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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럭셔리 시장 움직이는 '숨은 손'은 누구

Paul Ahn 2007. 5. 11. 08:56

⊙국내 럭셔리 시장 움직이는 '숨은 손'은 누구

https://news.joins.com/article/21560999

 

갤러리아 명품관부터 청담사거리를 일컫는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 해외 유명 브랜드들의 단독 매장이 모여 있어 고급 패션과 쇼핑의 중심지로 꼽힌다.

 

86년 수입 자유화 조치 이후 세계 8위로 성장

에이전트 명맥 이어지는 한편 직진출 지사장 늘어

"둔화된 시장에서 이제부터가 진검승부"

"들어올 건 다 들어왔다. "

 

국내 럭셔리 시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젠 남들이 잘 모르는 브랜드를 걸치는 게 오히려 최고의 과시가 될 정도로 소비자 취향이 다양화하고 수준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

 

1984 1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면세점에 루이비통 매장이 처음 들어선 지 불과 33년 만의 변화다. 86년 패션 상품의 수입 자유화 조치로 국내 럭셔리 시장은 급성장했다. 2015년 기준으로 118억 달러(133400억원), 세계 8위 규모(베인앤컴퍼니).

 

지난 30여 년간 수입 패션 시장 판을 키우고 또 현재 키워 가는 주역은 누구일까. 30년 변천사와 함께 인물지도를 정리해 봤다. 인터뷰에 응한 몇몇은 소속 회사의 내부 규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익명으로 처리했다.

 

◇면세점 납품하다 내수 공략에이전트 1세대

40년 전만 해도 내수 시장은 이른바 '보따리 장사'로 해외 브랜드 옷이 조금씩 유통되는 게 전부였다. 수입 브랜드는 면세점의 전유물이었다. 국내 첫 시내 면세점인 남대문 인근의 남문면세점이 74년 문을 연 이후 동화(1979)·롯데(1980)에 이어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호텔신라·품전호텔·한진관광 등이 시내 면세점 운영허가권을 받았다.

 

면세점 증가와 함께 수입 자유화 조치가 뒤따르자 해외 브랜드 제품을 유통시키는 업체가 생겨났다. 이른바 수입 1세대로 유로통상이 몽블랑을, 삼숭교역상사가 에르메스를 맡는 식이었다. 이들은 면세에 이어 내수까지 영역을 넓혔다. 지금까지 건재한 곳으로는 제동물산(미쏘니지현통상(질 샌더) ·삼숭교역상사(에르메스 향수와 존롭) 등을 꼽을 수 있다. 겐조·아이그너를 수입하던 웨어펀인터내셔널도 그중 하나였는데, 권기찬(66) 회장은 최근 패션 사업을 접고 사진판매 갤러리 '옐로우코너'로 새로운 영역을 펼치고 있다.

 

수입 1세대 중 유로통상 신용극(72) 회장은 시장의 기류를 바꾼 '명품 대부'로 알려져 있다.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나와 남문면세점 무역부장으로 일하던 그는 프랑스 업체 본사들로부터 에이전트 권유를 받아 회사를 차렸다. 이후 버버리·몽블랑·아테스토니·피아제·바쉐론콘스탄틴·라프레리 등을 차례로 들여와 연속 히트를 쳤다.

특히 면세점에서 버버리를 뿌리내린 그는 당시만해도 성공을 기약할 수 없는 내수 시장에 승부수를 던졌다. 과거 유로통상에서 근무했던 지사장 A씨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87년에 현대백화점 본점에 버버리 매장을 열었어요. 신 회장이 트렌치 코트 가격을 130만 원으로 매기더라고요(1987년 사립대 연 평균 등록금은 116만원). 될까 싶었는데 그게 먹히대요. 럭셔리는 결국 소수만을 위한 희소 가치가 핵심이라는 전략이었죠. "

 

90년대 들어 시장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8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이 처음으로 해외 브랜드를 입점시킨 뒤 90 9월 한양쇼핑센터에서 이름을 바꾼 갤러리아 백화점엔 아예 명품관이 들어섰다. 매년 판매율이 20~30%씩 꾸준히 성장했다. '백화점에 일단 갖다만 놓으면 물건은 알아서 팔린다'는 말이 통했다.

 

◇급성장하는 시장에 맞춰 2세대 에이전트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93년 패션업체 삼일사를 운영하던 김삼중(67) 회장은 에스제이듀코(S.T. 듀퐁), 호텔신라 서울점장이었던 이충희(62) 대표는 듀오(에트로)를 세웠다. 두 사람 모두 아직까지 활발한 비즈니스를 벌이며 판을 키워 온 인물로 꼽힌다.

 

김 회장은 S.T. 듀퐁 외 빈치스벤치·빈치스 등 자체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시켰고, 이 대표는 국내에 에트로 매장 40여 곳(면세점 포함)을 보유할 정도로 이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뿌리내리도록 기여했다. 그는 "자본금 800만 원 들고 당시 에트로 아시아 판권을 갖고 있는 일본 썬모토야마 담당자를 여섯 번이나 찾아가 시작한 사업이 지금처럼 커졌다"고 회고했다.

 

국내 시장에서 성장한 이들과 달리 스프루스코리아의 박치욱 대표는 재미교포 출신. 2002년 코오롱FnC와 합자투자한 스프루스코리아를 세워 화장품브랜드 '프레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이후 '케이트서머빌''아틀리에코롱' 등 다양한 뷰티 브랜드들을 들여왔다.

 

수입 시계 역시 90년대 초 직수입 판권을 지닌 에이전트들이 지금까지 건재하다. 김영배(64) 사장의 명보아이엔씨는 95년 명보교역에서 출발, 위블로·태그호이어·브라이틀링 등 고급시계를 유통하고 있다.

 

89년 김윤호(57) 대표가 세운 우림FMG 역시 97년 론칭한 엠프리오 아르마니 시계가 대박을 치면서 탄탄하게 기반을 닦았다. 그간 70여 개 수입 시계 브랜드를 소개해 왔고, 현재는 쇼파드·파텍필립(갤러리아 명품관) 등의 판권을 갖고 있다.

 

성주그룹(MCM) 김성주(61) 회장도 당시 첫 발을 들였다. 90년 창립 직후 구찌 면세와 내수 판권을 따내며 탄탄대로를 달렸고, 입생로랑·소니아리키엘 ·MCM 등을 연달아 들여왔다. 2005년엔 아예 MCM을 인수해 버렸다.

 

◇해외파·대기업 출신…1세대 지사장

80년대까지는 '명품'이라고 하면 도자기나 그림 등을 일컬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부터 고가 수입 브랜드가 이를 대신했다. 시장의 열기가 뜨거웠고, 거의 모든 브랜드가 두자리 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가능성을 확신한 유럽·미국 브랜드들은 하나둘씩 직진출을 시작했다. 91년 루이비통코리아·샤넬코리아가, 96년엔 프라다코리아 등이 국내에 둥지를 틀었다. 에르메스·디올·페라가모(1997), 구찌(1998)가 잇따라 한국 법인을 만들었다.

 

당시 법인을 맡은 지사장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사업 초기이니만큼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지만 현지 사정을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전형선(57) 전 에르메스코리아 대표는 "당시 플래그십 매장 자리 선정 등에 지사장이 꽤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말했다. 몇몇 브랜드를 거친 모 브랜드 지사장 B씨도 비슷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럭셔리 매장 오픈을 계획하던 2000년대 초, 이탈리아 본사에서는 인구 수 기준으로만 따져 입점을 말렸지만 한국 법인 측이 국내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그는 "지방 부자들이 광주·부산 등 몇몇 도시로 원정 쇼핑을 하는 우리만의 특성을 확신해 밀어부쳤고 매출을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웃렛에 입점해주는 조건으로 백화점 매장 크기를 키우는 거래도 비일비재했는데 이 역시 지사장의 역할이었다.

 

1세대 지사장은 대략 해외파와 대기업 출신으로 나눠진다. 조현욱(54) 전 루이비통코리아 회장은 대표적 해외파였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스위스·일본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에 외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94년 루이비통 대표를 맡은 이래 무려 22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조만간 설립될 LVMH코리아 대표로도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몽클레르신세계(몽클레르와 신세계 합작법인) 이용택(51) 대표 역시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오래한 덕에 4개 국어에 능통한 인물. 92년 로로피아나의 첫 한국 지사장이 된 뒤 20여 년간 근무했고, 2014년 지금의 자리를 꿰찼다.

 

토종파로는 최완(58) 전 휴고보스코리아 대표와 한상옥(61) 베르사체·모스키노 코리아 대표가 가장 먼저 꼽힌다. 최 전 대표는 92년부터 선경테이프사업(SKM, 현재의 워커힐 면세점)에서 면세점 사업부에 재직하며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 96년부터 2013년까지 페라가모에서 근무한 뒤 2014년 휴고 보스 코리아 지사장을 맡다 최근 홍콩 남성복 브랜드 사업을 준비 중으로 알려져 있다.

한 대표도 신세계백화점과 신세계인터내셔날(SI)을 거쳐 크리스찬디올꾸뛰르코리아 지사장으로 10년 간 '장기 집권'을 했다. 퇴사 당시 본사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크리스찬디올주얼리 면세 판권을 얻은 일이 업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파리 출장에 가면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CEO(당시 크리스찬 디올꾸뛰르 상무 이사)를 만날만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새 브랜드를 들여온다면 가장 먼저 찾을 인물'이라는 업계 평판에 걸맞게 한 대표는 모스키노와 베르사체 한국법인을 동시에 맡고 있다.

 

◇창업자 모드에서 관리자 모드로…2세대 지사장

2000년대 중반 이후 럭셔리 시장은 보다 대중화했다. 루이비통 '스피디백'은 길가에서 3초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다는 뜻의 '3초 백'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샤넬 2.55, 입생로랑의 뮤즈백, 발렌시아가 모터백 등 브랜드마다 '잇백'을 앞다퉈 내놓으며 경쟁을 벌였다. 2005년 강북에서도 처음으로 명품관이 생겼다. 롯데가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옆에 문을 연 애비뉴엘이다.

 

직진출 브랜드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사장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 현재 지사장인 2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젊고, 재임 기간이 짧아지면서 '회전문 인사'처럼 브랜드를 옮겨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또 국내외 패션업계에서 이미 브랜드를 경험한 이들이 대다수다.

 

윌리엄 윤(54) 발렌티노코리아 대표는 재미교포 2세로, 1999년 뉴욕 구찌에서 브랜드와 인연을 맺은 뒤 2005년 구찌코리아 대표로 국내에 입성했다. 구찌코리아 출신의 이종규(51) 디올코리아 대표는 2008년 보테가베네타코리아 대표를 지내며 브랜드 인지도를 높인 성과를 인정 받아 2013년 현 자리로 옮겼고, 김한준(52) 마이클코어스코리아 대표는 버버리코리아(2009~2012)와 페라가모코리아(2013~2015)를 거쳐 2016년 지금의 브랜드에 합류했다. 반면 에르메스코리아 한승헌(56) 대표는 LG전자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팀장, 스페인 법인장을 거쳐 깜짝 발탁된 '뉴 페이스'.

 

여성 지사장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최문영(54) 프라다코리아 사장, 김쎄라(49) 까르띠에코리아 사장이 각각 2007·2009년 이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 사장은 91년 루이비통 한국 1호점 매니저로 업계에 첫발을 들인 뒤 셀린코리아 지사장을 지냈다. 김 사장은 뉴욕 DKNY에서 일하다 99년 귀국, 펜디코리아를 거쳐 2006년 까르띠에 영업부장으로 브랜드에 합류했다.

 

또 샤넬코리아 상무 출신의 김하정 보테가베네타코리아 대표와 겔랑코리아 매니징 디렉터를 거친 불가리코리아 이현경(48) 대표, 로로피아나 지사장을 지낸 버버리코리아 김민희 대표도 업계에서 활약 중이다. 외국인 중에는 샤넬의 스테판 블랑샤르, 루이비통의 티에리 마티, 토즈의 주세페 카발로, 구찌의 카림 페투스 등이 있다.

 

이들의 미션은 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2010년 이후 국내외 럭셔리 시장이 점점 둔화하면서 새로운 진검승부를 벌여야하는 것. 이전 세대처럼 백화점에 매장을 여는 게 곧 매출로 이어지던 호시절이 지나간 만큼 개인의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모 브랜드 지사장 C씨는 이를 "창업자에서 관리자로 모드가 전환됐다"고 표현한다. '얼마나 파느냐'에서 '어떻게 파느냐'에 대한 전략을 짜고, 고객을 관리하면서 '정체기에 성장을 이끄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합세…"오너가 주도"

현재 국내 럭셔리 시장은 에이전트와 한국법인의 양강 구도가 아니다. 백화점과 대기업까지 업계에 뛰어들어 판을 키워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들은 안정적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유통이 어렵지 않다는 이유에서 아직 직진출 하지 않은 브랜드의 독점 판권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패션비즈 민은선 편집장은 "어떤 브랜드를 들여오고 밀어줄 것인가는 핵심 인물을 몇몇 꼽을 수 있지만 결국 '오너의 판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 사장이 이끄는 신세계 인터내셔날은 이 카테고리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더러 여러 브랜드를 동시다발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92년 전신인 신세계백화점 해외사업부에서 독일 패션브랜드 에스카다 수입을 시작한 이후 해외직수입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 패션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와 돌체앤가바나를 들여오는 데도 연이어 성공했고, 디자이너 브랜드 알렉산더 왕이나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최근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폰타나 밀라노 1915', 마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는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안야 힌드마치' 매장을 열었다.

 

또 이서현 사장이 맡은 삼성물산 패션부문(구 제일모직)은 토리버치·꼼데가르송·이세이미야케 등을 수입하고 있다. 콜롬보는 이 사장이 의욕적으로 나서 2011년 지분 100%를 인수해 한국법인을 설립했다.

 

반면 한섬과 SK네트웍스 패션사업부를 인수한 현대백화점, 패션부문 계열사 GF를 둔 롯데백화점은 각각 캘빈클라인·DKNY와 겐조·아이그너를 수입하고 있지만 선두에 나서는 '키 맨(key man)'은 딱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중앙일보

2017.05.11 00:01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