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운송으로 흥한 경강(京江)상인
조선시대에도 유효했던 물류의 힘
역사적으로 운송은 상거래의 성패를 좌우했다. 때와 장소에 맞게 상품을 집하하고 분산하는 일은 가격, 매출, 이윤 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상업유통의 발전은 배에 화물을 싣고 바다와 강을 누비는 수상 운송이 이끌었다. 물길을 따라 상품 화폐 경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 중심에 경강상인이 있었다.
경강(京江)은 오늘날의 한강을 말한다. 조선의 도읍 한양을 일으킨 강, 그러나 조선 전기만 해도 경강은 고요히 흘렀다. 세곡선(稅穀船)이 조세로 거둔 곡식을 싣고 용산과 서강 포구를 드나들었지만 대체로 한적했다. 경강 백성들은 연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았다. 개중에는 뱃사람들도 있었다. 나룻배 띄워 강을 건네주거나 어선을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는 게 이들의 소박한 생업이었다.
◇세곡 운송하다 쌀 시세에 눈뜨다
경강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왜란과 호란이 휩쓸고 지나간 뒤 한양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국토의 황폐화와 넓은 토지를 경작하려는 광작(廣作)의 유행으로 농지를 잃은 백성들이 몰려든 것이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며 상업유통도 활발해졌다. 현물 대신 쌀, 포목, 돈을 납부하면서 세곡 규모와 상품 수요가 동시에 커졌다.
경강 뱃사람들은 이제 나룻배와 어선을 놔두고 미곡 운송선에 올라탔다. 선주(船主)는 한양의 궁방(宮房, 역대 국왕 일가)과 대갓집들이었다. 그들은 지방에 광대한 농지를 갖고 있었다. 거기서 소작미를 싣고 오는 게 뱃사람들의 임무였다.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자 자연스레 나랏일도 들어왔다. 선가(船價)를 받고 세곡선 운송을 맡게 된 것이다. 운송 범위도 호남과 호서,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넓어졌다.
세곡선은 먼 바다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육지에서 보이는 연안으로 다녀야 했다. 해적이나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심이 얕은 연안은 해난 사고의 위험성이 컸다. 특히 태안반도의 안흥량과 황해도의 장산곶이 악명 높았다.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난파를 당하는 배가 많았다. 이런 험로를 오가면서 경강 뱃사람들의 항해술은 일취월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안흥량과 장산곶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니게 됐다.
뱃사람들이 상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전국을 누비며 세곡을 나르다 보니 쌀 시세에 눈을 떴다. 지방마다 쌀값이 다른 점을 이용하면 돈벌이가 됐다. 운송하다가 쌀값이 오른 곳에 세곡 일부를 내다 팔고, 한양 근처에서 값싼 쌀을 구입해 빈 세곡을 채워 넣었다. 시세 차익을 실현한 것이다. 경강 뱃사람들은 이렇게 자본을 축적하고 선상(船商)이 됐다. 밤섬 조선소에서 자기 배를 장만해 본격적으로 장사에 나선 것이다.
◇경강상인 김세만이 벼락출세한 비결
숙종 45년(1719) 7월, 경강상인 김세만이 절충장군에 임명됐다. 비록 명예직이지만 정3품 당상관을 제수(除授 ;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받은 것이다. 그는 서강 포구에서 쌀을 거래하는 선상이었다. 시세가 낮은 지방에서 쌀을 매집해 포구의 시전 지점에 넘기고 이문을 남겼다. 조선에서 천시 받던 상인에게 임금이 당상관 품계를 내린 까닭은 무엇일까.
김세만의 벼락출세는 재난에서 출발했다. 그는 평안도의 쌀값이 저렴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지로 들어가 쌀 100여 석을 사들였다. 그런데 황해도 용매진 부근에서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큰 낭패를 봤다. 물에 빠진 김세만은 진졸(鎭卒)의 구조를 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쌀도 군사들의 도움으로 바다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배를 잃은 손실은 컸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는 은혜를 갚고 싶었다. 마침 흉년이 들어 진중의 군사들이 굶주렸다. 진장(鎭將)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상인은 배에 실었던 쌀을 몽땅 기부하기로 했다. “호생지덕(好生之德)에 사례를 해야겠소. 이 쌀로 진졸들을 구제하시오(숙종실록).”
진장이 쌀값을 치르려 했지만 김세만은 극구 사양했다. 이 미담은 감사를 거쳐 조정에 보고됐다. 일개 장사꾼을 파격적으로 절충장군에 봉한 이유다. 단지 김세만의 선행을 칭송하는 조치였을까. 여기에는 경강상인이 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뱃사람에서 상인으로 변신한 이들은 조선의 상업유통을 어떻게 바꿨을까.
◇‘주인권’ 발판으로 전국 유통망 구축
18세기 중엽 경강에서는 서강, 마포, 망원, 용산, 한강진, 서빙고, 뚝섬, 두모포(현재 동호대교 부근) 등이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 쌀, 소금, 생선, 건어물, 목재, 땔감 같은 생활필수품과 모시, 무명, 삼베, 옹기 등 수공업품이 한양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본력이 큰 상인들은 경강 포구에 가게, 창고, 여관을 차리고 여객주인(旅客主人)으로 활약했다. 객상(客商)과 계약을 맺고 도매, 위탁판매, 보관, 운송, 금융, 숙식 등을 일괄적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계약은 객상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 여객주인의 독점권을 보장했다. 향이 좋은 황해도 배 ‘추향’, 남양과 안산의 길쭉한 곶감 ‘용화’도 주인과만 거래할 수 있었다. 주인권은 법적인 보호를 받는 재산이었다. 객상이 다른 곳과 거래하면 ‘횡반주인지죄(橫叛主人之罪)’로 처벌받았다. 지역 생산품에 대한 독점권도 인정됐다. 김세만도 여객주인이 됐는데 1735년에 충청도 태안, 1739년엔 홍성과 보령의 경강주인권을 매입했다. 주인권은 상품의 출하 시기와 출하량을 조절해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능까지 부여했다.
1791년 신해통공(시전 상인들의 상업활동 독점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허락한 조처)으로 시전(나라의 허가를 받아 장사하는 상인)의 금난전권(시전 상인이 허가를 받지 않은 상인인 난전을 직접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이 철폐되자 경강상인들은 날개를 달았다. 그들은 중간도매상들을 앞세워 신흥시장을 개척했다. 한양의 칠패장(염천교 부근)과 이현장(광장시장 부근)이 어물 유통을 장악하며 종로 시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전국 포구에서 경강으로 모여든 상품들은 한양 외곽의 누원장과 송파장을 거쳐 다시 전국 장시(정기적으로 운영되는 시장)로 퍼져 나갔다. 영정조 재위기에 정비한 육로와 18세기에 들불처럼 번진 장시를 활용해 전국 유통망을 구축한 것이다. 수상 운송으로 흥한 경강상인들은 마침내 조선 최대의 거상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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