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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辛格浩) / 가난한 문학청년, 껌으로 '롯데'를 일구다.

Paul Ahn 2021. 7. 15. 18:55

⊙신격호(辛格浩) / 가난한 문학청년, 껌으로 '롯데'를 일구다.

 

가난한 문학청년, 껌으로 '롯데'를 일구다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19321

 

 

가난 못 이겨 일본행…화학 제품으로 사업 시작해 롯데주식회사 설립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 30분쯤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롯데그룹은 19일 신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신 명예회장은 18일 밤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돼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다. 일본 출장 중인 신동빈 롯데 회장도 급히 귀국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重光初子)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차남 신동빈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2회에 걸쳐 신 회장의 일생을 되돌아본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현 울산광역시 상동면) 둔기리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순필의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공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조성된 대암호에 수몰됐으나, 신 명예회장은 후일 마을 언덕 위 생가를 복원하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1년에 두 번 정도 찾아와 며칠씩 묵었다.​

 

신격호는 1929년 입학한 4년제 삼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의 5학년으로 진학했다.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고, 졸업 후엔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다행히 자수성가로 성공한 큰아버지 신진걸의 도움으로 어린 신격호는 1936년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양산 통도사 인근 경남도립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다. 이 무렵 18세의 나이로 상남면 제1의 부농의 딸 노순화와 결혼한다.

 

신격호는 직장 근처에서 홀로 하숙을 했고, 집에 오면 10남매 대식구가 복작거려 아내와의 정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격호는 박봉에 부업으로 양털 깎기나 돼지 사육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처가에 달구지 살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부부 사이도 멀어졌다.

 

신격호가 가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1941년 큰아버지 신진걸이 사망하면서다. 친척으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데다, 마침 흉년으로 벼 수확이 줄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신격호는 청운의 꿈을 품고 가출을 단행했다. 애초 그의 꿈은 일본에 가서 공부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향한 그는 경남 양산에서 하숙할 때의 집주인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도쿄로 향했다. 고향 친구의 자취집에서 머물며 우유 배달로 생계를 이어갔다. 대학 진학을 위해 와세다중학 야간부에 편입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그의 신용이 소문나면서 우유 배달을 맡기려는 고객이 늘자 신격호는 고학생들을 우유 배달원으로 직접 고용할 정도로 수완을 발휘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기자를 꿈꿨던 신격호는 틈만 나면 헌책방으로 향해 문학 전집을 읽었다. 이후 사명을 ‘롯데’로 지은 것도 이때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를로테(샤롯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문학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움을 깨달은 그는 와세다중학 졸업 후 와세다공업고등학교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공계 학생은 징집되지 않는 것도 이유였다.

 

1944년 신격호를 눈여겨보았던 하나미쓰라는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이 찾아와 “6만 엔을 출자할 테니 공장을 차려 군수용 커팅 오일을 제조해보라”는 제안을 했다. 당시 회사원 월급이 80~100엔 정도이니 6만 엔이면 꽤 큰돈이었다. 당시 일본은 군수용 물자 생산에 몰두할 때였고 쇠를 깎는 선반작업에 쓰이는 커팅 오일의 수요가 컸다. 그러나 도쿄에 얻은 공장건물은 가동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다시 공장을 얻어 가동했지만 1년 반이 지난 뒤 다시 미군 폭격으로 건물, 기계, 원료가 모두 타버렸다. 롯데의 시초가 전범기업이라는 논란은 신격호의 최초 사업이 전쟁용 군수물자 제조였기 때문이다. 롯데 측은 이에 대해 공장이 폭격을 당해 실제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전범기업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한편 신격호는 첫 공장 가동 전에 가출 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문안편지를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후 재일 조선인들은 대거 귀환선을 타고 귀국했지만, 신격호는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화학 전공자인 그는 1946년 공습으로 반쯤 타버린 허름한 벽돌건물에서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전쟁 중 만들던 커팅 오일을 이용해 비누와 포마드를 만들어 팔았다.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물자가 부족한 시대라 신격호의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나미쓰에게 빌린 6만 엔을 1년 반 만에 모두 갚고, 이자로 집까지 한 채 사줬다. 신격호는 일본생활에서 처음 생활의 여유를 누렸다. 이 일로 신격호는 사업의 묘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1947년 그는 금 두덩어리를 고향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대로라면 롯데는 식품회사가 아니라 아모레퍼시픽 같은 화장품회사 또는 LG처럼 화학회사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공장을 방문한 지인이 껌이라는 것을 소개했다. 미군을 통해 들어온 껌이 기호품으로 인기를 끌었고 전국에 400여 개의 무허가 업체들이 껌을 만들고 있었다. 껌은 적은 자본으로 제조가 가능했고 판매가격의 절반이 이익으로 남았다.

 

화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약제사까지 고용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품질 좋은 껌을 만들 수 있었다. 껌 역시 성공가도를 달렸다. 과자점 주인들이 제품을 확보하려 공장 앞에서 줄을 설 정도였다. 신격호는 인근 주부들과 고학생들을 고용했다. 주부들에게는 명절에 명주 옷감을 선물하고, 고학생들에게는 학비까지 대주었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자 개인사업자로선 한계를 느낀 신격호는 1948년 6월 28일 도쿄에서 주식회사 롯데를 창립했다. 가출해 일본에 온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신격호는 도서관에서 껌 관련 문헌을 뒤지면서 껌을 연구했다. 그간 값싼 재료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던 껌의 품질을 높여 일본 내 1위의 껌 회사가 되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1950년엔 오사카 지사를 설립할 정도로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1950년 9월 3일 한국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때 신격호는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의 딸 다케모리 하쓰코(당시 25세)와 결혼했다. 하쓰코의 아버지는 일본 육군 대좌로 1944년 싸이판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결혼 당시 하쓰코가 신격호의 기혼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후일 신격호는 37세 연하인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 씨(1959년생) 사이에 딸 신유미를 낳았다. 

 

1983년생인 신유미는 외가에 입적돼 있다가 1988년 아버지 신격호의 신고로 법적인 딸로 인정받았다. 신유미는 2010년부터 롯데호텔 고문으로 재직하다, 2017년 퇴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7년 롯데가 ‘형제의 난’ 수사 도중 서미경 씨가 증여세 미납 관련해 법원에 출두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자 퇴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부인 노순화 씨는 1960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실제 사망 시기는 그보다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신격호의 장녀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은 노순화 씨에게서 태어났고, 신동주·신동빈 형제는 하쓰코 씨에게서 태어났다.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이 과거 노순화 씨의 제사를 챙기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장녀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도 공식행사에서 하쓰코 여사를 수행하며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한때 문학도를 지망했던 신격호는 마케팅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53년 ‘미스 롯데’ 선발대회를 개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껌이 부서져서 판매가 불가능해진 경우 제조사와 도매상이 반반씩 손해를 지는 관행을 거부하고 제조사가 모두 부담해 업계 평판을 관리했다.

 

일본에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1957년 한 가요 프로그램을 몽땅 사서 프로그램명을 ‘롯데 가요 앨범’으로 지었다.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는 ‘네이밍 스폰서’를 1950년대에 활용한 것이다. 1961년엔 당첨금 1000만 엔 경품 잔치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의 월 평균 가계 수입이 2만 5000엔 하던 때였다.

 

1961년 롯데는 초콜릿 사업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직원을 유럽으로 보내 스위스 출신 초콜릿 기술자를 영입하고 최신 설비를 도입한 뒤 1964년 첫 제품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발매했다. 이후에도 해외에서 기술자를 영입해 사탕,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종합 과자 메이커로 성장했다.

 

이즈음 신격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이자 1957~1960년 일본 수상을 지낸 일본 보수파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와 30년 넘게 친분을 유지했다. 조국에 마음의 빚을 지녔던 신격호는 박정희 정권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일본과 한국의 가교 역할과 물밑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신격호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바로 아래 동생 신철호를 일본으로 불러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신철호는 귀국 후 1959년 주식회사 롯데를 세워 껌 생산을 시작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박정희 정부는 재일동포 기업인의 고국 투자를 적극 권유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신격호에게 군수산업 투자를 요청했으나, 일본 내 ‘평화산업’으로 분류되는 롯데가 군수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소 제철산업에 관심을 가졌던 신격호는 가와사키 제철에 용역을 주어 제철 공장 건립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제철산업은 국영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롯데의 모국 투자는 일본에서 성공한 제과업으로 결정됐다.

 

그러자 이미 국내에서 제과업을 하고 있던 동생들이 반발했다. 신철호는 캔디와 비스킷 부문을 떼어 ‘메론제과’를 설립하고, 신춘호는 라면 시장 진출을 위해 ‘롯데공업’을 차렸다. 신춘호는 ‘롯데’라는 상호명의 사용을 거부당하자 ‘농심’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신격호는 1967년 자본금 3000만 원 직원 500명 규모의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2020.01.19(일)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과자에서 호텔까지…한국 5위 그룹이 되다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19322

 

부동산 선견지명과 실용적 사고…백화점·월드 사업 과정에서 '잡음'도

 

일본에서 거둔 성공 경험을 발판으로 롯데제과는 설립 초기부터 승승장구했다. 1974년 칠성사이다와 1978년 삼강하드아이스크림을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개편했다. 1978년 한일향료(현 롯데푸드), 롯데햄우유를, 1979년 롯데리아를 설립했다.

 

식품업 외에도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70년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현 롯데알미늄)을, 1973년엔 호텔롯데, 롯데기공, 롯데파이오니아를 설립했다. 1974년 롯데산업, 롯데상사를 발족했다. 1979년엔 롯데쇼핑을 설립했고,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1980년대 들어 사업 다각화 노선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1980년 롯데냉동 설립, 한국후지필름 인수, 1982년 롯데자이언츠 출범, 대흥기획과 롯데물산 설립, 1983년 롯데그룹 중앙연구소, 유통산업본부 설립으로 재벌그룹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83년 말 24개 계열사, 직원 2만 명의 롯데그룹은 한국의 10대 재벌그룹에 진입했다.

 

호텔롯데, 롯데백화점 본점이 있는 을지로입구, 롯데월드가 있는 잠실, 국내 첫 민자역사인 롯데 영등포 역사는 모두 유동인구가 많은 요지에 자리했다. 부산 제2롯데월드, 대구역사 등도 해당 지역에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신격호는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지켜보면서 부동산을 보는 남다른 눈이 생겼고, 한국도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것으로 예감했다. 그 결과 롯데는 가장 실속 있는 자리의 부동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다만 부동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특혜 논란 등 잡음도 상당했으나 결과적으로 문제없이 벗어났다. 호텔롯데와 롯데백화점 본점이 자리한 장소는 산업은행 자리였다. 산업은행 이전의 명분은 부족한 주차공간과 녹지 확보였는데, 그 자리에 호텔과 백화점이 들어설 수 있도록 용도 변경된 데 대한 의구심이 일었다. 또 당시 4대문 안 백화점 건립이 불가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10·26 직전 이를 허가했다.

 

1987년 12월 잠실 롯데타운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도 잡음이 일었다. 당시 한 국회의원이 제기한 바에 따르면, 현재 제2롯데월드가 들어선 서울시 소유의 잠실 땅은 매각 계획에 없었으나 신격호가 전두환 대통령을 방문한 뒤 전격적으로 매각됐다. 또 롯데가 매입한 가격은 당시 시가의 절반 수준이라는 의혹이 나왔다. 롯데는 합법적인 공개 입찰을 통해 취득한 땅이라 해명했지만, 응찰 기간을 10일만 주어 타 기업이 응찰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는 반론도 나왔다.

 

롯데월드타워 건설에도 무수한 뒷얘기가 나왔다. 롯데가 롯데월드타워 최초 사업계획을 서울시에 제출한 것은 1988년 11월이다. 사업계획을 검토한 서울시는 교통혼잡과 대규모 소매점 시설 허가 미비로 반려했으나, 롯데는 2년 뒤 돌연 100층짜리 건물을 짓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 부지 관련해선 노태우 정부와 실랑이를 벌이며 법적 다툼을 벌일 끝에 세금 관련 소송에서 롯데가 이기기도 했다. 롯데월드타워는 성남의 서울공항에서 뜨는 공군 비행기와의 충돌 우려를 활주로 각도 변경 공사로 해결하며 2016년 완공됐다.

 

롯데월드타워는 ‘세계 최대의 관광 명소를 만들어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신격호의 의지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부동산 취득에서부터 완공까지 29년이 걸렸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까지 일곱 대통령을 거치며 사업이 이뤄졌다.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신격호 회장은 국내 여느 재벌그룹 회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2017년 신동주·신동빈 형제가 롯데그룹 경영권을 두고 다툰 ‘형제의 난’ 이전까지 신격호는 공개석상에 나서지 않는 ‘은둔의 경영자’였다. 그는 한 달은 일본에서, 한 달은 한국에서 지내는 ‘셔틀 경영’으로 유명하다. 실제로는 일본에 5주, 한국에서 3주 정도를 지냈으며, 일본과 한국을 오갈 때도 수행원 없이 홀로 오갔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에 있을 때 머무는 호텔롯데 34층은 그의 집무실이기도 하다. 종종 그는 점퍼 차림의 평범한 모습으로 홀로 호텔롯데와 롯데백화점을 순시했다. 청계천을 자주 산책했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뒷얘기도 있다.

 

롯데그룹은 타 그룹과 달리 기획조정실의 역할이 크지 않다. 회장 주변에 밀착된 참모진이 없고 대부분의 구상이 신격호 회장에게서 나왔다. 계열사 대표이사라 하더라도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업무보고 외에는 신 회장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기업이 자기 역할만 잘하면 되지 굳이 오너가 나설 필요가 없다’는 신 회장의 평소 소신 때문이었다.

 

이런 실용주의적 사고관은 신격호 시대 롯데그룹의 성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롯데그룹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매물이 아니면 기업 M&A(인수합병)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하더라도 무리한 액수를 써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9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9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에 따르면 롯데는 자산총액 115조 원, 계열사 95개로 삼성·현대자동차·에스케이·엘지에 이어 재계 5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병철·정주영·최종건·구인회·김종희처럼 주요 재벌그룹의 창업주는 오래전 생을 마감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영면으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창업 1세대들은 모두 역사로 남게 됐다.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영결식은 22일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신격호 회장께서 선종하신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