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efit/⊙Common sense

⊙난장(亂場) / 놀이판을 벌여 사람을 모으다.

Paul Ahn 2008. 12. 8. 18:48

⊙난장(亂場) / 놀이판을 벌여 사람을 모으다.

 

조선 후기 시장을 북적이게 한 달놀음과 남사당

(retailing.co.kr)

 

조선 후기 장시에는 여러 이벤트가 열렸다. 사람들은 이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 지역별로 특유의 놀이판이 벌어졌고, 보부상은 관심을 끌기 위해 행진놀이도 진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지금의 매장과 다를 바 없다. 소비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 시기별, 타깃 고객별 적절한 이벤트를 열 줄 알아야 집객을 계속할 수 있다.

 

‘난장판’은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썩한 곳을 뜻한다. 원래 조선 후기 장시(場市), 오늘날로 치면 유통 현장에서 널리 쓰인 말이다. 장시에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상인들이 연출한 문화 이벤트를난장(亂場)’이라 불렀다. 장이 서면 한쪽에서 부산스럽게 상품을 팔고, 다른 쪽에서는 흥미진진한 놀이판을 벌였다.

 

 

조선 후기 장시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난장 역시 팔도강산을 들썩이게 했다. 사람들은 장도 보고 구경도 하려고 장터에 모여들었다. 상인과 예인과 주민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판을 벌였다. 난장은 한국인의 삶에 스며들었다. 들일과 길쌈으로 점철된 고단한 일상을 흥과 신명으로 달랬다.

 

 

◇장터를 주름잡은 가면극, 산대놀이

 

조선 후기 장시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 곳은 한강변에 자리한 송파장이었다. 이곳의 거상은 기부금을 거둬 정월대보름, 단오절, 백중절, 추석 등 명절마다 성대한 놀이판을 벌였다. 송파산대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49) 18세기 송파장이 번성하면서 나타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산대놀이는 음악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대사를 치는 탈놀음이자 가면극이다. 송파장에서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고사를 지내고 일곱 마당을 펼쳤다.

 

춤사위는 구성지고 익살 넘쳤다. 염불 장단의 거드름춤, 타령 장단의 깨끼춤, 굿거리 장단의 허튼춤이 나오면 놀이마당은 웃음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등장인물도 다채로웠다. 취발이, 말뚝이, 연잎, 눈끔적이, 신장수, 노장, 상좌, 먹중, 샌님, 포도부장, 소무, 미얄할미 등 조선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을 대변했다. 그들이 한바탕 어우러져 타락한 중, 술꾼의 난봉, 첩을 둘러싼 갈등, 양반의 위선 등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산대놀이는 전국 장시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며 지역마다 특색 있게 자리잡았다. 경상도 지역의 오광대놀이도 탈을 쓴 산대극이다. 통영오광대(국가무형문화재 제6), 고성오광대(국가무형문화재 제7), 동래들놀음(국가무형문화재 제18) 등은 대부분 장시를 배경으로 성립됐다. 산대놀이는 조선 사회의 민낯을 해학적으로 드러내고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간절한 소망을 담아냈다. 새로운 사회의식이 장시에서 싹트고 자라났다.

 

 

◇난장의 터줏대감, 남사당과 보부상

 

난장하면 남사당을 빼놓을 수 없다. 남사당은 유랑하는 예인 집단이었다. 꼭두쇠를 필두로 40~50명이 패거리를 이뤄 전국 장시를 누볐다. 신분이 비천해 평소에는 사람들이 꺼렸지만 놀이를 펼칠 때만큼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사당을 대표하는 묘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줄타기였다. 줄을 탈 때 어릿광대가 재담과 장단으로 흥미를 배가시켰다. 땅재주와 그릇 돌리기도 그들의 주종목이었다. 네 마당으로 간략히 구성된 탈놀음도 펼쳤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이 자랑하는 민속 인형극으로, 따로 관람료도 받았다. 우두머리 꼭두쇠가 직접 인형 덜미를 잡고 조종했다. 밤중에 포장을 치고 횃불을 비추면 장터는 꼭두각시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관객들은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 박첨지와 홍동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보부상도 난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보부상, 곧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는 이 장시 저 장시 돌아다니며 장사했다. 새 장시가 서면 보부상은 난장으로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행진놀이는 근사한 구경거리였다. 청사등롱을 앞세워 장정들이 대열을 짓고 나아갔다. 목화 솜뭉치를 양쪽에 단 패랭이와 작대기 끝에 뾰족한 쇠를 박은 물미장은 그들의 상징이었다. 각설이, 들병이, 노는 무당, 청나라 마술사가 뒤를 따랐다. 행진이 끝나면 공문제(公文祭)를 올리고 노래를 합창했다.

 

“가는 길에 만 냥이오. 오는 길에만 냥이오. 소금장수 등짐장수. 간 곳마다 짭짤하네. 만세만세 성수만세. 좌사우사 여러분들. 오고가는 험한 길에. 몸 건강하시옵고. 재수 대통하옵소서

 

 

◇친정엄마와 시집간 딸이 만나는 날

 

장시의 난장은 대개 명절에 벌어진다. 그 풍경은 명절마다 조금씩 다르다. 정월대보름에는 줄 난장, 즉 줄다리기가 널리 행해졌다. 굵은 줄을 제작해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겨뤘다. 칠석은 웃통 벗고 씨름하기 딱 좋은 시기다. 농사꾼들이 장터로 몰려나와 기량을 겨뤘다. 장정들이 힘을 쓰고 나면 목이 컬컬해지기 마련이다. 줄난장, 씨름 난장을 치를 때마다 양조장 술샘이 말랐다.

 

백중(음력 7 15)은 흔히 머슴날이라고 불렀다. 한해 농사에서 고된 일이 다 끝나고 수확만 남겨둘 시기라 주인은 이때 머슴의 노고를 치하했다. 새 옷도 좋고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두둑한 용돈이 최고다. 머슴들은 용돈을 받으면 구경거리를 찾아 삼삼오오 장터로 나갔다. 백중의 장시는 그래서머슴장이었다. 그들의 호주머니에 상인들이 손을 찔러넣었다. 남사당이고 광대패고 다 불러 모아 장시가 흥청거렸다. 송파장에서는 백중절에 7일 연속 놀이판을 이어가기도 했다.

 

추석에는 난장이 워낙 성대해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충청도 서천에서는 특별한 상봉 행사가 열렸다. 8 17일 남산에 장시를 열어 여자들끼리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시집간 부녀자의 친정 나들이가 쉽지 않았다. 친정과 시댁의 중간에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모녀가 한나절 나가서 얼굴보고 오는 정도가 위안이었다. 서천 남산장은 친정엄마와 시집간 딸, 자매와 어린시절 동무가 상봉하는 감동적인 난장이요, 여성들의 축제였다.

 

민속놀이 중 상당수는 조선 후기 장시에 연원을 두고 있다. 곳간에서 인심 나듯, 난장에서 흥과 신명이 솟아오른 것이다. 오늘날 유통 현장에서 문화 이벤트를 자주 여는 것도 다 역사가 있는 셈이다. 유통산업은 고객 요구에 맞춰 이로움과 즐거움을 나누며 성장한다. 난장판을 제대로 벌일 줄 알아야 사랑받고 오래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