련에 대향하기 위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여튼 전후복구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일본에 수퍼마켓이 들어오고 그들은 이를 다시 일본에 맞게 정착, 발전시켰다. 1950년대 중반이후 수퍼마켓에 대한 일본인의 인기는 대단했다. 덩달아 수퍼마켓도 늘어나 2~3년 사이에 무려 수백개가 문을 열었다.

 

 

 삼풍수퍼마켓이 국내최초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중반까지 수퍼마켓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1968년 서울 세운상가에 있던 삼풍상가 내에 삼풍수퍼마켓이 처음으로 생겼다.  지하 400여평의 규모로 문을 연 삼풍수펴마켓은 우리 나라 최초의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넉넉치 못한 국가경제 탓에 상품구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생식품은 재래시장이 장악하고 있어 풍성하게는 취급하지 못했다. 수퍼마켓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야채나 과일, 생선 등 이른바 생식품은 재래시장에서 구입하려 했고, 수퍼마켓 주인 역시 이들 식료품은 취급하려 들지 않았다.

 

유통기간이 짧고 보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상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삼풍수퍼마켓 매장 역시 절반 가량은 그릇과 주방용품이 차지했다.

 

아직도 우리 나라 수퍼마켓에서는 그릇을 팔고 있는 곳이 더러 있는데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0년에는 뉴서울수퍼마켓이 생긴다.

 

지금의 서울역 뒤 염천교 부근에 생긴 뉴서울수퍼마켓은 한국마켓팅연구원에서 우리나라의 유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개설한 수퍼마켓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점테이프를 잘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뉴서울수퍼마켓은 본래 의미의 수퍼마켓과는 악간 거리가 있었다. 

 

카트나 바구니에 물건을 담아 계산대에 가면 계산은 한 곳에서 하지만 매장 안의 코너마다 주인이 따로 있었다. 이른바 절충형 수퍼마켓이었던 것이다.

 

이후 정부는 수퍼마켓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정책을 펼쳤다.  1971년 상공부는 새마을수퍼체인본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생산자와의 직거래를 장려하는 등 정책적으로 배려했다.


이에 힘있어 수퍼마켓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시골 읍내에도 새마을 수퍼체인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나라에 처음 등장한 수퍼마켓은 1964년에 세워진 "포리너(Foreigner)수퍼마켓" 할 수 있다.

 

이는 이름 그대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수퍼마켓으로 외국상품을 팔았으며 내국인은 이용할 수 없었다. 그 수퍼마켓이 "한국수퍼마켓주식회사" 였다. 말하자면 최초의 수퍼마켓이었던 것이다.    

 

 

◇수퍼마켓의 발전과 수퍼체인 발족

 

우리 나라 최초의 수퍼마켓 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수퍼체인은 사단법인으로 출발했다. 주관부서는 상공부(지금의 산업자원부. 당시 장관은 이낙선)였다.


1971년. 정부는 유통구조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특히 식료품이나 생활필수품 시장을 미국식, 선진국형 수퍼마켓 형태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부터 민간형태로는 잘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낙선 상공부 장관은 지인(知人) 강춘길(姜春吉)을 본부장으로 해서 사단법인 새마을수퍼체 본부를 구성했다. 회원사로는 한남수퍼마켓(포리너 수퍼마켓을 경영했던 곳), 보광수퍼마켓, 갈현수퍼마켓, 등 10여개 회원사가 참여했다.   이들 회원사들은 당시 식료품을 비교적 크게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모여 사단법인 구성했다. 회장에는 김응한(金應漢) 당시 한남수퍼마켓 대표가 선임되었다.

 

본부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하자 정부는 자금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참여한 회원사의 점포형태는 여러 가지였다. 대형식품점을 하던 사람, 또는 수퍼마켓을 하는 사람 등. 새마을수퍼체인의 제1호점은 서교수퍼마켓이었다.   새마을수퍼체인 사업은 정부가 나서서 지원한 까닭에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교수퍼마켓 개점식 때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와서 개점 테이프 컷팅을 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뉴스거리였다.

 

조그마한 수퍼마켓에 영부인이 와서 개점 테이프 컷팅을 했을 정도였으니 정부의 열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도 체인형태의 수퍼마켓이 생긴 것이다.    

 

 

◇새마을수퍼체인, 정부 지원 등에 업고 비약성장

 

수퍼마켓은 이론적으로는 독립점(Independent store)으로는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수퍼마켓은 특정상 대량매입과 대량매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래 체인스토아는 직영형을 말한다. 11개 이상 직영점포가 자기자본으로 직접 경영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새마을체인스토아는 직영점이 아닌 가맹점 형태였다.   그 배경에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나갈만 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도 있었다. 다시 말해 여러 사람이 모여 본부를 구성하는 형식이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협동형 체인이었다. 원래 가맹점형 체인은 임의형 체인(Voluntary chain), 협동형 체인(Retailer"s cooperatives), 프랜차이즈형 체인(Franchise chain)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새마을수퍼체인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물론 정부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단법인 형태로 발족되었다(이 같은 형태의 수퍼체인을 나는 Government sponsered chain이라고 부른다). 이는 세계초유의 일이었다.

 

새마을수퍼체인은 비록 사단법인 형태로 출범하긴 했어도 정부 의존도가 높았다.

정부는 새마을수퍼체인에 최선의 지원을 해주었다. 그중 가장 큰 도움은 제조업체와의 직거래를 터준 것이었다. 당시 유통구조상 생활필수픔 제조업체들은 모두 지방에 대리점을 두고 있었다. 대리점은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수입, 수출을 정부가 주도하고 또 관리하고 있던 시절이어서 정부의 직거래 종용을 제조업체로서는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 의존도가 높았던 새마을수퍼체인이었다. 당시 수퍼마켓의 어려움은 야채를 비롯한 생선 과일 건어물 고기 등 생식픔을 잘 취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생식품이 수퍼마켓 상품의 55%를 차지했다. 이는 수퍼마켓 경영자의 골치를 썩혔다 갖다놓지 않으면 구색이 안맞고, 갖다놓으면 금방 상해 나갔다.

 

수퍼마겟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사실 수퍼마켓에서 생식품을 취급하려면 여러 기술, 매입기술, 관리기술, 저장기술 등과 진열(저온진열, 보관기술 등)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퍼마켓은 그러한 노하우가 축적돼 있지 않았다. 지금도 수퍼마켓은 생식품 분야에서는 유독 약하다.

 

그러나 생식품 취급을 잘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한남수퍼마켓과 갈현수퍼마켓이었다. 아무튼 수퍼체인의 출현과 직거래는 유통구조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새로운 판매기법으로 변화 주도

 

이후 새마을수퍼체인은 계속 회원수가 증가했다. 그러나 한남수퍼마켓은 새마을수퍼체인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한남체인을 설립(1972)하고 직영점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다.   한남체인은 이후 직영점을 확대해 나가며 발전을 거듭하여 1973년도에는 점포수가 5개로 늘어갔다. 생식품도 본격적으로 취급하고, 공동매입과 산지직거래 등도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이 같은 한남체인의 성공은 새마을 수퍼체인의 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남체인은 서울 한남동에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외국인 손님이 많았다.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국의 외교관들도 많이 이용했다. 한남체인의 본부는 점점 커져가고 대표적인 수퍼마켓으로 발전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기도 신갈에 개인농장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농장에서는 경상도 김해에서 능력 있는 농사기술자 세 명을 초빙, 하우스재배, 스프링클러 등 선진적인 농사기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당시 이 농장은 선진농장으로 소문나 농민들의 견학코스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농장에서는 양배추, 샐러리 등 양채류를 재배했는데 한남체인이 박대통령의 개인농장과 직거래를 했다. 한남체인은 직거래를 하고 또 그간 우리농민이 잘 몰랐던 양채류를 판매하는 까닭에 외국인도 많이 이용했다. 농림부는 물론 청와대도 관심을 보였다   (박대통령 소유의 신갈농장은 이후 그 곳 영농기술자에게 기증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남체인은 여러 가지 새로운 판매기법을 선보였다. 쌀을 취급하는가 하면 육류도 팔았다. 그간 지푸라기 가마니 포장의 쌀 판매방식을 비닐포장 방식으로 바꿔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 하면 야채도 비닐로 포장해 팔았다.

 

고기는 부위별로 나누어 팔았다. 말하자면 미국식 판매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퍼마겟의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한남수퍼마켓의 매장 규모는 180평정도. 당시로선 큰 편에 속했다. 주차시설도 갖춰 차량50대 정도의 주차가 가능했다.
전국에서 수퍼마켓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견학을 왔다. 일본에서 수퍼체인을 하던 사람도 보고 놀랐다. 이렇게 잘 나가던 한남체인은 이후 사업규모를 전국적으로 늘려나가다 아쉽게도 중도에 약화되고 만다.  

 

 

 ◇정부지정 수퍼체인의 등장

 

1973년에는 석유파동으로 우리 나라는 물론 전세계의 경제가 모두 어러웠다. 배럴당 2.8달러였던 원유가는 11달러로 폭등했다.

 

우리 나라는 그렇잖아도 자원이 귀해 모든 물자와 상품이 풍부하지 못했는데 석유파동이 일어나니 전국적으로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다.   이 사재기에는 도소매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싹쓸이 해 창고에 쌓아 놓았다. 소비자들도 거들었다. 수퍼마켓 판매대는 텅텅 비었다.

 

판매대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정부는 뒤늦게 사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1974년 2월에 발표된 "물가안정 및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지시각서"였다. 이 지시각서로 새롭게 선보인 것이 "정부지정 수퍼체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정이란 허가나 인가가 아니라 정부가 지원해주는 제도였다.

 

정부는 수퍼마켓이 전국적으로 보급돼야 물가파동도 막을 수 있고 또 매점매석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정부가 수퍼마켓 체인을 지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지시각서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정부지정 수퍼체인"은 한남체인, 신세계스토아, 럭키수퍼체인, 새마을 수퍼체인(미원과 해태 공동설립), 시장연쇄(재래시장 안에 수퍼마켓을 만들어 체인으로 하려는 모임), 동아체인,(대구지역의 화성산업이 설립), 미화당수퍼(부산에서 백화점 하던 기업이 설립) 등 7개 회사였다.   정부는 새마을 수퍼체인에게 했던 것처럼 이들 지정 수퍼체인에게도 제조업체와의 직거래를 알선해 줬다. 당시 직거래는 쉽지 않았다.

 

모든 제조업체는 대리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횡포는 매우 심했다. 대리점에게 주는 가격보다 비싸게 주거나, 현금이 아니면 직거래를 하지 않는 등 수퍼마켓 체인을 차별대우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직거래를 하도록 해줬다. 수퍼마켓에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정부지정 수퍼체인으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지정 수퍼체인 입장에서 무엇보다 큰 선물은 주류 직거래였다. 사실 술은 세금의 원천으로서 매우 민감한 것이다.

 

따라서 생산과 판매, 소비 모두를 정부가 주세법에 의해 관리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정 수퍼체인이 주류직거래를 할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시설자금과 운영자금 등을 지원해 주는 등 수퍼마켓을 위한 일이라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주류직거래에 얽힌 비화 이에 힘입어 정부지정 수퍼체인은 발전, 1975년 5월 10일 사단법인 한국 수퍼체인협회로 거듭나게 된다. 초대회장에는 홍성유, 사무국장에는 이범렬 씨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사단법인체로 거듭난지 1년. 한국 수퍼체인협회는 된서리를 맞게 된다.   1976년 봄 국세청장은 특별성명을 통해 수퍼마켓의 주류직거래를 일체 금지시켰다. 문제는 주류직거래 과정에서 탈세를 했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술은 세금의 원천으로 민감한 것이었다. 그런데 수퍼마켓에서 술을 취급하니 유흥업체는 물론 식당 등 업소에서도 술을 사갔다.  자료를 남기지 않아 세금을 적게 내려는 것이었다. 업소는 주류도매상에서 술을 사야 세금이 원천징수 되고 또 자료도 남는 것인데 수퍼마켓에서 술을 사갔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주류도매상은 업소에 술을 무자료로 팔고는 수퍼마켓에서 찍어갔다.

 

마치 수퍼마켓에서 판 것처럼. 이를 "페이퍼 세일(paper sale)"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주류도매상협회의 고발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유흥업소, 식당을 비롯하여 술을 파는 업소는 주류도매상에서 술을 구매해 가야 하는데도 수퍼마켓에서 술을 사갔던 것이다.
조금 비싸긴 해도 자료가 남지 않는 수퍼마켓에서의 구매를 업소주인들은 더 선호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주류도매상이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매출이 떨어져 주류대리점 경영이 어려웠다. 그래서 국세청에 고발장이나 진정서를 계속 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국세청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국세청은 수퍼마켓의 주류직거래를 즉각 중단시키고 세무사찰을 실시했다.

 

세무사찰 결과 사실로 드러났다. 한국 수퍼체인협회는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다.
무자료 거래가 사실로 드러나긴 했으나 모든 수퍼마켓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리기로 하고 국세청에 진정서를 올렸다. 옥석구분이 안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퍼마켓에서 술을 취급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그야말로 술 한병 사기 위해 대리점이나 도매상에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소비자는 보호되어야 했다. 선량한 소비자까지 불편을 겪게 해서는 안됐다. 그래서 절충안이 제시되었다.

 

병 뚜껑이나 상표 라벨에 수퍼연쇄점용과 유흥업소용이라는 표기를 해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이 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유흥업소가 수퍼마켓에서 술을 사다가 영업하는 일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소수 사람에 의해 은밀히 이루어졌다. 한 고급술집에서는 유흥업소용 양주병에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양주를 담아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적응되기 시작했다. 이 같이 주류를 둘러싼 비리는 중소상인연쇄점도 마찬가지였다.  

 

 

◇수퍼마켓협동조합의 발족과 대형수퍼의 등장

 

정부지정 수퍼체인이 만들어질 즈음 전국 각지에서는 생필품판매점을 지정하여 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퍼체인이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담당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수퍼체인이 들어서지 않는 지역을 중심으로 생필품판매점이 들어서서 생활필수품을 팔기 시작했다.  

 

생필품판매점은 이후 체인화를 시도, 한국 생필체인 주식회사가 되었다. 한편 정부지정 수퍼체인이 결성될 즈음 영세규모의 식품점, 수퍼마켓 업주들도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도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중소상인 특별 연쇄화 기준이었다. 이를 계기로 소형식품점이나 수퍼마켓 업주들의 연쇄화 사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근대화, 현대화체인 등의 이름으로 연쇄화 사업을 추진하는 업체가 줄을 이었다. 이들 중소상인 연쇄화 업체들이 모여 세운 곳이 한국중소상인연쇄화협의회였고, 이것이 1995년 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도 80년대 중반 발족되었다. 당시 정부지정 수퍼체인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지방에 많은 수퍼마켓이 가맹점으로 가입했다.

 

그런데 본부가 가맹점을 위해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에 수퍼체인에 가입하지 않은 수퍼마켓끼리 또는 수퍼체인에서 탈퇴한 수퍼마켓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수퍼마켓협동조합들이 모인 것이 지금의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이다. (1992년)   우리 나라의 수퍼마켓 발달사를 다시 정리하면 초창기 정부지정 수퍼체인, 중소상인연쇄화사업, 수퍼마켓협동조합이 수퍼마켓을 이끌어 왔다.

 

이들은 다시 한국수퍼체인협회, 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 한국수퍼마켓협동연합회 같은 단체로 각각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로 있다.
   


 ◇"수퍼맨"은 힘들어

 

초창기 수퍼마켓의 근무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매장도 작고, 창고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창고의 후광시설도 없었다.

그 중 열악한 근무환경의 시작은 일일 근무시간이 너무 긴 것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어서 근무시간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었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오전10시부터 오후8시 등 아무리 짧아도 10시간이 넘었다. 물론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업종이라서 그런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외국에는 〈점장운영지침〉(Store manager"s Guide)이란 것이 있어 1주일에 한번은 쉬도록 했지만 우리의 실정은 그럴 순 없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연중무휴나 다름없었다. 수퍼맨은 원래 초인(超人)이란 뜻이지만 수퍼마켓 근무자들 중에는 수퍼마켓맨도 수퍼맨이 되어야 한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수퍼마켓의 일은 모두 힘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새벽장 보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수퍼마켓은 업체의 특성상 가장 좋은 상품을 확보해야 해 새벽 5시경에 물건을 매입하러 나가야 한다. 수퍼마켓의 생식품 바이어들은 새벽시장에서 보통 선취제도(경매가 이루어지기 전에 상품을 미리 확보해 놓고 가격결정은 나중에 하는 것)로 물건을 확보했다.

 

그러나 막상 사다주어도 수퍼마켓에서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상품이 신선하지 못하다, 상품 사이즈가 틀리다, 가격이 비싸다 등등의 투정어린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새벽장을 보는 바이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해당 수퍼마켓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매입한 상품 중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상품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도록 섞여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수퍼마켓의 작업 역시 힘들기 짝이 없다. 지금이야 지게차, 컨테이너, 짐수레 등이 있지만 당시는 모두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특히 수퍼마켓이 지하에 있는 경우에는 물건을 등에 지고 지하계단을 오르내리다 안전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재고조사도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 재고조사 기술이 없어 재고조사를 하려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매장 직원들의 정신적인 고통도 컸다. 당시는 과학적인 조사, 통계자료 등이 없어서 매출목표 달성으로 직원들은 시달려야 했다.

 

잘되는 수퍼마켓의 매출액을 따라잡기 위해 수퍼마켓 경영자들이 직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터무니없이 높은 매출목표를 잡아놓고 경쟁적으로 판촉행사를 벌이는 등의 방법으로 매장직원을 독려했다.

   

 

◇로스(loss)문제 역시 수퍼마켓의 큰 어려움이었다.

 

 수퍼마켓의 로스란 상품을 받을 때 실수로 적게 받거나, 직원이 납품업자와 짜고 부정행위를 하거나, 상품이 상해 버려지거나, 매장의 손님이 몰래 가져가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발생하는데, 수퍼마켓의 로스에는 무려 105가지의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리가 잘 되면 로스는 줄어들기 마련인데 초창기 수퍼마켓이 로스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리수준이 전체적으로 문제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로스를 충당하기 위해 재고조사가 가능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밤새워 재고조사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으니 재고조사가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수퍼마켓의 로스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생식품의 경우 하루만 지나면 신선도가 떨어져 제가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야채나 과일의 경우가 그 주범이었다. 수퍼마켓 매장직원의 실수로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을 수 있다.  

3천원 정도하는 상품에 2천원짜리 가격표를 붙여 놓으면 소비자들은 싹쓸이 해가고 수퍼마켓은 그만큼 로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의 가장 큰 이유는 취급품목이 너무 많고(대략1만5천여 종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셀프서비스판매라는 것이다.  더러는 매장직원을 못믿어 가족끼리 운영하는 수퍼마켓도 등장했다. 그러나 가족경영의 경우 가족노동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가계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는 전근대적인 경영으로 체계적인 경영, 관리가 매우 미흡했다.   수퍼마켓 경영이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마진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진율은 10∼15%(지금은 18%정도 되는 곳도 있지만)정도인데 이는 적은 편이었다. 근처에 구멍가게나 재래시장이 있어 소비자는 자꾸 싼 곳으로만 가고, 리어커나 차량을 이용한 상인이 수퍼마켓 주변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적정마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물건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퍼마켓은 외국의 선진경영기법을 도입해야 했다.

 

그래서 국내연수와 해외연수, 견학이 시작됐다. 해외연수와 견학은 미국보다는 일본으로 주로 갔는데 그중 특히 가쓰미스토아에 많이갔다.    

 

가쓰미스토아의 간바이시 시장은 한국(전북 군산출생)에서 자란 사람으로 친한(親韓)인사였다. 많은 수퍼마켓 경영자가 그곳에서 연수를 받았다. 또한 그후에 간사이 수퍼에도 많이 다녀 왔다.  그들은 견학에서 외국의 수퍼마켓 관리기법, 인력관리, 진열방법 등을 배우고 돌아왔다.

 

특히 진열의 경우 당시 국내에는 진열의 기준이 없어 제각각이었다. 체인을 하고 있는 수퍼마켓의 경우는 본사가 진열위치를 정해 줘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수퍼마켓에서는 눈짐작으로 대충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외국견학을 갔다온 분들이 보고 듣고 배워오기도 해서 사진을 찍어 오기도 했고 가져온 자료나 책을 보며 진열도 제법 틀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달라진 진열법 진열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수퍼마켓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는 다음의 방법이 주로 많이 쓰인다.

 

@전진입체진열

먼저 전진입체진열은 진열대의 상품을 앞으로 당겨 놓는 것이다.

쌓아놓을 수 있는 것은 쌓아놓아 앞으로 전진시켜 진열하여 상품의 전면이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비하여 평면후퇴진열은 전진입체진열과 대치되는 개념의 진열방법이다. 가시범위진열이란 방법도 있다.

 

이는 한 가지 상품군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진열하는 것이다. 가로로 혹은 세로로 진열하되 진열된 상품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도록 하는 진열방법이다.  

 

사람의 시선에서 볼 때 120도 각도 안에 상품을 모아 진열하는 것이다. 대차있는 진열이라는 것이 있다. 많이 팔리는 상품은 많이, 적게 팔리는 상품은 적게 진열하는 방법이다.

 

@페이싱(facing)

원래 페이싱(facing)이란 상품을 종렬로 진열할 경우 상품의 얼굴이 보이는 개수를 일컫는 말인데 이 페이싱 수를 많이 팔리는 상품과 적게 팔리는 상품을 똑같은 페이싱으로 진열해 놓는다면 많이 팔리는 상품은 금방 바닥나 물건을 창고에서 다시 꺼내와 보충 진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대차있는 진열방식으로 진열을 할 경우에는 그런 번거로움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그러나 막상 수퍼마켓을 경영하다 보면 제조업체에서 와 자신의 제품을 많이 진열하도록 종용하기도 하나 작업량을 줄이고 능률적으로 일을 하려면 대차있는 진열이 훨씬 경제적이다.

 

진열대를 밥상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모든 그릇의 크기를 간장 그릇과 같은 크기의 그릇을 사용한다면 밥이나 국은 식사시간 내내 다시 퍼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수퍼마켓은 대체로 곤돌라에 의한 다단식 오픈진열을 많이 한다. 곤돌라란 무개(無蓋)화차를 뜻하는데 무개화차에 물건을 쌓듯이 물건을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수퍼마켓은 셀프서비스가 기본이므로 다단식 오픈진열방식은 필연적인 진열방식이다. 이는 작업량이 많지 않고 상품을 명료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칼라스트라이프(colorstripe)진열은 색깔별로 진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붉은 색의 사과 옆에 푸른색의 과일을 진열하고 그 옆에 노란색의 과일을 놓는 진열방식이다.  

 

더미(dummy)진열이란 과일 등을 진열할 때 많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바닥에 빈 받침대 등을 놓고 그 위에 상품을 올려놓는데 그러면 통풍도 좋고 상품도 상하지 않아 자주 쓰이는 진열방법 중 하나다.  

 

 

◇진열만큼 중요한 것이 매장구성과 배치계획이다.

 

원래 수퍼마켓은 야채나 청과, 정육, 반찬 등 생식품이 주종을 이루는 업태다.
이들 품목이 리드상품, 손님을 끌어들이는 상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수퍼마켓은 처음부터 이 분야에 약했다.

 

그래서 생식품 매장은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70년대 시대상황이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어찌됐든 초기 수퍼마켓의 경영은 힘들었다. 매장직원들도 힘들어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게 수퍼마켓의 사정은 좋아지고 있었다.

 

독립점포 형태의 수퍼마켓, 체인점 형태의 수퍼마켓이 생겨나는가 하면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매출규모도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뜨고 지는 "수퍼스타들"

 

그러나 초창기 수퍼마켓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고생하던 경영진 몇분은 세상을 떠난분도 계시다.

말하자면 수퍼마켓의 별들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강춘길(초기 새마을수퍼체인 본부장 역임), 안영철(수퍼체인협회 사무국장), 서덕선(한강수퍼마켓 사장),도진영(한남체인 사장) 등 훌륭한 리더들이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들 모두가 수퍼마켓 경영이 힘들어 과로사 한 것은 아니지만 수퍼마켓 업계에서는 중요한 사람들리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튼 수퍼마켓 경영자들의 해외연수와 견학으로 수퍼마켓 관련 많은 문헌들을 들여와 번역하고, 새로 저술하여 교재로 이용되었다.   수퍼마켓이 대형화를 꾀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주도세력은 백화점이었고 그 깃발은 한양스토아와 뉴코아 백화점이었다.

 

우리 나라의 신도시의 백화점은 지하 식품부가 잘돼야 백화점이 잘되는 그런 구조였다. 도심지에서는 백화점의 지하 식품부 형태를 취했지만 주택가나 변두리 등 대도시외곽에서는 대형 수퍼마켓 형태를 취했다.

 

뉴코아나 한양, 현대 등 지하층 매장이 그같은 대형수퍼마켓 형태였다. 대구의 동아, 태백 등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하면 개별적인 대형 수퍼마켓도 등장했다. 농심가, 해태수퍼마켓, LG수퍼마켓 등 본격적인 대형 수퍼마켓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적인 수퍼마켓의 형태 체인 수퍼마켓은 기본적으로 체인스토어 형태를 띠고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독립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수퍼마켓이 많지만, 이런 경우는 체인스토어보다 가격경쟁력에서 뒤진다.
따라서 수퍼마켓을 잘 운영하고자 한다면 체인스토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체인스토어의 경우 기본적인 출점전략에 의해 매장을 오픈하게 된다. 이는 주로 본부에서 정하는 표준모델을 따르는 것이 통례. 체인스토어의 출점은 소상권인접 출점을 원칙으로 한다.

 

수퍼마켓은 띄엄띄엄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상권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지역상권체인(localchain)이라 일컫는다. 하나의 상권이 인접 상권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비자의 친숙감도 떨어지고, 배송도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관리·판촉도 어려워진다. 

 

로컬체인의 출점전략은 면(面)출점이다. 면출점은 점출점의 반대개념으로 주단식 출점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단을 깔 듯이 수퍼마켓이 깔려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개의 로컬체인이 연결되면 지방상권체인(regional chain)이 되고 이것이 다시 모이면 전국상권체인(national chain)이 형성된다.    

 

지역상권체인이나 지방상권체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물류(배송)센터가 그 상권 안에 있어야 한다.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의 경우도 지역조합은 물류(배송)센터를 중심으로 체인형채를 이루고 있어야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제주체인이라 하면 제주에 물류(배송)센터가 있어야 한다.

 

성남, 경남,전남 등도 마찬가지다. 각 지역조합을 중심으로 공동배송센터가 형성돼야 대량매입이 가능하고 가격경쟁력이 있으며, 신속한 배송체제를 갖출 수 있다.     수퍼연합회는 체인형채로 출점한 것이 아니라 지역단위로 이미 분포되어 있는 독립점들이 조합을 결성한 것으로 체인스토어의 기본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수퍼연합회 산하 38개 지역조합은 배송센터를 중심으로 지역 또는 지방상권체인을 형성해서(내셔널체인은 연합회 성격)지방상권체인이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이상적인 수퍼마켓의 형태 체인

 

수퍼마켓은 기본적으로 체인스토어 형태를 띠고 있어야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독립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수퍼마켓이 많지만, 이런 경우는 체인스토어보다 가격경쟁력에서 뒤진다.
따라서 수퍼마켓을 잘 운영하고자 한다면 체인스토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체인스토어의 경우 기본적인 출점전략에 의해 매장을 오픈하게 된다. 이는 주로 본부에서 정하는 표준모델을 따르는 것이 통례. 체인스토어의 출점은 소상권인접 출점을 원칙으로 한다.

 

수퍼마켓은 띄엄띄엄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상권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지역상권체인(localchain)이라 일컫는다. 하나의 상권이 인접 상권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비자의 친숙감도 떨어지고, 배송도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관리·판촉도 어려워진다. 로컬체인의 출점전략은 면(面)출점이다. 면출점은 점출점의 반대개념으로 주단식 출점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단을 깔 듯이 수퍼마켓이 깔려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개의 로컬체인이 연결되면 지방상권체인(regional chain)이 되고 이것이 다시 모이면 전국상권체인(national chain)이 형성된다.
지역상권체인이나 지방상권체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물류(배송)센터가 그 상권 안에 있어야 한다.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의 경우도 지역조합은 물류(배송)센터를 중심으로 체인형채를 이루고 있어야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제주체인이라 하면 제주에 물류(배송)센터가 있어야 한다. 성남, 경남,전남 등도 마찬가지다. 각 지역조합을 중심으로 공동배송센터가 형성돼야 대량매입이 가능하고 가격경쟁력이 있으며, 신속한 배송체제를 갖출 수 있다.
수퍼연합회는 체인형채로 출점한 것이 아니라 지역단위로 이미 분포되어 있는 독립점들이 조합을 결성한 것으로 체인스토어의 기본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수퍼연합회 산하 38개 지역조합은 배송센터를 중심으로 지역 또는 지방상권체인을 형성해서(내셔널체인은 연합회 성격)지방상권체인이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체인화로 비용절감 등 경쟁력 강화 물류(배송)센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상권체인이나 지방상권체인은 물류비절감, 신속배송, 가격저렴, 판촉용이 등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친숙도를 높이고 관리도 용이하다는 잇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체인스토어는 지역상권체인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다시 지방상권체인이 되고, 지방상권체인이 모여서 전국상권체인을 이룬다. 체인이 결성되면 어떤 방법으로 효율적인 운영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먼저 지역 조합에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는 조합의 지역적 안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즉, 힘있는 물류(본부)센터, 단위조함이 각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돼 있어야 경쟁력있는 체인스토어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 조합이 교육이나 광고를 할 때도 지역단위, 조합단위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좋다. 이는 사이버마케팅에도 도움이 된다.  사이버마케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이 강화되어야 한다.  

 

 

◇단순하지만 체계있는 인사조직

 

체인스토어 인사조직은 다른 조직과는 다르다. 대개 3계층주의를 택하고 있다.
맨 밑바닥에 워커(worker), 워커 위에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맨 위에 탑(top)이 있다. 다른 인사조직처럼 복잡다단한게 아니고 단순하다.   일반회사라면 상무 전무 과장 차장 부장 계장 대리 주임 등이 있겠지만, 이곳은 간단하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층이 스페셜리스트(전문요원)다.

 

워커는 진열, 계산 등 단순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파트타임으로 고용된다.   스페셜리스트는 점장, 머천다이저(MD), 바이어(상품담당), 콘트롤라(재고담당), 에듀케이터(교육담당), 판촉담당 개발담당 등 모두 전문요원들이다.

 

스페셜리스트는 다시 2가지로 분류된다.   점장, 바이어 등과 같은 관리직 전문요원을 말하는 제너럴 스페셜리스트(general specialist)와 교육, 판촉, 개발, 레이아웃 등을 담당하는 기능직 전문요원인 탤런트 스페셜리스트(talent specialist)이다.   체인스토어는 탑과 스페셜이 얼마나 잘 매장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사업성패가 정해진다.   워커는 파트타이며이므로 임시직이다. 이는 인건비를 절약하자는 차원에서 시작했다. 선진국의 경우는 워커의 70∼80%가 시간제 사원이다.

 

단순작업을 하는 워커를 고정직으로 고용하면 부대인건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간단히 가르쳐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제 사원이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 나라도 요즘엔 기혼자 캐셔를 시간제로 많이 고용하고 있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60%에 달한다. 신세계에서 운영하는 할인점 이마트의 경우도 상근직 40% 시간제 사원 60%로 시간제 사원의 비중이 높다.

 

그러나 단순작업이라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체인스토어의 워커는 수퍼바이저나 에듀케이터를 통해 업무훈련 즉,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한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트레이니(trainee)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트레이니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한 후보요원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우리 나라 수퍼마켓은 체인스토어의원리를 제대로 도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체인스토어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전문요원을 배치할만한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매장직원 모두를 상근직원으로 채용하는 사례가 빈번했었다.    

 

 

◇고용의 인식을 재고시킨 일화

 

70년대 후반인 1976년, 일본의 가쓰미스토어 간바야시 사장이 여의도에 있는 한 수퍼마켓을 방문하게 됐다.
그 수퍼마켓은 간바야시 사장이 온다고 해서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모든 직원이 정장차림으로 손님을 맞기 위해 도열해 있었다.

 

당시 그 수퍼마켓에는 8대의 계산대가 있었는데, 8명의 케서(계산원)와 8명의 색커(포장맨)가 모두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는 포장해주는 사람도 있었음).
이런 모습을 본 간바야시 사장은 “아하, 이러니 수퍼마켓에 수익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아침시간이면 고객이 거의 없어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다. 이런 경우는 보통 네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 수퍼마켓은 필요이상으로 많은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일본은 상품포장은 개인이 직접해갔기 때문에 간바야시 사장이 보기에 색커는 불필요한 인력구성이었다.   그런데, 그 수퍼마켓에는 캐셔에서 색커까지 모두 16명이 상근직 직원으로 이른 아침부터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수퍼마켓과 같은 경우는 사람이 뜸한 오전에는 한 두 명만 있다가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 모두 나와 일해야 수익창출이 가능한데, 모든 인력을 아침시간부터 나오게 해서 도열시켜 놓은 것을 간바야시 사장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가 미국 수퍼마켓을 방문했을 때 매장을 안내해 주는 수퍼바이저(전문요원 중의 한사람)에게 풀타이머(상근직)와 파트타이머의 비율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 고용비율이 2대 8이었다.

 

캐셔의 배열도 상근직인 헤드캐셔와 캐서반장이 나머지 캐셔의 근무시간대와 카운터를 지정한다. 또한 이 상근직 두명은 종일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교대로 업무를 진행하는 효율성을 보였다. 즉 인건비를 최대한 절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도 최근에는 이와 같은 추세가 늘고 있지만, 앞서 소개한 일화는 아직 인건비 개념이 약했던 시절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효율적인 인력구성이 성패좌우

 

그렇다면 캐셔의 교육은 어떻게 진행될까? 캐셔의 교육은 에듀케이터가 담당하는데, 에듀케이터는 신입 캐서를 맡아서 1주일간 교육시킨다.

 

포스 시스템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상품모형을 만들어 진열방법, 상품배치 등을 교육시켰다.   수퍼마켓은 저마진 고회전의 원리, 박리다매의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팔아야 되고 많이 팔기 위해서는 인력도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한 인력을 모두 상근으로 고용하다보면 수익면에서 흑자를 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며, 많은 체인스토어가 인력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효율적인 인력구성을 위해서는 점장 전문가 등 최소한의 전문요원만 두고 나머지는 파트타임(시간제 사원)으로 고용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이 같은 원칙에 가장 충실한 곳은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24시간 근무제여서 시간제 사원을 많이 고용한다.  초창기 여러 가지 시스템이 부족하고 근로기준법 등 근로자를 위한 법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을 당시, 실업률은 높고 인건비는 싸지자 시간제 사원을 고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 점장은 효율적인 인사관리를 해야 한다. 유능한 점장은 사람을 적재적조에 배치시키고, 작업을 할당시킨다.

 

그래서 당시 점장에겐 막노동판의 십장기질(foremanship)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적인 작업관리를 통해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수퍼마켓의 힘은 표준화에서 비롯 체인스토어에서 점포의 표준화는 매우 중요하다.

 

체인스토어는 매장규모, 대상상권의 동질성(유사성), 레이아웃(매장배치), 상품구성, 가격, 작업(서식, 행정, 사무처리 등)의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있다.

 

이처럼 체인스토어에서 표준화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표준화를 이루려면 단순화·규격화가 뒤따라야 한다.

 

표준화(Standardization), 단순화(Simplification), 규격화(Specification)는 체인스토어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체인스토어의 3S로 일컬어진다.

 

표준화는 점포를 A , B , C형 등과 같이 모델별로 분류해 놓는 것을 말한다. 모델별로 표준 모델이 정해져야 본부에서 가맹점을 관리하기 쉽고 가맹점도 어려움 없이 작업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인본부는 운영의 표준화를 위해서 운영 지침서인 매뉴얼을 만들어, 매뉴얼대로 운영한다.

매장을 표준화시키고 ,매뉴얼대로 운영하는 것은 체인 스토어의 기본이다.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체인본부에는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하다.

 

스페셜리스트는 매장의 제반 경비를 절감시키고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등 효율적이 매장 운영을 위해 매뉴얼이나 본부 방침을 잘 수행하는 전문인이다.   특히 매장 감독을 맡는 사람을 수퍼바이저(surervisor)로 부르기도 한다. 상품 진열도 본부에서 정한 매뉴얼이나 상품의 회전정도에 따라야 한다.

 

체인스토아는 상품진열, 매장 배치까지도 철저하게 지도된다. 이는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서다. 현재 수퍼 업계는 위험에 처해있다. 대형 할인점이나 대형 마트가 시장을 독식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도 수퍼업계의 시장을 잠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자 수퍼마켓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백화점, 할인점, 편의점, 대형마트 등과 경쟁력을 키워야한다.
체인본부는 대량매입을 통해 바잉파워를 키워야 한다. 또 제조 메이커에 대한 협상력(bargaing power)이나 메이커에 대한 대항력(countervailing power)을 길러야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려울 때는 힘을 모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규모의 이익(scale merit),규모의 경제성(the economy of scale)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수퍼마켓의 힘은 표준화와 조직화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퍼마켓의 나라 미국

 

지난 7월28일부터 8월 5일까지 9일간의 여정으로 기업체와 유통업체 임직원 20여명과 함께 수퍼마켓의 나라 미국에 유통연수를 다녀왔다.

 

여느 연수와 달리 이번 유통연구는 과정이나 결과가 매우 만족스럽다. 참가한 단원들의 열의도 열의려니와 보고, 듣고, 느끼며, 토론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체험적 교육과 지식의 즐거움이 여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국의 소매업, 그 중에서도 수퍼마켓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시리즈 연재 첫회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미국은 수퍼마켓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수퍼마켓의 천국이다.

 

그 이유는 수퍼마켓이라는 업태가 처음 등장한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 소매업 총매출의 28%정도가 수퍼마켓에서 일어난다. 이는 백화점 6.8%. Discount Store(할인점/DS)의 15%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미국의 수퍼마켓이 소매업 총매출에서 그렇게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지 소매유통 업태의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매매출의 견인역활

 

미국의 소매유통은 식품유통과 비식품 유통이라는 2가지 형태로 완전히 나뉜다. 그 중 식품유통은 수퍼마켓이 대표적인 업태이고 형식은 체인형태를 띤다.  

 

우선 식료소매유통업태(Food Retailing)를 살펴보면

Supermarket(SM),

Super-Supermarket (SSM),

Grocery Stder(GS),

Convenience Store(CVS.편의점) 등이 있다.  

 

비식료품소매유통업태(Non-Food Retailing)로는

Discount Store(DS),

General Merchandise Store(GMS),

Drug Store(Dg.S),

Department Store(Dpt.S_)

Membership Wholesale Club(MWC),

Specialty Store(SS) 등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 식품과 비식품을 통합하는 형태의 새로운 업태로 Combination Store(컴비내이션스토아. Cb.S)와 Super Center(,수퍼센터. Sp.C)등이 등장했다.   컴비내이션스토어는 수퍼마켓과 드럭스토어가 통합된 형태이고, 수퍼센터는 디스카운트스토어와 수퍼마켓과 수퍼수퍼마켓이 소매유통의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 컴비내이션스토어와 수퍼마켓과 수퍼수퍼마켓이 소매유통의 28%를 점하고 있다. 이는 실로 압도적이다.
그러나 이렇듯 미국의 수퍼마켓은 비슷한 유통업태와 통합과정에 있지만 그래도 일반인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인이 수퍼마켓을 찾는 횟수를 보면 미국 가정의 80%이상이 주2∼3회 수퍼마켓을 이용하고 있다는 한 조사도 있다.

 

때문에 수퍼마켓은 주택가에 밀착되어 분포돼 있다. 미국의 소매유통업이 이처럼 식품과 비식품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역사적·지리적인 특성때문니다. 이를 세분해서 살펴보면 우선 미국은 영토가 넓다.
단순비교하면 남한의 100배, 인구는 5배다. 따라서 1인당 가용면적이 우리의 20배정도 된다.

 

때문에 주택도 띄엄띄엄 분포돼 있고, 수퍼마켓도 1층에 단독건물로 돼 있다.
우리 나라처럼 지하나 고층건물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 그러나 비식품류는 자동차를 타고 멀리 나가서 사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비식품류 업태는 도심이나 번화가 또는 큰 쇼핑몰에 몰려 있다.

 

미국의 수퍼마켓은 1930년대 처음 생긴 이후 꾸준히 발전해 왔다. 소매유통에서 최고 33%까지 차지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미국인은 수퍼마켓을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지금은 약간 줄어 28%정도다. 이는 우리 나라의 수퍼마켓 매출이 총소매매출액의 5-6%정도인 것에 비하면 대단한 규모다.

 

우리 나라에도 물론 수퍼마켓은 많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미국만큼 그렇게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 미국 수퍼마켓 중 매출이 가장 많은 곳은 크로거(Kroger)라는 곳이다.

 

그 뒤를 아메리칸 스토어(American Stores), 세이프웨이(Safeway), 알버슨(Algertsons)등이 잇고 있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세이프웨이는 1996년 현재 소매업체 중에서 수퍼마켓 랭킹으로는 3위, 소매업 랭킹으로는 10위다.
그러나 처음에는 수퍼마켓 랭킹은 1위, 소매업 랭킹은 2위였다. 이유는 Vons라는 기업이 분사했기 때문이다. 

 

 

◇대형화로 전성기 구가

 

앞서 언급헌 것처럼 최근 미국에는 Drive Thru Pharmacy라는 것이 생겼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한 후 처방전을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에 이메일이나 팩스 등으로 보내면 환자는 약국에 가서 본인임을 확인하는 쪽지를 약국의 창구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차로 그 건물을 한바퀴 삥 돌아 반대편에 도착하면 조제된 약이 나아 있어 가지고 가는 형태다. 이는 모두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 나라도 곧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미국 역시 대형병원 앞에는 약국이 있다. 그러나 약국이 많지 않아 쉽개 찾을 수 없고, 또 약을 타려면 시간도 많이 허비되어 수퍼마켓에 있는 드럭스토어나 컴비내이션 스토어의 파머시를 주로 이용한다. 식료품을 사고, 쇼핑을 하고, 약을 타기 위한 다목적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2만개에 가까운 약국을 수퍼마켓이나 할인점 등에 효율적으로 통합시키는 것, 일반의약품 매대를 적재적소에 설치하는 것 등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아무튼 미국의 경우 그같은 이유로 매장의 대형화는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수퍼마켓의 동향을 살펴보면 현재의 1,000∼1,500평 규모에서 더 이상은 확대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디스카운트 스토어와 수퍼마켓이 합쳐진 수퍼센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수퍼마켓 경기는 호황이다. 언론에 이미 보도된 것처럼 지난 7년간 미국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 클린턴 행정부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간 미국은 벤처기업의 증가, 수퍼마켓의 호황, 동남아 저가상품의 유입, 디지털 경제와 합리적인 경영 등도 부가적인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유통업의 최대 경쟁력은 대형화이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 나라도 그 같은 추세에 있다.     중소 유통업체가 대형 유통업체에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심각한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는 현실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중소형 수퍼마켓이 대형점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업체들이 힘을 모으고 점포의 시설과 환경을 개선하며,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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