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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Patagonia) / 미국 1973, 아웃도어

Paul Ahn 2020. 8. 30. 14:18

★파타고니아(Patagonia)

Patagonia Clothing & Gear

 

 

설립 : 1973

설립자 : Yvon Chouinard

본부 : Ventura, California, U.S.

•직원수 : 1,000 (2017)

취급상품 : Outdoor clothing

 

뛰어난 암벽 등반가인 이본 추이나르(Yvon Chouinard) 1957년 그의 회사인 Chouinard 장비를 통해 수작업으로 단조된 등산 장비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65년까지 혼자 장비를 판매하던 중 톰 프로스트와 협력하여 제품을 개선하고 증가하는 수급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970, 추이나르는 스코틀랜드에서 등반 중 입은 럭비 셔츠를 얻었는데, 그 이유는 목걸이가 등반 슬링이 목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파타고니아 최초의 상점인 그레이트 퍼시픽 아이언 웍스는 1973년 추이나드의 대장장이 가게 근처 벤투라의 산타 클라라 스트리트에 있는 홉슨 육류 포장 공장에 문을 열었습니다.

 

 

파타고니아 서울가로수길직영점

http://www.patagonia.co.kr/shop/main/index.php

 

•점포 : 서울가로수길직영점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541-4

 

 

파타고니아 제품을 사면 안 되는 이유

https://news.joins.com/article/20988131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PATAGONIA)는 자신들이 만드는 옷에서 나온 포름알데히드로 인해 직원들이 하나 둘 고통을 호소하면서 환경보호에 앞장서게 됐다. 포브스가 만난 빈센트 스탠리 철학담당 임원은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자연에서 얻는 것보다 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 적다고 말했다. 파타고니아가우리 제품을 사지 마세요라고 광고한 이유다.

 

“그동안은 비정상적인 성장세였다. 지금이 정상이다.” 미국 아웃도어 2위 기업인 파타고니아 철학담당 임원인 빈센트 스탠리(Vincent Stanley)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던 한국 아웃도어 시장에 대해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올해 7월 파타고니아는 한국 시장에 직진출했다. 이전까지는 네오미오(조용노 대표)와 합작법인 형태로 국내 비즈니스를 진행해 왔다. 그만큼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 직진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첫 본사 임원이기도 한 빈센트 스탠리를 서울 강남구 파타고니아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빈센트 스탠리 파타고니아 철학담당 임원에 묻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주춤하다. 이런 상황에서 파타고니아가 한국 시장에 직진출한 배경이 궁금하다.

 

한국은 해외 시장은 다르다. 미국, 유럽은 비록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꾸준히 성장세다. 알다시피 중국은 10%넘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아웃도어 시장도 성장세가 멈춘 것이 아니라 정상화됐다고 본다. 2013년 한국에 진출한 파타고니아 역시 꾸준히 매출이 늘고 있다. 다만 파타고니아의 관심은 매출 증가가 아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환경 보호를 위해 사업한다는 우리의 철학을 이어가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 충실할 것이다.

 

 

◇자켓 사지 말라는 문구는 영리한 마케팅?

 

인터뷰에 동석했던 파타고니아코리아 담당자는그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국내 아웃도어 시장에 난립했던 브랜드가 조금씩 정리되는 상황이다. 여전히 한국 아웃도어 시장은 성장 중이라고 덧붙였다.

 

Don’t Buy This Jacket’ 문구는 파타고니아를 설명하는 유명한 문구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나.

 

원래는 오래 입어서 더이상 입기 힘든 옷을 가져오면 재활용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옷을 오래 입는 것이 제품을 재활용하는 것만큼 중요하니까 말이다. 제품을 오래 입어서 해지면 수선해서 입는 것도 중요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자연에서 얻는 것보다 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 적다.

 

이런 생각들을 어떻게 소비자와 소통할 지 고민하다 생각해 낸 문구가 ‘Don’t Buy This Jacket’. 워낙 문구가 파격적이라 이사회 임원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2011 11 25일 블랙프라이데이 아침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개제했다. 사실 1994년에도필요없는 옷을 사지 말자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자켓을 사지 말라는 문구는 캠페인이 아니라영리한 마케팅이란 주장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그 광고를 개제한 이후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경각심도 높아졌지만 우리의 매출도 올라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광고 카피는 환경 담당임원이 작성했고 카피 아래의 문구. 그러니까 광고에 실린 제품(R2 자켓) 무게의 24배에 달하는 이산화탄소가 제품 생산과정에서 배출된다거나 옷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물이 소비되는 지 등에 관한 글은 기업 철학을 담당하는 내가 작성했다. 심지어 우리 파타고니아 카탈로그는 마케터가 아닌 기자 출신을 영입해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빈센트 스탠리는 파타고니아를 설립한 이본 쉬나드의 조카이자 초창기 마케팅을 전담했다. 이본 쉬나드와 함께 책임기업으로서 지속가능한 경영철학을 담은리스판서블컴퍼니 파타고니아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번 방한 역시 파타고니아코리아 임직원을 만나 파타고니아의 기업 철학을 직접 설명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파타고니아가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

우리 직원은 대부분 서퍼나 클라이머다. 환경에 대한 관심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1986년에 환경보호를 위한 단체를 만들고 매출의 1%를 풀뿌리 환경단체에 지원한 것이다. (수익이 아닌 매출의 1%를 타기관에 기부하는 예는 흔치 않다.) 그런데 1988, 보스턴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자꾸 아프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면제품을 보관한 지하 창고에서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됐다. 이를 계기로 회사에선 면 제품에 얼마나 많은 화학물질이 나오는지 연구하게 됐고 1996부터 모든 제품에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한 목화에서 나온 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작 비용에 부담이 됐을 텐데, 조직의 반발은 없었나.

제품 생산라인도 바꿔야 했고 농장, 공장 역시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해야 하니 어려운 과정이었다. 가장 큰 난제는 구성원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유기농 면으로 바꾸려면 제품 하나당 5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낯선 방식엔 누구나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직원을 버스에 태우고 기존 목화재배 농장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린 직원은 농약 냄새가 진동하는 밭에서 곤충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목화 기름으로 상당한 돈을 번다는 농장 직원의 말에 우리 직원들은 기겁을 했다. 직원들을 태우곤 다시 유기농 목화재배 농장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자 자연의 냄새에 벌과 곤충들이 밭에 가득한 모습을 보곤 그제서야 직원들이왜 제품 원료를 바꿔야 하는지를 공감했다.

 

인위적인 수요 창출보다 자연적인 성장 기대

빈센트 스탠리는 국내 시장에 직진출한 이유를 묻자장기적으로 보면 기존의 합작법인 보단 우리가 직접 시장을 책임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마케팅에 돈을 쓰기 보다는 구전으로 제품의 진정한 가치가 전달되도록 하고 인위적인 수요 창출보단 자연적인 성장을 기다리면 시장은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시장이 좋아질거라고 확신하나.

 

갈수록 사람들이 점차 유기농 음식에 관심을 가진다.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SPA를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이라면 패스트 패션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저임금, 환경 파괴와 같은 일을 알아야 한다. 자연스레 파타고니아를 알게 될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에너지바, 연어 가공식품 등 유기농 음식 사업을 시작했다.)

 

[출처: 중앙일보] 파타고니아 제품을 사면 안되는 이유

2016.12.11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사진 우상조 기자

 

 

대장장이 등반가

 

파타고니아 창립자 이본 쉬나드는 1953, 사냥을 위해 독수리와 팔콘을 훈련시키는 남부 캘리포티나 팔콘 클럽에서 활동하던 14살 때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젊은 리더였던 돈 프렌티스는 어린 친구들에게 팔콘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하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본과 친구들은 샌 페르나도 계곡 서쪽 끝으로 향하는 열차에 뛰어 올라 스토니 포인트의 사암 절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본은 등반과 하강법을 배웠습니다.

 

쉬나드는 매년 겨울 주말마다 스토니 포인트에 있는 절벽에 매달려 지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팜 스프링 윗쪽의 타키츠 바위에서 지냈습니다. 그 곳에서 이본은 TM 허버트, 로얄 로빈슨, 톰 프로스트가 속한 시에라 클럽의 젊은 등반가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벽 등반을 훈련하기 위해 타키츠에서 요세미티로 향했습니다.

 

당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피톤은 연철로 만들었고, 한 번 쓰면 바위에 버려두고 와야 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등반해야 하는 요세미티에서는 피톤이 수 백 개 필요했습니다.

 

이본은 강철 피톤을 만든 적 있던 존 살라테와 만난 뒤 스스로 장비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1957, 이본은 고물상에 가서 석탄을 쓰는 화덕과 무게가 62kg 나가는 모루, 집게와 망치를 사서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쉬나드는 곡식을 자르는 기계의 날로 첫 피톤을 만들었고, T.M. 허버트와 함께 로스트 애로우 침니, 요세미티 센티넬 락 북벽을 등반하면서 시험했습니다. 쉬나드가 만든 피톤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은 쉬나드의 크롬-몰리브덴 철 피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쉬나드는 이게 사업의 시작이라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쇠를 달궈 한 시간에 피톤 두 개를 만들었고, 한 개 당 1.5 달러에 팔았습니다.

 

쉬나드는 버뱅크에 있는 부모님 집 뒷마당에 작은 창고를 지었습니다. 쉬나드가 쓰던 도구들은 들고 다닐 수 있어서, 자동차 뒷 자리에 싣고 빅 써에서 샌 디에고에 이르는 캘리포니아 해변을 여행하면서 써핑을 했습니다. 써핑을 마친 뒤 해변에 모루를 내려 놓고 망치질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쉬나드는 겨울에만 피톤을 만들었습니다. 4월에서 6월까지는 요세미티의 거벽을 등반하며 지냈고, 뜨거운 여름에는 와이오밍, 캐나다, 알프스의 고산을 올랐고, 가을에는 다시 요세미티로 돌아와 눈이 내리는 11월까지 등반을 계속했습니다. 쉬나드는 차 뒷 칸에서 장비를 팔았습니다.

 

하지만 이윤은 매우 적었습니다. 하루에 50센트~1달러만 쓰면서 일주일을 지냈습니다. 어느 여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찌그러진 통조림을 싼 가격에 파는 가게에서 고양이 먹이로 쓰는 참치 통조림 두 개를 샀습니다. 오트밀과 감자도 먹고, 다람쥐와 고슴도치를 잡아 먹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에서 쉬나드와 친구들은 밸리 콩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캠프에 2주 동안만 머물 수 있다는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경비원들을 피해 바위 사이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들은 돈이 전혀 되지 않는 바위와 얼음 등반을 한다는데 자부심을 가진 반항아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영웅은 존 뮈어, 쏘로우, 에머슨, 가스통 레뷔파, 리카르도 캐신, 헤르만 불이었습니다.

 

 

쉬나드 장비 회사

 

쉬나드가 만든 장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더 이상 손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쉬나드는 기계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1965년에 쉬나드는 등반가이자 항공 엔지니어였던 톰 프로스트와 장비 디자인을 날카롭고 아름답게 다듬었습니다. 프로스트와 쉬나드는 9년 동안 함께 일하며 거의 모든 등반 장비를 새로 디자인하고, 더욱 튼튼하고 가볍고 단순하고, 기능을 뛰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등반을 하면서 장비 개선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들의 디자인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행기 조종사였던 생 떽쥐베리의완벽함은 어떤 것을 더 이상 덧붙일 필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의 몸처럼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상태이다.”말을 근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1970년에 쉬나드 장비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등반 장비 회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든 장비가 바위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는 악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같은 바위에 피톤을 박고 빼는 일이 되풀이 되었고, 바위는 흉하게 망가졌습니다.

 

엘 캐피탄 봉우리의 아주 깨끗했던 노즈 루트가 형편없이 망가진 걸 본 후 쉬나드와 프로스트는 피톤 제작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일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파타고니아의 첫번째 걸음이었습니다. 피톤이 사업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위험이 컸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대신 쓸 수 있는 장비가 있었습니다. 알루미늄 초크는 크랙에 박지 않고 걸 수 있었습니다. 쉬나드는 1972년에 만든 카달로그에 알루미늄 초크를 처음 소개했습니다.

 

이 카달로그는 피톤 때문에 벌어진 자연 파괴에 대한 이본 쉬나드의 글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 14페이지에 걸쳐 초크 사용법에 대한 덕 로빈슨의 글이 이어집니다.

 

“’깨끗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트와 런너(등반에 사용하는 질긴 끈)만 사용하는 등반은 깨끗한 클라이밍입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바위를 우리 다음에 오를 등반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바위에 망치로 피톤을 박고 빼는 일은 바위에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 다음에 오를 등반가들의 자연스러운 경험을 망가뜨립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등반하는 동안 등반가는 바위에 흔적을 거의 남겨서는 안됩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깨끗한 등반은 바위를 보존하는 등반입니다. 자연에 더욱 가까워지는 등반입니다.”

 

카달로그를 우편 발송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피톤 판매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쵸크가 만드는 속도보다 빨리 팔려나갔습니다. 쉬나드 장비 회사의 얇은 함석판 작업장에서는 망치질과 드릴로 구멍 뚫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등반가를 위한 옷

 

1960년대 후반 사람들은 야외 활동에서 밝고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회색 티와 바지를활동복으로 주로 입었습니다. 요세미티를 등반하는 사람들은 발목 부분을 잘라낸 면 바지와 중고 가게에서 산 흰색 셔츠를 입었습니다.

 

1970년 겨울, 스코트랜드로 등반 여행을 떠난 쉬나드는 등반할 때 입으려고 럭비 셔츠를 사왔습니다. 럭비 셔츠는 질기고 튼튼해서 바위에 비벼도 괜찮았고, 목 부분 칼라는 장비를 매단 슬링 때문에 목이 쓸리는 것을 막아 주었습니다. 파란색, 붉은색 줄무늬가 두 개씩 있었고 가슴 부분에는 노란색 줄무늬가 있었습니다. 쉬나드가 이 옷을 입고 다니자 등반하는 친구들이 어디서 이 옷을 구할 수 있는 물어보았습니다.

 

영국 엄브로에서 주문한 럭비 셔츠들은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갔습니다. 재고가 다 떨어져서 뉴질랜드와 아르헨티나에도 주문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정장을 팔 때 우리는 미국에 마이너 패션을 소개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옷 사업이 마진이 적은 장비 사업을 도울 방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72년에 스코트랜드에서 수입한 폴리우레탄 비옷과 비박용 커버, 오스트리아에서 주문한 울 장갑과 벙어리 장갑, 볼더에서 손으로 짠 모자를 팔았습니다.

 

옷 사업이 번창하면서 의류 부분에 붙일 새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쉬나드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쉬나드는 이미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쉬나드라는 이름을 반대했습니다.

 

첫째, 옷 때문에 쉬나드라는 브랜드가 가진 장비 회사의 이미지를 흩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우리 옷을 등반에 한정 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파타고니아를 팀부쿠나 샹그릴라처럼 지도에 없는 멀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파타고니아를빙하가 지나가며 남긴 아름다운 풍경, 봉우리마다 바람이 울부짖는 곳, 카우초와 콘돌이 사는 곳이라고 카달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고, 전 세계 언어로 모두 발음할 수 있었습니다.

 

 

캐필린과 신칠라 : 겹쳐 입기 이야기

 

모든 산악인들이 땀이 잘 마르지 않는 면, , 다운을 겹쳐 입는 방식으로 옷을 입을 때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북대서양 어부들이 주로 입던 합성 소재 파일 스웨터가 산에서도 이상적인 옷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땀이 잘 마르고 가볍고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테스트를 하면서 원단을 찾았지만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본 쉬나드의 아내 멜린다는 인조 모피 코트 산업이 붕괴한 후 파산에서 막 벗어난 몰든 밀이라는 공장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샘플 제품을 만들어서 고산 환경에서 시험했습니다.

 

문제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두껍고, 크기가 컸고, 꼬불꼬불한 섬유 때문에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쉘 자켓 속에 입으면 놀랍도록 따뜻했습니다. 물을 잘 흡수했지만 금방 말라서, 겹쳐 입는 옷 개수를 줄여 줬습니다.

 

빨리 마르는 보온 제품을 면 베이스레이어 위에 겹쳐 입는 것은 좋지 않았습니다. 면 베이스레이어는 땀을 흡수한 뒤 얼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 파타고니아는 수분을 거의 흡수하지 않는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보온 내복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폴리프로필렌은 항해용 로프와 같이 물에 뜨는 물건을 만들 때 쓰던 소재였습니다. 의류 산업에서는 1회용 종이 기저귀 안감으로 처음 쓰였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아웃도어 업계 최초로 겹쳐 입기 개념을 카탈로그에 글로 실어 알렸습니다. 베이스레이어에서 땀을 흡수하고, 체온 유지를 위해 미드레이어를 보온 자켓으로 덧입고,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쉘 자켓을 입는 방식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에서 면과 울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은 줄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무늬 폴리프로필렌 내복 위에 빛 바랜 털 스웨터를 입었습니다.

폴리프로필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녹는점이 낮아서 가정에서 쓰는 건조기보다 온도가 높은 세탁소 건조기에서 녹기도 했습니다. 또한 물을 잘 빨아들이지 않아서 세탁하기 어려웠고,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고 수분 흡수 기능이 원단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고 옷감을 짜는 과정에서 사용한 기름 때문에 생겼기 때문에, 스무 번 이상 빨면 기능이 떨어졌습니다.

 

털과 폴리프로필렌은 성공했지만 우리는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고 원단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털 개선은 조금씩 이루어졌습니다. 파타고니아는 말덴 사와 함께 털이 거의 없는 부드러운 합성 울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신칠라라고 이름 붙인 이 원단은 부드럽고 가볍고 따뜻했습니다.

 

신칠라를 만들면서 우리는 사업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말덴에 투자한 비용으로 많은 혁신을 이루어 내었지만 우리가 직접 연구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원단을 절대 개발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때부터 파타고니아는 연구 개발과 디자인에 많은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원단 실험실, 원단 개발부는 회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공장들은 파타고니아가 그들을 밀어 부치고 도우면, 개발된 원단이 더 나아질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폴리프로필렌을 대체할 원단은 오랜 개발 과정 끝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체 원단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1984년에 쉬나드는 시카고에서 열린 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잔디 얼룩이 잘 빠지는 폴리에스터 축구복을 봤습니다. 폴리프로필렌과 비슷한 폴리에스터는 플라스틱을 녹여서 사출한 실을 섬유처럼 얇게 엮은 뒤 염색한 원단입니다. 플라스틱 섬유는 매우 부드럽지만 물에 대한 저항성이 워낙 높아서 비누와 물을 흡수하지 않아 세탁이 어렵습니다.

 

축구복을 만든 밀리켄 회사는 원단 표면에 홈을 파서 원단 표면이 물을 흡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홈은 땀을 흡수해서 바깥으로 내보내고 기능은 영원히 지속되었습니다. 쉬나느는 이 원단이 내복에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폴리에스터는 폴리프로필렌보다 녹는점도 높아서 건조기에서 녹지 않았습니다.

 

1985년 가을 파타고니아는 폴리프로필렌을 모두 새로운 캐필린 폴리에스터로 바꿨습니다. 1972년에 초크를 처음 소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업 위험이 컸습니다. 같은 시즌에 새로운 신칠라 플리스 제품도 소개했습니다. 이 기간에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든 제품은 매출의 70%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파타고니아의 핵심 고객들은 캐필린과 신칠라의 장점을 빠르게 깨달았고, 판매량은 급증했습니다.

 

 

색깔을 입히다

 

1980년대 초반 파타고니아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일궜습니다. 당시 야외 활동 제품은 황갈색, 짙은 황록색이었고 가장 화려한 색깔이 연한 파랑이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제품에 원색을 입혔습니다. 우리는 코발트, 청색, 선명한 빨강, 알로에, 청록색, 커피색을 소개했습니다. 파타고니아 옷은 튼튼할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 갔습니다.

 

파타고니아 상표는 야외 활동을 넘어 일상 생활에서 입을 옷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에게 까지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는 영업 활동과 카달로그에 극한 활동에서 겹쳐 입기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장 잘팔리는 제품은 배기스 반바지나 쉘드 신칠라 스포츠 자켓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제품이었습니다.

 

파타고니아 사업은 가파르게 성장했습니다. 경제 잡지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개인 회사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급격한 성장은 1991년에 멈췄습니다. 불황이 찾아오자 판매랑은 급격히 줄었으며, 자금을 대출해 준 은행들도 난리를 쳤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파타고니아는 비용을 대폭 줄였고 투자를 중단했습니다.

 

직원의 20%를 해고했습니다. 해고된 직원 대부분은 친구들이거나 친구의 친구들이었습니다. 회사로서의 독립성을 거의 잃어버릴 번 했습니다. 이 일은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파타고니아는 성장과 부채 비율을 적당한 속도로 유지해 왔습니다.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파타고니아는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나 1991년의 불경기 때도 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기도 했습니다. 점심 시간에는 달리기를 하거나 파도를 타러 나갔고, 사무실 뒤 공터에서 배구를 했습니다. 직원들의 스키와 등반 여행을 지원했습니다. 직원들은 금요일 저녁에 시에라 지역으로 운전해서 야외 활동을 즐긴 뒤 월요일에 지쳤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출근했습니다.

 

1984년부터 파타고니아는 칸막이를 없애고 사무실을 열린 공간으로 바꿨습니다. 건강한 채소와 과일, 유기농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직원 식당도 문을 열었습니다. 또한 멜린다 쉬나드의 제안에 따라 당시 미국에서 150곳만 존재했던(현재는 3,000곳 이상) 회사 내 어린이집도 문을 열었습니다.

 

회사 마당에서 뛰어 놀고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는 아이들은 회사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일하는 부모들과 사정이 있는 직원들을 위해 근무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했고, 일자리 나누기를 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완고하고 창의성을 제한하는 전통적인 기업 문화를 뒤엎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파타고니아는 우리만의 가치와 전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초기 환경 보호 윤리

 

파타고니아는 뚜렷하게 증가하는 환경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작은 회사입니다. 우리는 세상 구석 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염과 삼림 벌채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고, 물고기와 야생 동물이 사라집니다. 집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도 압니다. LA에서는 천 년 동안 자란 세콰이어 나무가 쓰러집니다. 스모그는 심하고 연못의 생물들이 사라집니다. 해안은 걷잡을 수 없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계속되고 있고, 열대 우림의 벌목과 불을 질러 밭을 일구는 일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하수와 표토는 사라지고, 산성비가 내리고, 강과 시냇물은 댐 때문에 파괴되어 갑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는 일들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환경 위기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작은 단체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1970년대 벤츄라에서 얻었습니다. 직원들이 지역의 파도를 지키기 위한 의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벤츄라 강이 한 때 무지개 송어와 연어가 살던 곳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1940년대에 생긴 두 개의 댐이 물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겨울에 내리는 비가 내릴 때를 제외하고는 하수 처리장에서 나온 물만 강에 흘렀습니다. 의회 모임에서 전문가들은 강은 죽었고 강 입구를 막아버리는 일은 새와 야생 동물, 그리고 파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크 카펠리라는 스물 다섯 말 먹은 생물학과 학생이 일어나 강에서 찍은 사진들버드나무에서 사는 새, 사향쥐와 물뱀, 강 어귀에 알을 낳는 뱀장어 사진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기 전까지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마크는 무지개 송어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50마리 이상의 송어가죽은강을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개발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크에게 사무실과 우편함을 제공했고, 강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도왔습니다. 개발 계획이 더 많이 생길수록, ‘벤츄라의 친구들은 개발 계획을 중단시키기 위해, 물을 더욱 깨끗하고, 물을 잘 흐르게 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야생 동물 숫자가 늘어났고, 더 많은 연어들이 강물에서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마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풀뿌리 단체의 노력이 변화를 만들 수 있고 노력을 통해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크의 일에 감동했습니다. 우리는 회원이 많고, 지위가 높고, 기업과 관련이 있는 비영리 민간 단체 대신 자연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작은 풀뿌리 단체들에게 정기적인 후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에 풀푸리 단체들에 매년 이익의 10%를 기부하기로 선언했습니다. 후에 우리는 매출의 1% 또는 이익의 10% 중 더 많은 금액을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부터 매년 이 약속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1988년에 우리는 요세미티 계곡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환경 보호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매년 환경 보호 이슈에 관한 교육 캠페인을 했습니다. 우리는 환경 보호와 노동 기준 위태롭게 하는 무역의 국제화에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퇴적물이 쌓여 물고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댐 철거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생태계와 야생 동물의 영역을 보호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18개월 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단체들에게 마케팅과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교육하기 위해활동가를 위한 도구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기업이 일으키는 오염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카달로그에 재활용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신칠라 플리스에 쓰일 재활용 폴리에스터를 개발하기 위해 말덴 밀 회사와 협력 했습니다.

 

1996년에 문을 연 르노 물류 센터는 태양열을 통과시키는 채광창과 복사열 사용을 통해 에너지 60%를 줄였습니다. 손잡이, 카펫, 화장실 칸막이까지 모든 물건에 재활용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매장의 조명 시스템을 다시 조절했고, 새로 여는 매장을 더욱 환경 친화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염색 공정을 점검해서 독성이 있는 물질을 사용하는 색깔을 없앴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1990년대 초반부터 환경 보호를 위한 책임을 직원 업무의 핵심 요소로 만든 것입니다.

 

 

유기농 목화

 

우리가 사용하는 주요 원단에 대한 환경 평가를 독립적으로 실시하면서 우리는 석유로 만드는 폴리에스터와 나일론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오염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나타났지만 면에 대한 척도는 없었습니다.

 

조사 결과 우리가 만드는 옷에 사용하는 면이 환경에 가장 많은 피해를 끼치는 원단임이 드러났습니다. 농사에 쓰이는 독성 농약의 25%가 목화를 재배하는데 쓰입니다. 토양과 물 오염을 끔찍하고 일꾼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목화는 환경에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작물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수천 년 전부터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방식으로 목화를 길러왔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신경 가스를 손으로 잡초를 뽑지 않게 하기 위한 상업적 수단으로 개발하면서 농약 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처음에는 유기농 목화에서 얻은 면으로 티셔츠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 호아킨 계곡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연못에 가득한 화학 물질 냄새를 맡고, 목화 농장의 음울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지구를 이렇게 오염시키면서 제품 생산을 계속할 것인가?

 

1994년 가을 우리는, 1996년부터 모든 면 제품을 유기농 목화에서 얻은 면으로만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18달 동안 66개 제품을 바꿔야 했고, 원단의 생산 라인을 바꾸는데 4달의 시간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생산에 필요한 유기농 목화를 충분하게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기농 방식을 지키는 농부들을 직접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면을 만드는 작업자들을 찾아가 작업 후 기계를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인증원들을 찾아가 원단의 생산 단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1996년부터 파타고니아의 모든 면제품은 유기농 목화로만 만듭니다.

 

 

다음 단계

 

우리는 환경에 이로운 원단을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헴프를 더 많이 사용하고, 어떤 제품은 재활용 폴리에스터와 헴프를 혼합한 원단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파타고니아 원단 공급 업체 중 한 곳에서는 플라스틱 병 대신 폴리에스터 자체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 원단을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 옷 자체를 재활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고객들이 더 이상 입을 수 없어 돌려준 폴리에스터 자켓이나 다른 종류의 플라스틱도 재활용 하게 될 겁니다.

 

파타고니아 상표를 처음 만든 후 30년 동안 우리는 품질과 기능이 가장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왔습니다. 최근 5년 동안 일어난 혁신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캐필린 베이스레이어는 수분 흡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구조를 지녔고, 입고 움직일 때 더욱 편안해 졌습니다.

 

레귤레이터 제품의 기능 개선은 신칠라를 넘어섭니다. 더욱 가볍고 따뜻하고 땀을 잘 흡수하고, 압축력이 뛰어납니다. 하드쉘, 소프트 쉘, 하이브리드 쉘 등 쉘 제품도 놀라울 만큼 발전했습니다. 더욱 가볍고 잘 늘어나고 이전 제품보다 기능이 더욱 뛰어납니다.

 

원단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박음질은 생떽쥐베리가 말한 미니멀리즘의 방향에 따라야만 합니다. 2005년 봄에 우리는 두께가 얇고, 유연하고, 비가 오는 날 방수 기능이 뛰어난 새로운 봉제 기술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했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파타고니아는 등반 사업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계는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등반, 서핑과 같이 위험을 감수하는 활동, 영혼을 바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야외 활동을 계속합니다. 우리는 촬영용 카메라로 활동을 멋지게 찍는 일 보다 사랑하는 활동을 즐기기 위해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최고의 기능과 품질을 지닌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연에 끼치는 피해를 똑바로 바라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