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인생살이에 중요한 사람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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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일의 헤드헌터, 남인과 서인의 혼사
택서고망(擇揟顧望) 또는 택부고망(擇婦顧望)이라는 말이 있다.
사위나 며느리를 맞고자 간절히 고대하는 부모의 마음을 뜻한다. 사람 사는 집에 가장 큰일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며느리나 사위를 맞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싶다. ‘사윗감 하나 잘못 고르면 멸문지화를 당한다. ’요즘과 달리 조선 중기부터 당쟁이 극심해지면서 결혼을 잘못하면 집안이 풍비박산되기도 했다. 이때 시작된 게 ‘그들만의 리그’다.
당쟁이 본격화된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결혼도 당파와 당색을 떠날 수 없었다. 죽고 죽임을 당하는 서슬 퍼런 정치판이었기에 당파가 다르면 언제든 원수지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대부분 자신의 당파와 당색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아직도 염남 명문가에서는 노론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이렇게 해서 조선 시대 중기에는 이른바 배타적‘통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파와 당색이 다른 사윗감을 골라 가문을 구하고 동서 화합을 이룬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이자 학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다. 그는 경북 상주 청리면에서 태어나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유성룡에 이어 퇴계의 학맥을 잇는 수제자가 되었으며 홍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경세는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막내딸은 마흔을 넘겨 얻었다.
그는 딸이 스물이 다 되도록 결혼을 시키지 못할 만큼 신랑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당대 비주류인 자신의 당파(남인) 내에서는 마땅한 사윗감을 고르지 못했다. 막내딸 사랑이 지극했던 정경세는 그 배우자만큼은 당대의 최고 엘리트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자면 인재들이 몰린 당시 지배 세력인 서인(기호학파)에서 사윗감을 찾아야 했다. 이는 당시 퇴계학파의 수제자인 남인의 거목인 정경세로서는 일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속한 당파의 눈총을 받기 마련이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기회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이런 우려마저 날려버렸다.
그는 자신의 당파에서 사윗감을 고르다 마땅한 인재를 찾지 못하자 눈길을 충청 지역으로 돌렸다. 그 당시 교류가 깊었던 사계 김장생에게 넌지시 인재 추천을 부탁했다. 정경세보다 15세 많은 김장생은 기호학파 예학을, 정경세는 퇴계학파(영남학파)의 예학을 대표하고 있었다. 김장생의 문하에는 지역의 준재들로 붐볐다.
고심 끝에 정경세는 사윗감을 찾아 연산에 있는 김장생의 학당을 찾아갔다.
그 당시 학당에는 청년 3명이 공부하고 있었다.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초려 이유태가 그들이다. 훗날 세상을 주도하는 이들이다. 예고도 없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방문을 열었는데, 세 청년이 취한 태도는 각기 달랐다.
이유태는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 밖에까지 나와 정경세에게 큰절을 올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이 든 어른이니까 큰절부터 한 것이다.
송준길은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송시열은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들의 행동을 본 정경세는 김장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태는 너무 급하다. 송시열은 너무 과하다. 어른이 왔으면 일단 일어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송준길은 중용지도가 있다.” 결국 정경세는 송준길을 사위로 낙점했다. 그는 송준길이 당쟁이 극심한 시대에 필요한 ‘중용’의 도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퇴계와 서애의 제자로서 골수 남인 집안인 정경세 가문과 서인 명문인 송준길 가문 사이의 파격적 혼사는 이렇게 맺어졌다. 정경세의 눈은 정확했다. 영남의 남인 집안을 처가로 둔 송준길은 노론과 남인이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송시열과는 평생을 함께한 온화한 인물이었다.
장인이 죽고 처가가 어려워지자 상주로 내려와 1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다.
이때 송준길은 상주에 흥암서원을 건립했는데, 영남 노론의 중심 역할을 했다.
흥암서원은 정경세의 고택으로 가는 길에 있다. 요즘 당대의 핵심 인재 중에 이런 사윗감이 있을까 싶다. 노론의 영수를 사위로 둔 우복 정경세 가문은 다른 남인 가문에 비해 영남에서 정치적 외풍을 덜 받고 후손이 학문에 힘쓰며 가격(家格)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맥으로 세운 명문가, 케네디 가문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또는 가문 경영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케네디 가문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문도 없다.
가난한 농부의 삼 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존 케네디의 증조부는 1848년이던 22세에 ‘감자 대기근’을 피해 아일랜드에서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30대 초반에 생을 마쳤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들(패트릭 조셉 케네디)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되었지만 술장사를 하면서 억척스럽게 번 돈으로 이웃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 존경을 받으면서 주 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민 사회에서 신망을 얻은 패트릭 조셉은 주 의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가 존 케네디 대통령의 할아버지다. 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케네디가 처음으로 정치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훗날 사돈지간으로 하원의원과 보스턴 시장을 역임한 존 프랜시스 피츠제럴드 가문과 함께 아일랜드 이민자의 성공 모델이 되었다.
케네디 가문이 정치 가문이 된 데는 이웃에게 존중받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데서 출발한다. 세상사가 그렇듯 주위로부터의 신뢰가 리더의 첫째 덕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물 됨됨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정경세가 사윗감으로 중시한 것도 인물 됨됨이였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좋은 인간관계는 지식 교육 위주의 오늘날에 더욱 필요한 덕목으로, 삼성경제연구소와 <포브스>가 조사한 ‘좋은 CEO가 되기 위한 자질’ 설문에서도 인간관계 능력이 1위로 꼽힌다. 또 ‘감성지능’을 강조한 심리학과 리더십에 관한 강연자이자 작가인 미국의 대니얼 골먼은 21세기 성공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인간관계 패러다임을 사회지능인'SQ(Social Quotient)로 명명한다.
사회지능은 상대방의 감정과 의도를 읽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능력을 뜻한다. 사회지능의 핵심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과 이를 통해 형성하는 인적 네트워크에 달렸다. 케네디 가문이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 조셉 케네디는 당시 아일랜드인을 멸시하는 보스턴의 영국인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을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며 아들에게 하버드 대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당시 하버드대는 이민을 와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영국계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케네디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셉 패트릭을 시작으로 그의 네 자녀가 모두 하버드대에 들어갔다. 당시 보스턴의 아일랜드인은 가톨릭교도라서 기독교 계통인 하버드대 진학을 꺼렸지만, 케네디가는 종교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버드대와 인연을 맺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처음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다니다 형이 죽자 형의 꿈이었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형이 다닌 하버드대로 옮겼다. 그렇다면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 조셉이 자녀를 하버드대에 보낸 이유는 뭘까. 그는 아일랜드계 후손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영국인보다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일랜드계 가문은 영국에서 먼저 미국으로 이민와 부와 명성을 쌓은 보스턴의 영국계 명문가에게 늘 배척을 당했다. 수백 년간 아일랜드를 지배한 영국인은 아일랜드인을 열등 민족으로 무시하고는 했다. 이런 연유로 케네디 할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항상 1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이는 마치 기업이 추구하는 일류 경영, 일등 경영과 맥이 맞닿아 있다. 결국 케네디 할아버지의 예측은 적중했다. 아들인 조셉 패트릭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지 3년 만에 은행장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일랜드 출신이 은행장이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스턴의 은행 대부분은 영국계 출신이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은행장이 된 그는 영화 사업과 경마장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 30대에 이미 재벌 사업가가 될 수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당시 해군 차관보였던 루스벨트와 만날 수 있었다. 이게 인연이 되어 나중에 대통령 후보인 루스벨트의 후원회장을 지냈다.
더욱이 그는 보스턴에서 아일랜드계의 성공 모델이 되었고, 보스턴 시장의 딸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했다. 여기서 태어난 아기가 다름 아닌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인 존 케네디다. 케네디의 이름에 피츠제럴드가 들어간 것은 외가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민 온 지 3대, 110년 만에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케네디가의 신화는 이렇게 제작되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10대 정치 명문가 중 1위로 케네디가를 꼽았다. 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4명 등 많은 정치인을 배출함은 물론, 그들 모두 큰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이웃과 사회와의 신뢰 관계를 추구한 케네디 가문의 인재 중시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의 인재경영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마라. 쓴 사람은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말이다. 이병철은 이 말을 가슴속에 새기고 평생 인재 활용의 기본 철학으로 삼았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원점이 된 이병철 앞에 ‘자네가 일군 사업을 내가 관리만 했을 뿐이네’하며 3억 원이 든 궤짝을 내민 친구가 있었다.
또 인민군 치하에서 사장인 이병철을 인민군에게 들키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다락방에 숨겨두고 직접 피난비를 마련한 운전기사가 있었다.
이는 그가 운이 좋은 사람, 인덕이 많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인덕은 그가 스스로 노력하며 만든 것이었다.
이병철의 인재경영 원칙 중 하나가 ‘사람을 한번 썼으면 일단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 원칙을 일관되게 지켰다. 호암의 이런 ‘믿고 맡기기’ 철학은 후에 삼성그룹의 모토인 ‘인재경영’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인재경영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자신 스스로 고백하는 다음의 말에서도 사람을 찾고 키우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인재경영이 기업 흥망의 최대 열쇠라고 생각한 이병철의 경영철학을 증명하고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약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약 65%다. 반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따라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가는 힘이다.”
호암은 인재경영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사업의 승패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는데,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반반의 확률밖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인재를 구하는 일에서 힘겨움을 느낀다는 호암의 솔직한 토로다. 그는 1980년 전경련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가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는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호암은 성공하는 데 필요한 3가지 요체로, 운(運), 둔(鈍), 근(根)을 들었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나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즉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기다림의 시간에 중요한 것은 인재를 찾고 가꾸는 일일 것이다. 호암이 최고경영자의 자질로 ‘인격’을 꼽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김용란님이 주신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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