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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李健煕) 엉뚱했던 소년..'초일류' 삼성 만들었다.

Paul Ahn 2021. 7. 16. 09:59

⊙이건희(李健煕) 엉뚱했던 소년..'초일류' 삼성 만들었다.

 

내성적이지만 엉뚱했던 소년..'초일류' 삼성 만들었다

학창시절 말수 적고 책·영화에 몰두

 

1980년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왼쪽)과 함께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20.10.25/뉴스1 © News1 김진 기자

 

 

"독특한 시각과 통찰력..사람 보는 안목도 남달라"

 

환하게 웃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유년 모습. (삼성전자 제공)

2020.10.25/뉴스1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외로운 아이였다.

출생 당시 선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한창 사업을 일으켜 운영하던 때였고, 이 회장은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의 품을 떠나 경남 의령의 할머니 손에서 세 살까지 자랐다. 선친의 사업 확장에 따라 여섯살이 돼서야 서울로 이사해 온 가족이 모여살게 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살이를 다녔고, 초등학교도 일본 생활을 포함해 다섯 번이나 옮겨다녔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큰형(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작은형(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과 함께 자취했지만, 각각 나이 차이가 11세·9세로 커서 어울리기 어려웠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3년 동안 이 회장은 책과 영화에 빠져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이 회장은 1989년 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감성이 민감한 때에 일본에 머물면서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잦은 전학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이 회장의 학창시절에 대해선 크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고(故)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말을 통해 띄엄띄엄 알 수 있다. 유년 시절 경북 영주에서 우등생이었던 홍 전 부의장은 서울로 상경해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했고, 일본에서 귀국한 이 회장과 만나 60년 지기가 됐다.

 

홍 전 부의장은 이 회장이 학창 시절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2001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등학생 이건희에 대해 "그때도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응' '아니'뿐이었다. 동작도 느릿느릿했고 한번도 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천둥벼락이 내리쳐 다른 놈들은 다 기절해도 터덜터덜 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나 기절할 놈'이라고 놀려줬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그는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홍 전 부의장은 1997년에 쓴 한 에세이에서 학창시절 이 회장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다. "방과 후 그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했다. 앞장서 가던 그가 '배고프다'면서 끌고 간 곳은 군용 천막 안의 즉석 도넛 가게.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완벽하게 비위생적인 곳이지만 그는 털쩍 주저앉아 잘도 먹어 치웠다. 그의 아버지 함자는 물론,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속으로 '녀석, 가정 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는 독특한 시각과 통찰력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홍 전 부의장의 2001년 인터뷰에서 "건희는 어쩌다 입을 열면 싱거운 소리를 잘했는데, 더러는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시각과 발상을 내비쳤다. 그런 말을 앞뒤 설명도 없이 '본체'만 툭툭 던졌는데, 책깨나 팠다고 거들먹거리던 나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겨우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느니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는 등 그때 고교생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얘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고 회상했다.

 

시대를 내다본 에피소드는 또 있다. 하루는 이 회장이 홍 전 부의장에게 일본의 소학교 교과서를 건네면서 '일본어 좀 배워놔라. 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 거다'고 말했다. 당시 고교생들에겐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그걸 뭐하러 배우냐'고 묻자, 심드렁하게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전 부의장은 "솔직히 그때는 건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놀랍다"고 말했다.

 

특히 이 회장에 대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홍 전 부의장은 학과 공부에는 별 뜻이 없던 이 회장에게 무슨 궁리를 하며 사느냐고 묻자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무렵 삼성의 한 임원이 내쳐지자 이 회장은 아버지에게 그 임원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다시 불러들였다. 이병철 회장도 고등학생이던 이 회장의 사람 보는 눈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전 부의장은 2003년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그분(복권된 임원)은 나중에 삼성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했다.

 

사안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이던 이 회장은 방학을 맞아 귀국해 대학생이던 홍 전 부의장을 만났다. 이 회장이 운전하던 차가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지나자 홍 전 부의장은 "봐라, 이게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다리"라고 자랑했다. 

 

다리를 본 이 회장은 "이 생각없는 놈아, 통일이 되면 한강으로 화물선이 다닐 것 아이가. 그러려면 다리 가운데 있는 교각은 간격을 더 넓게 만들었어야지!"라고 말했다. 홍 전 부의장은 "실로 괴이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상학과(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외국으로 나가라'는 선친의 지시에 자퇴하고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로 떠났다. 이후 유학을 마치고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 부회장을 거쳐 1987년 회장이 돼 현재 삼성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뉴스1코리아 www.news1.kr

2020.10.25. 16

문창석 기자, 이지원 디자이너 themoon@news1.kr

 

 

'난 유도, 넌 레슬링' 뒹굴던 두 빡빡이, 60년 친구 홍사덕과 이건희

 

 

두 사람은 서울대 사대부고 동창으로 60년 지기다. 이 회장이 1997년 쓴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당시 정무1장관이었던 고인이 쓴 ‘내가 만나 본 이건희 회장, 애벌레 시절 이야기’가 들어있다.

 

“고등학생 이건희 군은 근엄하기는커녕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 방과 후 그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앞장서 가던 그가 “배고프다”면서 끌고 간 곳은 군용 천막 안의 즉석 도너츠 가게.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완벽하게 비위생적인 곳이지만 그는 털쩍 주저앉아 잘도 먹어 치웠다. 그의 아버지 함자는 물론,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속으로 ‘녀석, 가정 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홍 전 부의장은 이건희 에세이 기고문에서 이 회장의 애벌레 시절 버릇 가운데 나비가 되고 나서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으로 ‘고집’을 꼽았다. 그는 “나는 지금까지 그가 입밖에 낸 말을 주워담거나 바꾸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시시하게는 어느 콧대높은 여학생과의 데이트를 놓고 걸었던 내기에서부터 크게는 사업 구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과 행동은 문자 그대로 일수불퇴였다”고 했다.

 

홍 전 부의장은 이 회장에 대해 사람을 보는 안목, 사안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이건희 회장‧홍사덕 전 의원 학창시절 우정

 

경북 영주 출신의 홍 의원은 어릴 적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최영 장군의 전기를 달달 외워 친구들과 선생들을 놀라게 했다. 영주시내 책방주인은 책을 좋아하는 홍사덕에게 “책만 구기지 않으면 마음대로 책을 읽어도 좋다”고 선심을 썼다.

 

어린 홍사덕은 책방에서 꼿꼿한 자세로 책을 읽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다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진 적도 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책방주인은 홍사덕을 위해 의자를 갖다 놓았다.

 

홍 전 의원이 이 회장을 처음 만난 건 서울사대부고 1학년 때이다. 두 사람은 같은 반이었다. 홍 전 의원은 “한번은 건희가 자기 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장충동에 있는 큰 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병철이란 이름을 몰랐고, 건희가 그런 큰 부잣집 아들이란 사실도 몰랐다. 나는 건희에게 ‘이 집도 ICA(국제차관)로 지은 집이냐, 어디 ICA 캐슬 안 좀 보자’고 놀리면서 따라 들어갔다”고 기억했다.

 

유도를 한 홍 전 의원과 레슬링을 한 이 회장은 이 집 2층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서로 힘자랑을 하며 겨루기도 했다. 홍 전 의원이 자주 이 회장 집을 찾아와 어울려 놀기만 하자 이 회장 어머니는 홍 전 의원이 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장은 고교 시절 과묵하면서도 정이 많았다. 대학시험이 가까워지자 이 회장은 홍 전 의원을 위해 자기 집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구해주었다. 그때까지 홍 전 의원은 혼자 서울에 올라와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 입주해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자기 공부를 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 방을 구해준 것이다. 이 회장은 이불이 없는 방에 오리털 침낭을 갖다 주기도 했다. 덕분에 홍 전 의원은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홍 전 부의장은 이 회장에 대해 사람을 보는 안목, 사안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이 회장은 와세대 대학에 다니다가 방학을 맞아 돌아왔을 때, 다시 한번 나의 기를 죽여놓고 갔다. 손수 운전으로 드라이브를 즐기던 우리가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에 닿았을 때다.

 

“이게 우리 기술로 만든 다리다. 대단하재?”

“이눔아. 생각 좀 하면서 세상을 봐라. 한강은 장차 통일되면 화물선이 다닐 강이다. 다리 한복판 교각은 좀 길게 잡았어야 할 것 아이가?”

홍 전 의장은 “실로 괴이한 두뇌의 소유자였다”며 이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홍 전 의원은 “이 회장은 견문이 넓어 아는 것도 많았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나 같은 촌놈하고는 많이 달랐다. 한번은 그가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학교 공부를 할 때 나는 인간 공부를 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회장이 잘 웃지 않는 건 아버지로부터 ‘부하 직원들 보는 앞에서 웃음을 보이면 직원들이 해이해 진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남들과 어울리는 걸 피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취미도 비디오 감상, 자동차잡지 구독 같은 것들이다. 그룹 회장이 돼서도 자동차를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도 용인의 서키트에서 유럽의 신형 스포츠카를 몰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홍 전 의원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삼성물산에 원서를 냈다.

당시 월급이 가장 많은 곳이 한국은행과 삼성물산이었는데 한국은행은 채용시험이 끝났다. 홍 전 의원의 입사성적은 1등이었다. 당시 이맹희 삼성물산 부회장(1931~2015)은 홍 전 의원을 자기 방에 두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맹희 부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장충동 집에 놀러 오던 홍 전 의원의 얼굴을 알아본 이병철 회장이 “건희 친구니까 네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는 건희와 있는 게 낫겠다”며 홍 전 의원을 중앙일보로 발령냈다.

 

두 사람은 신입기자와 이사로 한 건물에서 근무했다. 홍 전 의원은 “불리한 대우를 받는 동료기자가 있으면 3층 이 회장의 방에 올라가 건의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홍 의원이 1975년 중앙일보 퇴사 후 정계에 입문하고 이 회장은 최고 경영자의 길을 가느라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2020.06.18 17:06

신은진 기자

 

 

늦은 밤 불켜진 이건희 방, 뭐하나 봤더니 밤새도록 TV 분해 조립

https://www.chosun.com/economy/industry-company/2020/10/28/43SX52SBVNFKBIUWBSZT2NI7AQ/

 

- 50년 친구, 김필규가 추억하는 이건희 -

 

28일 삼성서울병원 암센터 지하1층에서 엄수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영결식.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이 추모사를 읽었다. 김 전 회장은 이 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문이다. 고교 시절 레슬링부에서 함께 활동하는 등 50년 지기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 서울사대부고 수필집 ‘우리들의 이야기’에 썼던 이 회장과의 추억을 곱씹는 추모사를 했다. 이 회장과 김 전 회장이 처음 만난 건 지난 1958년 봄이다.

 

이 전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강당 한 구석에 있던 레슬링 반에서 7~8명의 신입생 레슬링 반원 지망자들과 상견례를 했다"며 “유난히 피부가 희고 눈이 깊고 귀티가 나는 당신(이 회장) 보고 ‘왜 하필 레슬링 반을 지원했냐고’ 물었다”고 썼다. 당시 이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몇 년을 일본에서 살았는데 당시 일본은 물론 세계프로레슬링의 영웅이던 역도산의 경기를 많이 보고 존경했기 때문에 레슬링을 하고 싶어졌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 유년 시절 모습 /삼성

 

김 전 회장의 기억 속에는 애견 사랑이 남달랐던 이 회장의 모습도 있다. 김 전 회장은 “수년 전에 부인 홍라희 여사께 (처음 봤던 애견) 스피츠 이야기를 했더니 (이건희) 회장께서 15년 이상 사랑하던 개인데 어느 날 출장에서 돌아오던 회장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하며 이층에서 뛰어 내리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고 전했다.

 

‘반도체 거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은 이미 대학 시절부터 전자제품에 흠뻑 빠져있었다. 이 전 회장은 “사대부고 은사님이 1964년 도쿄올림픽에 참석했다가 (당시 유학 중이던) 이 회장의 배려로 이 회장 댁에 묵었다"며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이 회장 방에 올라 가보니 각종 전자기계 부품이 가득하고, 이 회장 자신은 밤을 새며 라디오, 전축, TV등 전자제품들을 조립하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는 또 “요즘 미술이나 건축하는 사람들 입에 자주 회자되는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즐겨 사용했다는 말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가 이 회장 머릿속에는 “신은 품질에 있다”(God is in the qualities)로 오래 전부터 각인돼 있는 듯 했다"고 말했다.

 

또 예부터 전해오는 ‘승어부(勝於父)’를 소개했다. 김 전 회장은 “아버지는 아들들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라고 한다. 특히 성공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많은 심리적 부담과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유업을 크게 융성시키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승어부에 대해 “아비를 이긴다기보다는 아비를 능가한다는 것으로 효도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만큼 크게 승어부해 효도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삼성그룹을 100배 1,000배 키웠다고 이야기들 하지만 당신의 성취를 수량으로만 가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취의 내용과 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 국민이 만끽하는 대한민국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어떻게 수량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 11일 작성한 에세이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오래된 티베트의 속담처럼 우린 지금 내일(來日)을 먼저 맞게 될지 내생(來生)을 먼저 맞게 될지 장담 못할 나이에 와있습니다. 이 회장과 동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하고 또 많은 기회는 아니었으나 같이 교유 할 수 있었음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 순 한국식 표현으로 응원합니다.

 

Fighting!”

 

2020.10.28 09:53

석남준 기자

 

 

25년前 이건희의 족집게 예측 “반도체 다음 돈버는건 제약”

https://www.chosun.com/economy/industry-company/2020/11/17/AV6YWJG7BFDH3H5O3XVRYDIXDI/?utm_source=newsletter&utm_medium=email&utm_campaign=newsletter

 

 

◇1993~1996년 ‘신경영’ 지휘 당시 육성 테이프… 월간조선 단독 입수

 

“의료 산업은 21세기에 꽃이 필 거야. 생산으로 돈을 버는 건 메모리(반도체)가 마지막일 거야. 미래를 보지 않고는 크게 돈 벌 수 있는 게 없어. 특히 길게 보고 준비해야 할 건 제약 산업이지. 일단 해외 특허부터 확보하고, 세계적 제약회사 하나 사는 것도 생각해 봐.”

 

지난 1995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의 지시다. 삼성의 바이오산업 진출과 성공의 바탕에는 이 전 회장의 25년 전 구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전 회장이 1993~1996년 3년간 업무 지시한 내용이 담긴 육성이 공개됐다.

 

월간조선은 현명관 전 삼성 비서실장이 보관하던 이 전 회장의 육성 녹음테이프 30개(약 17시간 분량)를 입수해 17일 발간하는 12월호에 보도한다. 녹음테이프에는 이 전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이후 임직원에게 강조한 경영 철학과 그 실천 전략,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고민과 우려 등이 포함돼 있다.

 

 

◇"생산으로 돈 버는 건 반도체가 마지막... 제약 산업 준비해야"

 

이 전 회장의 육성 녹음테이프가 존재하는 건 그의 당부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그룹의 목표와 회장의 경영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임원과 일반 직원들인데, 회장에서 비서실-사장-임원-직원으로 전달되는 동안 뜻이 왜곡돼서는 곤란하다”며 “내 얘기와 지시, 회의 내용을 그대로 녹음해서 직원들 앞에서 틀어주라”고 지시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이 지난 1993년 미국 경제지 포천과 인터뷰하는 모습. 이 전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전자 임원들을 소집해“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한 뒤 삼성전자는 품질 경영, 디자인 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이뤘다. /삼성그룹

 

그는 늘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내가 더 걱정하는 건 다음 세대야. 1997~1998년이 되면 기본 경쟁력이 안 돼서 진짜 불경기가 오게 돼.” “지금 반도체가 잘되고 이익이 몇 조원이 나고 하니까 다들 내가 기분 좋아하고 들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더 불안해.” 이를 두고 삼성 안팎에선 이 전 회장이 직감적으로 곧 위기가 닥칠 것임을 예견했다고 보고 있다. 삼성은 이 전 회장의 지시로 일찌감치 위기를 대비했고, 어떤 기업보다 IMF 외환 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녹음테이프에는 제약 산업을 비롯한 미래 신산업에 대한 이 전 회장의 고민이 담겨 있다. 그는 “철강·반도체·자동차·전자 같은 투자 집약적인 대형 산업과 인프라를 지금 다 해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라며 “지금 제1, 제2 이동통신 나오는데 앞으로 제4, 제5 이동통신 시대로 갈 거야”라고 말했다. 실제 삼성은 AI(인공지능)·5G(5세대 이동통신)·바이오·전장(電裝) 등을 ‘4대 미래 사업’으로 꼽아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이 격분했던 순간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업종은 포기할 거야.” 1994년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한국중공업 현장에서 주요 부품을 촬영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전 회장이 한 말이다.

 

 

◇"관리고 정치인이고 문제야"

 

학력·성별과 관계 없이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대우하는 능력주의를 삼성에 자리 잡게 한 이 전 회장의 인사 원칙도 엿볼 수 있다. 이 전 회장은 “고졸 중 실력 있는 이는 정직하게 올려주자고. 과장이든 부장이든 이사든 달아줄 수 있어야 돼”라고 말했다.

 

고졸 출신으로 삼성전자 임원이 됐던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전 회장 빈소를 찾아 “(이 전 회장이) 늘 보잘것없고 배움이 짧은 저에게 ‘거지 근성으로 살지 말고 주인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이 전 회장은 이런 말도 남겼다. “절대로 파벌 만들면 안 돼. 하나회 같은 거 보라고. 사람은 주기가 있어서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실수하면 바로 바꿔버리고 그러면 사람이 클 수가 있나. 인간이 일 년에 석 달 꽃피지 못해.”

 

이 전 회장은 삼성이 단순한 일터가 아닌 임직원의 보금자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직원 의식주, 건강, 자식 교육 이런 걸 회사의 영역으로 갖고 와야 돼. 희망이 있어야 되고 자식이 잘 자라줘야 되고 부모가 편안해야 되지. 노인과 아이들을 중요시하지 않는 나라는 망하게 돼 있어. 젊은 사람들이 전부 도망가 버린다고. 내가 사업이나 공장을 할 때마다 노인정, 탁아소 만들라는 게 그 얘기야.”

 

녹음테이프에는 그가 정치권을 향한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대한민국에 몇 사람 빼놓고 나라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다 자기 잘살 생각뿐이지. 관리고 정치인이고 문제야.”

 

2020.11.17 03:00

석남준 기자

 

 

“삼성 덕에 한국인이라 말해”

https://www.chosun.com/economy/industry-company/2020/10/27/75RC3P3L7JA2FBUABXSTISB2EA/

 

이건희가 남긴 유산2030, 이건희를 다시보다

 

“우리나라 경제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아주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를 찾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한때 삼성과 자동차 산업을 놓고 사활을 걸고 싸웠던 국내 2위 그룹을 이끌고 있는 후배 기업인이 ‘1등 DNA를 심어줘서 감사하다'는 추모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해외 시장 등에서 조롱거리였던 현대·기아차 역시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 속에서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 1위(2분기 영업이익 기준)를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25일 타계한 이 회장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이건희 1등 정신은 삼성그룹뿐 아니라 우리 산업과 사회 전반에 자긍심을 불어넣고, 동시에 자극제가 됐다”며 추모하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고 있다. 한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신세계그룹도 “고인은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식에서 보드에 '새로운 신화 창조'라고 서명하는 이건희 회장./삼성전자 제공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 회장이 남기고 간 ‘1등 정신’이라는 유산을 되새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고 이 회장에 대해서는 그룹 지배 구조, 비자금·노사 문제 등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의 별세를 계기로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는 “최근 코로나 사태 등 경제 위기 상황과 말[言]의 향연만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기업인과 일반 시민 모두 ‘우리도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실천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추모 분위기가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삼성(이건희 회장)을 저평가하지 않았나 되새겨 볼 일이다.”

 

“한국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어준 삼성, 지금 한국의 위상은 삼성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상에서도 고(故)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겁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경영 능력이 재조명받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의 별세 사실이 알려진 25일 오전 10시부터 이날 오후 4시까지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된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약 18만개에 달했다. 한 사건에 대해 10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그동안 온라인 댓글 특성상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틀간 달린 댓글의 80~90%가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을 둘러싼 각종 수사, 압수수색, 재판 관련 뉴스만 접하며 자라온 청년들이 지난 이틀간 고 이 회장의 업적을 다룬 기사들을 보며 젊은 시절 그의 기업가 정신에 열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은 그를 ‘현대판 이순신’에 비유하며 구국의 영웅으로 칭하고 있다.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는 "이 회장의 세계적 영향력은 세종대왕보다 낫다. 한글이나 금속활자를 칭송해 봤자 한국 안에서의 일인데, 세계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친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것이야말로 위인으로 칭송받을 일”이라고 썼다.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도 “이 회장은 국민장(葬)해줘야 한다.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 수십조(원)를 끌어올린 사람”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은 “기업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4차 산업 시대에 희망이 있다”고 추모했다.

 

대구 삼성상회 옛터에서 추모식

- 26일 오후 대구 인교동(현 성내3동) 삼성상회 옛터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추모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거리 곳곳에 추모 현수막을 걸어 고인을 기렸다.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본금 3만원을 갖고 시작한 무역회사다. 이건희 회장은 이곳에서 200여m 떨어진 이병철 회장의 고택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동환 기자

 

 

시민과 네티즌들은 이 회장이 만든 ‘1등 기업 삼성’ 덕분에 세계에 나가 당당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썼다. 특히 많은 시민이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이 회장의 어록을 거론하며 “2류는 1류가 되기도 하는데, 4류는 5류, 10류로 떨어지고 있다"고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한 네티즌은 “해외에 나가 보면 태극기보다 더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 삼성의 로고며 광고였다. 자랑스러운 기업을 일구는 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기업을 지원하는 일, 이런 게 바로 나라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내 각 계열사 소속 직원들도 사내 온라인망에 마련된 온라인 추모관에서 2만개(오후 3시 30분 기준)가 넘는 댓글을 달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이끌었을 때 한국 경제가 도약하고 성장하던 시기였고, 한국 경제성장에 삼성전자와 반도체 사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지금도 그런 기업과 산업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추모 열기가 더욱 확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 정·관계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고 이 회장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결과 한국도 미국·일본·독일 등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그의 공을 평가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추도사에서 “이건희 회장이 걸었던 길은 불굴의 개척 정신으로 초일류 기업을 넘어 초일류 국가를 향한 쉼없는 여정이었다”면서 “우리 후배들은 회장님의 그 큰 뜻을 소중히 이어받아 일등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도 조문을 마친 뒤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며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였다”고 말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자 시절 고 이 회장을 만난 일화를 언급하며, “당시 이 회장은 ‘난 지금 반도체에 미쳐있다’고 말했다. 오늘의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사랑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2020.10.27 00:07

신은진 기자, 김강한 기자, 안영 기자

 

 

이건희(李健煕, 1942년 1월 9일 ~ 2020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