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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모과자점 (KimYoungMo) / 1982, 2007 대한민국 제과 명장

Paul Ahn 2019. 12. 9. 09:12

★김영모과자점 (KimYoungMo) / 1982, 2007 대한민국 제과 명장

(k-bread.com)

 

 

• ㈜파티시에 김영모

• 본부 :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138-1 금강하이테크밸리2 108

• 본점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391, 116 (서초동, 무지개종합상가).

 

김영모(1953 1 5 ~ )는 대한민국의 제빵 겸 요리 연구가이다.

17살 때, 경북 왜관에서 보조로 제과일을 시작하였고, 1982년에 서초동 김영모과자점을 개업하였다.

2007년에 노동부에서 심사된 대한민국 제과 명장으로 선정되었다.

 

 

배고파 빵집 취직한 불량 소년’, 100억대 빵집 CEO’로 우뚝서다

마에스트로 | 제과명장 김영모 김영모과자점 대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yryu1963&logNo=110111144031

 

1960년대 초, 한 초등학생이 학교 앞 빵집에 진열된 빵을 쳐다보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이혼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던 그는 빵을 보고 군침만 삼켰다. 눈요기로 배를 채웠다.

 

17살이 되던 1970년 자립을 결심했다. 학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 잠잘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일까. 불현듯 빵집이 떠올랐다. “빵은 많이 먹을 수 있겠지.” 빵집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한번 맛보면 다른 제과점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빵을 만들고 있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제과명장에 선정됐고, 지난 3월에는 제10대 대한민국명장회 회장에 취임했다. 김영모(58) 김영모과자점 대표의 얘기다. 

 

지난 5 16,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도곡동의 김영모과자점 도곡타워점을 찾았다. 인근에는 호텔 체인 제과점과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있었다. 오후 2, 과자점 앞 도로는 빵을 사기 위해 잠깐 세워둔 자동차가 줄줄이 서있었다. 과자점 안은 젊은 부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손님들로 붐볐다. 손님 중에는 멀리 이사를 가서도 찾아오는 마니아도 있다고.

 

김영모 회장은 김영모과자점의 빵은 천연 발효시켜 유산균이 풍부하다 청정 유기농 밀가루와 천일염, 비정제 천연설탕 등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몸에 좋고, 맛은 더 좋은 빵을 만드는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김영모과자점은 1982년 서울 서초동 20(6) 가게에 출발, 서초본점, 도곡타워점, 역삼럭키아파트점, 반포점 등 4개의 매장과 샌드위치 카페인 페르 에 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성남에는 쿠키, 초콜릿 등 보존기간이 긴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전체 직원은 180명이 넘고, 매출은 100억원에 달한다.

 

바로 구워야 하는 빵류는 각 매장에서 직접 만든다. 도곡타워점 2층에 있는 매장의 3배 정도 크기인 작업장에서는 30여명의 제빵사들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빵은 3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기도 하는데 그걸 알면서 어떻게 한 번에 구워 팔겠냐고 했다.

 

2층 작업장에서 제빵사들이 빵을 만드는 모습은 매장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에 그대로 나타났다. 빵 만드는 사람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인생의 풍부한 경험에서 빵맛 나와

그에게 빵은 인생 그 자체다. 좋은 빵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은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라고 그는 말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고난과 역경이 성공의 원동력이라는 얘기다.

 

지금은 한국 제과업계의 최고 명장이지만 그의 성장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작은아버지, 이모집 등을 오가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도 고팠고, 마음은 더 시렸다. 고등학생 때는 폭행사건에 휘말려 소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빵집에 취직한 것은 빵 만드는 데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먹고 자야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빵집에 취직하면 빵은 많이 먹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취직을 하니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어요. 빵을 먹다가 한 번 걸리면 흠씬 두들겨 맞고, 두 번 걸리면 쫓겨났거든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빵은 크림빵과 곰보빵이다. 당시 크림빵 하나를 훔쳐 재래식 화장실에서 몰래 먹었을 때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지방의 작은 제과점을 전전하던 그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1973. 운 좋게 대형 제과점에 취직했지만 그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그땐 부모님 탓을 많이 했어요. 명절이면 갈 곳이 없어 혼자 제과점 다락방에서 보냈어요. , 담배를 엄청 했죠. 돈은 한 푼도 모으지 못했고, 건강까지 잃었죠.”

 

마침 입영영장까지 나왔다. 앞날이 아득했다. 3년이면 손의 감각은 떨어질 대로 떨어질 것이고, 기술도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군대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내무반에서 굴러다니던 한 권의 책이 그를 바꿨다.

 

“해질 대로 해진 책이었는데, 겉표지가 떨어져 나가 무슨 책인 줄 몰랐죠. 나중에 알고 보니 카네기의 <행복론>이라는 책이었어요. ‘걱정으로부터 자유라는 단락인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받아들여라는 내용이었죠. 그동안 좌절만 한 지난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됐어요. 그때 술과 담배를 끊었어요.”

 

1977 6월 제대한 이후 그는 새로운 삶을 살았다. 아니 악착같이 살았다. 토큰 2개만으로 하루를 버텼다. 모두가 퇴근한 뒤 혼자 남아 연습에 매진했다.

 

그가 제빵에 소질이 있다고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때는 철저히 도제식 교육이었어요. 그래도 배합비 같은 아주 중요한 것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죠. 어깨 너머로 겨우 배우고, 숨어서 연습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공장장이 불만을 품고 안 나온 거예요. 빵집에 케이크는 하나도 없고, 할 수 없으니깐 저보고 만들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날 제가 만든 케이크가 전부 팔렸어요. , 나에게 소질이 있구나 싶었죠.”

 

삼선교 나폴레옹제과점과 무교동 보리수제과점에서 일하던 그는 1982년 서울 서초동에 그의 이름을 딴 김영모과자점을 열었다. 그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3년 동안에는 하루 3시간만 잠을 자며 좋은 빵 만들기에 매달렸다. 계절의 변화 등에 맞춰 신제품을 빠르게 내놨다. 서서히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집에서 먹을 땐 저희 빵을 사가지만, 선물을 할 때는 바로 옆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을 사가더군요. ‘선물은 이름 있는 것으로 하는 반응이었죠. 그래서 브랜드 파워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포장 상자 안에 브랜드 소개서와 제품 설명서를 넣기 시작했어요. 입소문이 서서히 나면서 4년 만에 6평 점포를 2배로 늘릴 수 있었지요.”

 

김영모과자점의 대명사로 불리는 도곡타워점을 오픈한 것은 2000.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그곳에 점포를 내기로 결심했다.

 

“시내에는 점포를 못 열었어요. 제가 매장을 연다고 하면 그 주변에서 빵집을 하던 선후배들이 득달같이 달려왔어요. 오지 말라고, 오면 자기들 죽는다고.”

 

처음에는 크게 적자만 보지 말고 주변이 개발될 때까지 버텨보자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도곡타워점은 3개월 만에 흑자를 실현했다. 양재천 건너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물려왔기 때문이다. 도곡타워점은 7개월 만에 현재의 매장으로 이전하면서 3배나 넓어졌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와 제품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우리밀과 수수, 검정 쌀, 보리, 율무 등 한국적인 소재로 빵과 과자를 만들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빤한 재료나 조리법으로는 남들과 다른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없어요. 하지만 그전에 갖춰야 할 것이 바로 기본입니다. 정량과 정석대로 만들지 않으면 맛있는 빵은커녕 몸에 해로운 빵을 만들 수도 있어요. 빵에 대한 역사를 꿰뚫고 있어야 창의적인 제품도 만들 수 있죠.”

 

과자점을 오픈한 이후 매년 2`~3차례 해외 연수를 통해 빵의 역사를 익히며,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국내 최초로 천연 발효법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1996년 독일에 연수를 갔는데 거긴 이미 천연발효법이 일상화돼 있더군요. 균을 공수해왔죠. 그런데 3개월 만에 부패하더군요. 프랑스나 미국에서 가져온 균도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발효법을 찾아야 했어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죠. 천연발효법을 완성시키기까지 8년이 걸렸어요.”

 

그는 해외연수에서 배운 노하우나 대표 제품의 레시피를 저술활동 등을 통해 주기적으로 공개한다. “주기적으로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어요. 성공에 도취해 제자리에 안주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다른 제과점에서 우리 레시피로 빵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긴장도 하고, 공개한 기술이 돌고 돌면서 부메랑처럼 더욱 풍부해져 되돌아오기도 했어요.”

 

“두 아들이 가업 이어

김영모과자점의 로고에는 두 명의 제빵사가 나란히 서있는 이미지 아래 김영모&피스(KIM YOUNGMO&fils)라고 적혀있다. 피스(fils)는 프랑스어로 아들이라는 뜻이다. 현재 장남 재훈씨와 차남 영훈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영훈씨(31)는 재료 구매와 창고 관리, 제품 출고 등 말단 사원 업무부터 시작해 현재 기획, 마케팅, 점포관리 등을 담당하며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빵사의 길을 선택한 재훈씨(30)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다. 재훈씨는 2003년 프랑스 제과월드컵에서 개인상을, 스위스 국제기능올림픽 제과부문 동메달을 수상하는 등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는 1년에 두세 차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둘째가 이제는 자신에게 대들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을 대견해했다.

 

“가업을 이어주길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억지로 시킬 순 없잖아요. 진로는 자신들이 결정했어요. 어쨌든 두 아들이 제과·제빵업에 뛰어들게 돼 기쁩니다. 가업 승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저는 뒤로 물러나 후배 양성에 나설 생각입니다.”

 

이미 그는 경기도 하남에 교육시설을 지을 부지도 마련해둔 상태다.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명장이라는 칭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제10대 대한민국명장회 회장에 취임했다. 명장은 한 직종에 15년 이상 종사하면서 기술 발전에 공헌한 기능인을 말한다. 고용노동부는 매년 금속·도자기·목공예 등 공예분야와 기계·조선·건축 등 산업분야, 제과·미용·세탁 등 서비스 분야 267개 직종에서 명장을 선정한다. 현재 496명의 명장이 등록돼 있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하루 3시간 이상 10년을 투자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명장이 되려면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명장들이 한 분야에서 40~50년 이상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명장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해 명장뿐만 아니라 기능인에 대한 사회적인 위상을 끌어올리고 외국인들에게도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이와 함께 명장들이 수십 년간 쌓은 국보급 기술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데 매진하고 있다. 전국의 마이스터고·폴리텍대학 등과 후진양성을 위한 MOU를 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론이 아닌 후배들이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칠 예정입니다. 머리에 들어 있는 좋은 생각을 손으로 빚어내는 것이 기술이고 기능이기 때문이죠.”

 

요즘도 앞치마를 두르고 빵을 만든다는 그의 꿈은 천년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150년 제빵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 100년 된 과자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는 그는 우리도 이제 전통을 이어가는 장수기업이 나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유럽이나 일본에는 600~700년 된 과자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과자점에 들어가면 느낌이 다릅니다. 코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냄새가 있어요. 무척 부러웠어요. 유럽과 일본의 수백 년 된 점포에 못지않은 천년 기업을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