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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조선 상권 지킨 박흥식

Paul Ahn 2009. 1. 1. 02:00

⊙일제강점기에 조선 상권 지킨 박흥식

 

종로에서 일본 자본과 겨뤄 백화점 시대 열다

(retailing.co.kr)

 

1930년대 일본 백화점들의 득세 속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열어 일본 상권의 종로 진출을 막고자 했다.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들여오고 통 크게 사은행사를 벌여 조선 4대 백화점이 됐으나 광복 후 친일파로 지목되는 등 그의 시대는 저물었다. 결국 1980년 부도를 맞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1930년대 경성(서울)에 백화점 열풍이 불어 닥쳤다.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근대를 전시하는 쇼윈도를 통해 백화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패션, 화장품, 귀금속, 시계, 카메라, 전화기 등 고급스럽고 이국적인 명품들이 남녀 고객들을 유혹했다.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 단위 손님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식, 일식, 양식을 모두 갖춘 식당으로 올라갔다. 오늘날 백화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 식민지 조선에 펼쳐진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밀어주는 일본 백화점들이 기세를 올렸다. 미츠코시백화점이 선두주자로서 첨단 유행을 선도했고, 뒤에 들어선 미나카이백화점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소비자 유치 경쟁에서 조선 상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당시 경성에서는 진고개(을지로, 충무로, 명동)의 일본 상권과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상권이 맞서고 있었다. 백화점을 앞세운 일본 자본의 공세는 조선 상권을 고사 위기에 빠뜨렸다.

 

이렇게 되자 조선 상인들도 백화점 창업으로 맞불을 놓았다. 화신백화점은 1932 5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인근에 문을 열었다. 사장 박흥식은 종이 유통으로 돈을 번 인물이었다. 그는 화신을 키워 일본 상권의 종로 진출을 막고자 했다.

 

 

◇대담한 상술로 일본 백화점과 경쟁

 

백화점 업계에 발을 들인 박흥식은 우선 조선 상권의 주도권을 노렸다. 화신백화점 바로 옆에는 몇 달 전에 개업한 동아백화점이 있었다. 고물상 출신 사업가 최남이 세운 이 백화점은 미모가 출중한 여점원들을 대거 고용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화신은 이웃집의 미인계부터 상대해야 했다.

 

 ‘숍걸’은 1930년대 백화점의 꽃이었다. 여성이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백화점들이 경쟁적으로 여점원을 뽑자 지원자들이 대거 몰렸다. 숍걸 채용 기준은 어땠을까. 잡지별건곤’ 1934 5월호에 업계 선두인 미츠코시백화점의 사례가 실렸다. “주로 여상을 마친 점잖은 집안의 따님을 뽑는데 얼굴과 스타일이 선결 조건이었다.” 제복을 차려입고 예쁘게 화장한 여점원들이 반겨주니 남자들이 백화점으로 모여들었다. 로맨스가 피어나고 인기 스타도 탄생했다. 숍걸 마케팅은 은근히 잘 먹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박흥식은 이런 얄팍한 수단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소비자는 싸고 좋은 상품을 찾는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는 도매상을 거르고 일본으로 직접 갔다. 제품 동향을 파악하고 물건을 싸게 들여왔다. 덕분에 가성비 좋은 상품을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염가 할인판매도 가능해졌다. 사은행사는 통 크게 벌였다. 경품으로 서구식 주택을 내놓을 정도였다. 화신백화점은 결국 동아백화점을 인수· 합병하고 조선 상권을 장악했다.

 

일본 백화점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박흥식은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하고 대담한 상술을 발휘했다. 소설가와 시인에게 광고 업무를 맡겨 화신 이미지를 차별화시켰다. 경성 최초로 발행한 백화점 상품권은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구입해 여기저기 선물했다. 박흥식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고객 확대에 매진했다. 화신대식당을 오픈해 가족 고객을 유치하고, 통신판매를 개시하여 고객의 집으로 찾아갔다.

 

 ‘삼천리’ 1933 2월호에 따르면 화신백화점의 일일 방문자 수는 11 7천 명으로, 미츠코시백화점(12 6천 명)에 이어 2위를 달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화신은 1930년대 중반에 미츠코시, 미나카이, 조지야와 함께 조선 4대 백화점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박흥식은 일약 조선 상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조선 상권 지키려다 친일파로 몰려

 

“화신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곧 조선 사람의 역량을 증명하는 시금석입니다.”

 

잡지삼천리’ 1934 8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박흥식이 주장한 바는 명확했다. 그는약진하는 조선의 화신을 각종 광고에 내걸고 동포애를 사업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러한 민족주의 마케팅은 1935년 초부터 연쇄점을 추진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 지역의 주요 잡화점들을 화신연쇄점으로 묶어 조선 상권 전국망을 구축한 것이다.

 

화신의 거침없는 행보는 화재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다. 1935 1 27일 목조 4층 백화점 건물에 큰불이 나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이다. 박흥식은 곧바로 은행 융자를 얻어 건재를 알렸다. 1937 11월에는 종로 사거리에 신관을 새로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이 르네상스식 건물은 일개 점포를 뛰어넘어 조선의 명소가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화신백화점의 위상은 굳건했다. 시골 학생들이 수학여행 오면 화신에 들러 신문물을 구경했다. 촌로들은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 탄 얘기를 손주들에게 자랑삼아 들려줬다. 화신백화점 옥상의 전광판을 바라보며 경성 시민들은 뉴스와 화젯거리를 주워섬겼다. 조선 사람들의 긍지이자, 민족자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빛이 휘황찬란할수록 그림자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광복 이후 화신백화점은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박흥식 사장이 친일파로 지목된 것이다. 1944년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 일제 침략전쟁에 협조하고 그 밖에도 여러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린 혐의였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 검거 1호로 잡혀 들어갔지만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공장에서 실제로 비행기를 제작하지 않았고 친일단체 참여는 사업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이 참작됐다.

 

무죄 선고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박흥식 사장에게는 평생의 한이 되었다. 결국 화신은 1980년 부도를 맞았고 박흥식 사장은 재기를 위해 노력하다가 1994년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한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인으로서 민족자본을 일으켜 조선 상권을 이뤄보려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냈을 뿐이오. 그게 친일파라면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이 나라에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9, 인물과사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