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술의 귀재 개성상인
개성상인은 이익을 독식하지 않는다
개성(開城)은 473년 동안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옛 지명은 송악(松岳)이었는데 ‘서울을 열었다’는 뜻을 담아 개경(開京)이라 칭하였다. 조선 시대 개성은 옛 도성뿐 아니라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넓은 지역을 아울렀다. 개성상인은 이곳에서 일어나 전국을 주름잡으며 한국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고려는 상업을 중시하고 상인을 우대하는 나라였다. 창업자의 내력부터 그러했다. 태조 왕건의 집안은 서해를 누비던 해상 세력으로 중국과 무역을 통해 기반을 닦았다. 상인의 피가 온나라에 돌았다. 고려 시대 개성은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영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배들이 예성강 입구의 무역항 벽란도를 드나들었다. 황성 정문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간선대로는 상인들이 활개쳤다. 도로 좌우에 1천여 칸의 시전(市廛)이 들어서 고려 말까지 흥성했다. 시전의 영업망은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며 나라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개성상인이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이었다.
◇개성상인의 지적 수준이 올라간 까닭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상업은 극도로 위축됐다. 조선에서는 성리학 이념에 따라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펼쳤다. 직업은 크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가지로 나뉘었는데 상인을 가장 천시했다. 개성의 시전 상인들은 조정으로부터 이주를 명 받고 한양에 건너가 새로운 시전을 열었다. 나랏일에 보탬이 되는 조건으로 상설시장을 허락받은 것이다. 개성에 남아있던 시전은 1409년에야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전 왕조의 잔재로 취급받아 지역 차별을 당했고 관직 진출도 가로막혔다. 개성 안팎에는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았기에 새로이 상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양반사대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시받는 일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망국민의 설움을 차라리 재물로 풀고자 했다. 덕분에 개성상인의 지적 수준이 단번에 올랐다. 그들은 고려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전국 영업망을 발판 삼아 뛰어난 상술을 발휘했다.
개성상인은 조선 초기부터 행상에 나섰다. 생산지와 집산지를 찾아다니며 상품을 확보했고, 흉년으로 인해 생겨난 장시(場市)를 연결했다. 한양과 개성의 시전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전국 각지에 송방(松房), 곧 개성상인의 지점이 나타났다. 상인은 차인(差人), 서사(書師), 사환(使喚) 등을 지방에 파견해 상품을 매입하고 유통했다. 이들 고용인은 영업 능력과 충성도가 인정되면 독립할 기회를 얻었다.
◇위기를 기회로! 부르는 게 값인 홍삼
송방을 통한 매점(買占)은 개성상인의 장기였다. 갓의 재료인 양태(凉臺)는 제주도에서 생산됐다. 개성상인이 중간 집산지인 강진과 해남에서 이를 매점했다.
물건을 기다리던 서울의 양태전은 한동안 헛물만 켜야 했다. 동해 연안에서 나는 수달 가죽도 그랬다. 서울의 공인(貢人)이 사냥꾼이나 중간 상인을 기다릴 때 개성상인은 직접 현지로 달려가 가죽을 사들였다. 선대제(先貸制)라 하여 미리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독점하기도 했다.
개성상인의 상술은 진화를 거듭했다. 어음의 일종인 환(換)은 개성상인이 고안한 화폐였다. 거래 대금을 곡식, 면포, 동전으로 운반하면 비용도 많이 들거니와 강탈당할 우려도 컸다. 하여 물건을 거래한 뒤에 환을 발급하고 개성이나 서울에 가서 대금을 찾도록 했다.
국제무역에서도 개성상인은 빼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그들의 대표 상품은 인삼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삼각 무역은 18세기에 이르러 개성상인이 부를 쌓은 원천이었다. 그들은 인삼을 재배해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의 은을 들여와 다시 중국으로 수출했다. 밀무 역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 사신단에 몰래 잠입해 청나라 상인과 은, 인삼 등을 직접 교역했다.
홍삼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진취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인삼 씨를 가져가 생산하면서 은을 반입하기 어렵게 됐다. 중국에서는 장기 보관과 부작용이 문제가 돼 조선 인삼의 평판이 곤두박질쳤다. 삼각무역의 고리가 끊어지고 밀무역도 신통치 않게 된 것이다. 개성상인은 끈질긴 연구 끝에 홍삼 제조 비법을 개발했다. 인삼을 가공해 만든 홍삼은 효능이 탁월해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인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여겨 부르는게 값이었다.
◇개성 깍쟁이? 뿌리를 잊지 않는 자부심
개성상인은 회계에 능했다. 그들은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置簿法)이라는 복식부기를 사용했다. 상품 거래와 현금 흐름을 채권, 채무, 매입, 매각의 네 가지 항목으로 구분해 장부에 기록했다. 어느 개성상인의 회계 장부를 보면 1874년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상품 구입 총액이 10만 냥을 넘었다. 당시 개성유수부의 1년 세수는 8~9만 냥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성상인의 경제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성상인은 오히려 이익을 독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른바 ‘이불가이독식(利不可而獨食)’이다. 개성상인 박영진 가문의 장부에 이 원칙이 잘 나타나 있다. 합작으로 인삼밭을 경영하면서 발생한 이익을 균등하게 나눴다. 인삼을 재배하려면 토지와 자본은 물론 기술과 관리가 필수다. 그 가치를 같은 값으로 평가한 것이다. 합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개성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개성 사람들이 계산에 무척 밝다는 뜻이다. 서울 깍쟁이, 수원 깍쟁이와 더불어 3대 깍쟁이로 통한다. 깍쟁이는 본래 ‘가게장이’에서 유래했다. 개성상인의 역사가 담긴 말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개성에서 한양 가는 것을 ‘올라간다’고 하지 않고 ‘내려간다’고 했다. 반대로 한양에서 개성 가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려의 수도 개성이 자신들의 뿌리임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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