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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비엥침(Oswiencim)의 콜베 신부 "내가 죽겠다"

Paul Ahn 2021. 6. 16. 16:56

오시비엥침(Oswiencim)의 콜베 신부 "내가 죽겠다"

 

매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 앞마당은 작은 성당이 된다

(naver.com)

 

유대인에게 피신처 제공했다가 수용소로 끌려갔던 콜베 신부

한 수감자 대신 "내가 죽겠다"

목숨을 내놓은 사제의 뜻 기려 해마다 수용소 11동 앞에서 미사

 

폴란드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오시비엥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홀로코스트 학살을 자행했던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로 악명 높다. 유대인·폴란드인·집시 등 150만명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지난달 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순례단이 이 비극의 땅을 찾았다.

 

수용소를 도는 내내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수북이 쌓인 아기 신발과 주인을 잃은 머리카락 다발, 아비규환이 분명했을 가스실, 어둡게 입을 벌린 시체 소각장을 지나며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28개 건물 중 한 곳만은 예외였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1894~1941) 신부가 선종(善終)한 수용소 11동(棟)이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걸린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왼쪽 위는 콜베 신부. 아래는 그가 갇혔던 아사감방. 벽 일부를 헐어 관람객이 비좁은 내부를 볼 수 있게 했다. 콜베 신부는 이 감방에서 함께 갇힌 이들과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김태훈 기자

 

폴란드 사람인 콜베 신부는 유대인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다가 발각돼 1941년 5월28일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수용소에서도 금지 규정을 어기고 몰래 고해성사와 상담으로 수감자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두 달 뒤인 7월 말, 수감자 한 명이 건초더미에 몸을 숨겨 탈출했다. 당시 수용소는 한 사람이 탈출하면 10명을 아사(餓死) 감방에 보내는 벌칙 규정을 두고 있었다. 간수들은 죽어야 할 사람을 무작위로 골랐다.

 

그들 중 폴란드군 중사 출신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가 울부짖었다. "저는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그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콜베 신부였다.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 지휘관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콜베 신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인간으로서 하나뿐인 목숨은 가요브니체크에게 줬다. 하지만 죽기 전에 사제로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9명과 함께하며 그들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게 도와야 했다.

 

콜베 신부는 7월 29일 그들과 함께 11동 지하 아사 감방에 갇혔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감방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지옥 같은 감방이 거룩한 교회로 탈바꿈하는 것을 지켜본 간수들은 말을 잃었다.

 

고통과 원망 속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콜베 신부의 인도로 신의 품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아사 감방은 벽 일부를 헐어 내부를 볼 수 있게 돼 있다. 순례단을 안내한 수용소 박물관 직원은 "수감자들이 얼마나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죽어갔는지 관람객이 알 수 있게 하려고 허문 것"이라고 설명했다.

 

콜베 신부는 폐결핵 후유증으로 몹시 야위었는데도 2주 뒤 감방을 비울 때까지 살아서 버텼다. 그사이 6명이 사망했다. 생존자 3명과 함께 아사 감방에서 끌려 나온 콜베 신부는 자신의 사명을 모두 끝냈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나치가 그의 팔에 독극물 페놀을 주사했다. 8월 14일이었다. 숨진 콜베 신부는 이튿날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한 줌 재가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9년 6월 7일 그가 최후를 맞은 11동 18호실 감방을 찾아 기도했다. 1982년 10월 10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의 시성(諡聖) 미사를 집전했다. 그날 교황은 82세 노인이 되어 참석한 가요브니체크를 끌어안고 뺨에 입맞췄다.

 

해마다 8월 14일이 돌아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11동 앞마당은 작은 성당이 된다. 콜베 신부가 속했던 프란치스코회, 크라쿠프 대주교와 교인 등이 그의 수인(囚人)번호 '16670'이 적힌 깃발을 들고 미사를 드린다.

 

참석자들은 콜베 신부의 희생을 기리며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성경 구절을 읊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조선일보 & chosun.com

2019.10.30. 오전 3:09

오시비엥침(폴란드)=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Saint Maksymilian Maria Kolbe)

 

본명 : Rajmund Kolbe.

출생 : 1894. 1. 8, 폴란드 로츠 근처 즈두인스카볼라

사망 : 1941. 8. 14, 아우슈비츠

국적 : 폴란드

 

1982년 10월 10일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14일. 프란치스코 수도회 사제, 성모 기사회 설립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난민들을 도와주었다는 죄목으로 나치에 의해 순교했다.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했고, 1912년 로마로 가서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국제 마리아 운동에 중대한 기여를 했고, 1917년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수도회라는 신앙단체를 조직했으며, 1918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폴란드로 돌아가 가톨릭 대중 월간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Rycerz Niepokalanej〉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1927년 니에포칼라노프(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라는 도시를 세워 종교 중심지로 삼았는데, 나중에 이곳에는 700여 명의 탁발수사들과 노동자들이 살았다. 성모 마리아 공경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콜베는 훗날 일본(1930)과 인도에도 자매 단체들을 세웠다.

 

폴란드로 돌아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의 관구장과 폴란드 주요 가톨릭 출판기관의 감독이 되었다.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년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다.

 

바르샤바 감옥에 갇힌 뒤 배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이곳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 프란치셰크 가요프니체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았는데, 처음에는 굶주리다가 마지막에 페놀 주사를 맞고 죽었으며 화장되었다.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시성하면서 순교자로 공경할 것을 공포했다. 1971년 M. 비노프스카의 〈죽음의 수용소는 그의 진실을 입증했다 The Death Camp Proved Him Real〉가 출판되었다.

 

1941년 7월 말, 이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이자 SS중위인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 ~ 1945)[4]는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냈다. [5]그리고 그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의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요브니체크는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 신부이며,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라고 자청하여 나섰다. 프리치 중위는 이를 승락했고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프리치는 그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아사하도록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방이니 그야말로 상상초월인 상황. 그러나 콜베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때때로 감옥의 모습을 보러 온 통역 브루노 보르고비에츠(Bruno Borgowiec)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독약인 페놀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Franciszek Gajowniczek)

 

생애 : 1901년 11월 15일 ~ 1995년 3월 13일)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가톨릭 사제 막시밀리안 콜베에 의해 목숨을 구한 폴란드 육군 하사관으로,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그 후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콜베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년 7월 10일 - 1945년 5월 2일 실종 신고)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비밀 경찰 슈츠스태프텔의 독일인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의 대리 및 연기사령관이었다.

 

루돌프 회스(Rudolf Höss)에따르면 프리츠쉬는 대량 학살을 목적으로 유독 가스 지클론 B를 사용할 것을 처음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