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장사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가득참을 경계하는 잔'처럼, 과욕은 금물
장사꾼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상인은 ‘상인의 신용’이 걸렸을 때만큼은 차라리 손해보는 쪽을 택한다. 순간의 손해가 신용을 쌓거나 사람을 키우기도 하니 길게 보면 이익이 되는 손해다. 더불어 과욕은 화를 부르고 욕심이 도를 넘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조선 시대 한 거상의 상도에서 이를 배울 수 있다.
1821년 중국 북경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 조선 상인이 객관 마당에 홍삼을 쌓아 놓고 한 상자씩 불태우는 게 아닌가. 홍삼은 청나라에서 인기가 높고 가격도 비쌌다. 그 귀한 홍삼을 불에 던져 넣고 있으니 청나라 상인들이 몰려오고 난리가 났다. 조선 상인의 이름은 임상옥(1779~1855)이었다. 그는 국경 지역인 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장사에 뛰어들었다. 수완이 뛰어나고 신용이 두터워 나라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상인이 됐다. 덕분에 1810년경에는 국경 지역의 인삼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홍삼 가격 담합한 청나라 상인들
인삼은 조선의 대표적인 특산품이었다. 특히 수삼을 쪄서 말린 붉은 인삼, 홍삼(紅蔘)은 원기 회복과 역병 예방에 효과가 탁월해 청나라 상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였는데, 조선 홍삼이 아편 중독 치료에도 특효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 따라서 청나라 상인들은 어떻게든 조선에서 들어오는 홍삼 물량을 확보해야 했다. 당시 조선은 사신이 청나라에 들어갈 때 권한을 부여한 자를 함께 보내 홍삼을 거래하도록 했는데, 그 독점권을 임상옥이 갖고 있었다.
1821년에도 그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당도했다. 홍삼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 연거푸 객관으로 들어왔다. 해마다 오는 사행길이 아니기에 몇 년치 물량을 한꺼번에 싣고 온 것이다. 멀고 험한 여정에 수하들이 고생하긴 했지만 이제 홍삼이 불티나게 팔릴 테니 피로가 봄눈 녹듯이 풀릴 터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청나라 상인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흥정은 없고 파리만 날렸다. 임상옥은 중국말에 능통한 수하를 내보내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얼마 후 수하가 헐레벌떡 달려와 행수에게 고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홍삼의 ‘불매동맹(不買同盟)’을 맺었다는 것이다.
상단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청나라 상인들은 임상옥이 조선 홍삼을 독점하고 가격을 마음대로 높인다고 여겼다. 약재 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물량을 확보하지도 못하고, 부르는 게 값이다 보니 이문이 많이 남지도 않았다. 작은 나라의 행수에게 끌려 다닌다고 생각하니 대국의 상인으로서 자존심도 상했다. 이에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 홍삼을 구매하지 않기로 담합했다. 임상옥 상단이 상품을 잔뜩 싣고 베이징에 왔으니 홍삼을 팔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또 인삼 무역 독점권을 가진 만큼 나라에 바칠 세금도 막대할 것이다. 홍삼을 못 팔면 그걸 모두 혼자 뒤집어써야 하니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했다.
청나라 상인들은 이렇게 옥죄면 임상옥이 홍삼 가격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신과 함께 귀국하기 전까지 헐값에 물량을 풀 수밖에 없으리라.
◇가격 흥정 대신 홍삼 불태워
그러나 귀국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임상옥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애가 타는 쪽은 청나라 상인들이었다. 거래처에서 문의가 빗발쳤고 약재상들이 밤낮으로 독촉했다. 조선 상인이 왔는데 왜 홍삼을 안 주느냐고 으르렁거렸다. 상품이 딴 데로 새는 것 아니냐며 눈을 흘겼다. 잘못하면 자신들의 신용이 떨어지게 생기자 슬슬 후회가 밀려왔다.
임상옥의 노림수가 여기 있었다. 그는 불매동맹으로 양자가 잃을 것이 무엇인지 짚어보았다. ‘나는 이문을 좀 덜 보면 그만이지만 저쪽은 신용이 걸려 있는 문제다. 상인에게는 신용이 생명이니 저들도 타격이 꽤 크다. 어쨌든 물량은 내가 쥐고 있다. 버티면 기회가 온다.’
그는 조선 홍삼을 헐값에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불철주야 인삼밭을 관리하고 비법을 연구해 찌고 말려서 이역만리를 고생스레 운반했다. 제값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니 차라리 안 팔고 말지 헐값은 안 된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상옥은 대담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귀국하기 전날 수하들로 하여금 홍삼을 마당에 쌓게 하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그가 귀한 홍삼을 불에 집어넣자 수하들은 사색이 되었다.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안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청나라 상인들이 떼로 몰려왔다.
한 상인이 반쯤 탄 홍삼을 끄집어내자 임상옥이 나무라며 다시 던져 넣었다. 그의 눈은 장작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청나라 상인들은 허튼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가 보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기와 진심이 느껴졌다.
그들은 정중한 태도로 조선 상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값은 얼마든지 쳐줄 테니 남은 물량을 넘기라고 청했다. 임상옥은 원래 가격의 배 이상을 불렀다. 불타버린 홍삼도 보상을 받아 불매동맹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 통쾌한 반전이었다. 그렇게 임상옥은 전설이 됐다.
◇과욕은 화를 부른다
장사꾼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말로는 밑지고 판다고 해도 뒤로는 이문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상인은 손해를 감수할 때가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 때문이다. 상인의 신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사람도 그러하다. 순간의 손해가 신용을 쌓거나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길게 보면 이익이 되는 손해다.
그렇다면 현대의 출혈경쟁은 어떨까. 같은 지역에 동일 업종의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면 가격을 원가 밑으로 내려 물량 공세를 취하곤 한다. 경쟁자가 망할 때까지 서로 벼랑 끝 전술을 펼치기도 한다. 얼핏 이익이 되는 손해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 말이다.
임상옥은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을 곁에 두고 아꼈다고 한다. 이 잔은 술을 7할 이상 따르면 구멍으로 모두 새어 나간다. 안에 있는 원통형 관이 공기압과 중력에 따라 작동하는 원리다. 그가 계영배를 곁에 둔 것은 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술을 넘치도록 따르면 모두 새어 나가듯이, 욕심도 도를 넘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거상의 ‘상도(商道)’다.
임상옥(林尙沃, 1779년 ~ 1855년)
조선 중기의 무역 상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출생하였다.
어릴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가 거듭된 낙방을 하고,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결국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
결국 임상옥의 일가는 모두 관노로 끌려간다. 후에 만상 사환으로 들어간 임상옥은 만상 도방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기에 이른다. 만상 도방은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1810년 순조 10년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1811년 순조 11년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가 위험해지자 의병을 모을 모집금과 군수물자를 살 돈을 제공하였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어록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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