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좋은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Paul Ahn 2020. 6. 15. 11:22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8700057

 

•생애 : 마케도니아 BC 356 ~ BC 323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켰으며,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문명을 융합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자 노력했으며 동·서양 융화정책으로 결혼정책 등을 펴나갔다. BC 323년 열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그의 사후 페르시아는 격렬한 혈투 끝에 삼분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2세와 왕비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살 때 사나운 명마를 단숨에 길들일 정도로 용맹했고, 열여섯 살 때까지 그리스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사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무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으로 탁월한 학문을 겸비했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으며 자랐다.

 

알렉산드로스 왕자를 가르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아민타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마케도니아군의 군력을 확충하고 여기에 그리스군의 전술을 도입하여 전력과 전술에서 완벽한 최강의 군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하러 떠나자 알렉산드로스는 왕국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마케도니아 인들의 지배에 저항하여 트라키아의 마에디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에디 족의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하고 그들을 영토에서 내쫓은 후 그 자리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부자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의 대부분을 정복한 다음 코린토스에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반페르시아 연합이 결성된 것처럼 '그리스 연합(Hellenic Alliance)'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스파르타만이 제외되었다. 필리포스는 이 연합의 이름을 헤게몬(Hegemon, '최고 사령관'이라는 뜻)이라고 지은 후 페르시아 제국에 복수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펠라로 돌아온 후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Cleopatra Eurydice)와 재혼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자 필리포스의 장수 중 하나였던 아탈로스는 이 결혼에서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기대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묘사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서 그녀의 삼촌 아탈로스는 술을 마시며 자신의 조카딸이 필리포스보다 훨씬 젊으니 이제 그녀에게서 마케도니아 인들이 늘 신에게 기도하던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해서 컵을 그의 머리 위로 던지며 "그럼 나는 사생아란 말이냐!"라고 외쳤다. 필리포스는 아탈로스의 편을 들어 칼을 뽑아들고 아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술에 취한 탓인지 지나치게 화가 난 탓인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걸 보라. 유럽을 지나 아시아까지 정복할 준비를 하는 사내가 겨우 자리를 지나가다가 넘어졌구나"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빠져나가 일리리아에서 왕실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6개월 후 가족의 친구인 코린트인 데마라토스가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그를 돌아오게 해주었다.

 

•기원전 336, 에게 근방에서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필리포스는 자신의 경비대장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파우사니아스는 도망치려 했으나 포도 줄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인 페르디카스와 레오나토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관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그는 평생 왕위를 노리고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게 된다.

필리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배지의 주민들이 데모스테네스의 주도하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평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살아 있을 때부터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현장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변의 소소한 반란들이 평정되자 아버지인 필리포스 때부터 준비해오던 페르시아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제국 침략의 대서막이 올랐다.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성립된 당시로서는 최대의 제국이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하고 있다 해도 마케도니아 같은 작은 국가가 상대하기에는 여전히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씩 페르시아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그는 소아시아를 경유하여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를 정복한 후 가자를 함락시켰고, 곧이어 이집트의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아르벨라에서의 전투로 페르시아군에게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로 진격하여 다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계자를 죽이고 페르시아 정복을 완성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끝났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사들을 다독여가며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했다. 인도에서도 연전연승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인도 동부 점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힌두쿠시 산맥을 겨우 넘은 군사들이 더 이상의 전투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회군했다.

 

원정을 계속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는 스스로를 아몬 신()의 아들이며 파라오라 칭하고 신흥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그는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그는 서양의 마케도니아-그리스의 문화와 동방의 페르시아-인도 문화를 한데 아우른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아울러 두 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제국을 꿈꾸며 동·서양 융화정책을 펴나갔다. 그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했고, 뒤이어 마케도니아 남성들이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이든 왕실에서든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원전 323, 갑자기 열병에 걸려 신음하던 젊은 대왕은 자리에 누운 지 불과 열흘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였기에 후계자를 두었을 리 없었다. 그가 그토록 공을 들여 세운 거대한 제국은 그의 사후 주인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왕위를 두고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도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해 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에 '가장 힘센 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수많은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온갖 장수들이 서로 자신이 알렉산드로스가 말한 그 '힘센 자'임을 자칭했기 때문이었다. 이 투쟁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직계 가족들은 모두 주살되었고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은 결국 삼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