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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金宇中)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Paul Ahn 2021. 7. 15. 18:45

⊙김우중(金宇中)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19121031837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분류된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천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 해체를 피하지 못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해 왔으며 17조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2019.12.10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제2의 고향 베트남서 '리틀 김우중' 양성…"대우정신 계승"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912103119Y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생전 "베트남이 제2의 고향처럼 푸근하게 느껴진다"고 지인들에게 늘 말해왔다.

 

 

공산당 일당 체제인 베트남이 1986년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경제발전을 추진하려고 '도이머이(새롭게 바꾼다는 뜻)' 정책을 채택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전 회장은 베트남에 가장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 해외 대기업 총수였다.

 

덕분에 김 전 회장은 현지에 탄탄한 기반을 만들고 최고위층과 두터운 인맥을 쌓았다.

김 전 회장이 대우그룹 사태로 1999년 10월 해외로 도피했다가 2005년 6월 귀국할 때까지 상당 기간을 베트남에 체류했고, 당시 베트남 정부가 인터폴에 수배된 김 전 회장을 사실상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2008년 1월 특별사면 된 김 전 회장이 해외로 나갔다가 지난해 하반기 건강악화로 다시 귀국할 때까지 주로 머문 곳도 막내아들 소유의 베트남 하노이 번찌 골프장에 있는 임시 숙소였다.

 

그는 2009년 전직 대우인들이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결성하고 대우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사업)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자 베트남을 첫 대상지로 꼽았다.

 

김 전 회장은 "앞으로 베트남이 가장 빨리 성장할 것"이라며 "이곳에서 GYBM을 가장 먼저 시작하자"고 제안했다고 지인들이 전했다.

 

GYBM은 해외 대학과 협력해 현지에서 우리나라 청년들을 교육하고 해당 국가에 취업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중급 이상의 어학 능력을 갖춰 현지 기업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아 창업까지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워 '김우중 사관학교'로 불린다.

 

2011년 베트남에서 1기 40명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베트남과 미얀마, 인도네시아에서 1천여명을 배출했다

올해도 150명을 선발해 지난 7월부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청년들이 해외에서 창업하고, (해외로) 수출하는 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이런 과정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는 해외에서 많은 네트워크가 생기고, 그 나라에서 수출을 늘리고, (기업체의) 지점이 생겨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제가 죽을 때까지 GYBM 사업을 하려고 한다"며 이 프로그램에 강한 애착을 보인 김 전 회장은 지난해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증보판을 내면서 받은 인세를 GYBM 사업에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또 GYBM 사업에 이어 은퇴자의 베트남 현지 취업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었다.

 

연합뉴스

2019.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