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춘(共和春) / 인천 1912, 짜장면의 원조
• 위치 : 인천 중구 북성동3가 5-6번지 공화춘
• 창업 : 1912년
• 창업자 : 산둥 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于希光, 1886년 ~ 1949년)
• 면적 : 846.26㎡
• 국가등록문화재 제246호(2006년 4월 14일 지정)
1905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는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때 약 40여명의 군역상인이 함께 들어옴으로써 공식적으로 화교들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화교유입의 길이 터지면서 인천공원(구 자유공원) 인근 북성동 일대 5,000여평 부지에 화교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 곳을 청관거리라 하였고, 그들의 고급음식을 청요리라고 했다.
1912년
이 청관 거리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간판을 걸고 처음으로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 후 1912년 공화국의 밝아오는 아침이라는 뜻의 공화춘(共和春)이란 상호를 내 걸고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고 자장면의 역사 1905년은 현재 공화춘의 전신인 산동회관이라 하겠다.
2005年
10월 자장면 축제기간 동안 국내외의 많은 매스컴들이 앞다투어 공화춘을 취재하여 다양한 논점들로 방송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맥상통하는 내용은 [자장면의 원조 공화춘] 이었다.
〈한국의 차이나타운〉
인천 서쪽에 작은 중국이 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대통령 시절, 화교사회를 겨냥한 외국인 토지, 건물 등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법개편, 인플레이션과 부익부 빈익빈을 몰아낸다는 기치아래 행해졌던 화폐 개혁으로 인해 상당수의 재력과 능력을 갖춘 화상(華商)들의 경제적 입지가 약해지면서 인천.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근거로 사업을 운영하던 것을 포기하고 세계 각국으로 원활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그 근거지를 옮기면서 우리나라의 차이나타운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지금은 외국인들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미국. 일본 등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차이나타운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인천시에서 차이나타운 개발 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많은 자본이 몰리고 있고, 특히, 월미관광특구 지정이 발표되면서 송도 관광개발특구와 관광 경유지로 연계하여 개발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에 있고 다양한 개발안이 쏟아지고 있다. 그 첫 작품이 인천역 앞의 차이나타운 內에 있는 공화춘(共和春)이다.
〈자장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음식 !
자장면은 현재의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읽으면 '작장면'이라고 읽혀집니다. 중국식 발음으로는 '자장미엔' 또는 '짜장미엔'이라고 읽혀지며 '작'의 중국어 발음이 한국어의 '자'를 발음하듯 하며 듣는 이에 따라 '짜'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쓰는 '자장면'은 한국식 발음과 중국식 발음이 혼합되어 불리어 지는 것이다.
작(炸)은 '물에 튀기다'라는 뜻이며,
장(醬)은 된장 등의 발효식품 등을 뜻하고,
면(麵)은 밀가루, 국수라는 뜻으로
우리가 즐겨먹는 자장면을 풀이 할 수 있다.
1883년에 개항한 인천에는 곧 청국지계가 설정되고 청인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1920년부터 항구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중국음식점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대중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우리 서민들은 신기한 맛과 싼 가격에 놀랐고, 청(淸)인들은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부두(현 인천역부근, 하인천)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자장면 이었다.
공화춘(共和春)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하는 옛 중화요리 식당 건물이며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46호이다.
1912년에 개업한 공화춘은 대한민국에서 짜장면을 최초로 개발하여 판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식당은 1983년에 폐업하였고, 2012년 4월에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운영되고 있다. 역사 1883년에 인천의 개항과 더불어 현재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일대에는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공화춘 건물은 청나라 조계지에 1908년 무렵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중정을 갖춘 지상 2층으로 건립되었다. 준공 당시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객잔으로 사용되었다.
중화요리 식당 공화춘은 산둥 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于希光, 1886년 ~ 1949년)이 1912년에 개업하여 운영하다가 1983년에 폐업하였다. 공화춘의 전신은 현재 공화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우희광이 개업한 숙식업소 산동회관(山東會館)으로 1912년경에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춘(공화국 원년의 봄)으로 개명하였다.
현재 장소로 옮겨 온 시기는 이르면 1917년, 늦어도 1934년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까지 경인 지역 5대 중화요리점의 하나로 명성을 유지하였다.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하였고, 이후 다른 한국인이 인근에 공화춘 이름을 달고 새로운 점포를 열었다. CJ가 로열티를 제공하고 현 공화춘 대표로부터 상표권을 구매하여 독자 사업을 구상하다가 GS25에 상표 사용권을 넘겼다.
2012년 4월 28일에 복원 과정을 거쳐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7개소의 전시공간과 기획전시실을 갖추어 개항기 인천의 화교와 짜장면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또한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재현하였으며, 기획전시실은 공화춘의 창립자 우희광을 기념하여 ‘우희광 기념홀’로 명명하였다.
인천차이나타운의 발전은 중국요리 전문점인 ‘공화춘’이 들어서기 전 후로 나뉜다.
2004년 당시 인천차이나타운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상태. 이에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나서 인천차이나타운의 투자유치를 진행했지만 차이나타운의 투자 가능성을 보지 못한 투자자들이 이에 더딘 관심을 보이며 발전 가능성이 희미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공화춘의 신축건물이 완공되고 간판이 걸린 후 영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인천차이나타운의 투자가 급증했다.
이후 공화춘 근처 상권들은 그에 따른 발전들이 속도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부흥을 이어 나가 현재 인천차이나 타운이 지역경제의 큰 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공화춘’ 이현대 대표가 있다.
공화춘은 1905년 인천 설린동에 위치해 자장면을 정식 메뉴로 탄생시킨 중국음식점으로 우리나라의 중국음식의 부흥을 이끈 음식점이다.
공화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그 빛을 발하다
이현대 대표가 설린동의 공화춘을 방문했던 당시에는 폐허와 가깝도록 간판만 달려있었다. 그가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이현대 대표는 지난 2004년 경제발전의 불모지라 여겼던 인천차이나타운에서 공화춘의 간판을 내건 뒤 기어코 성공의 신화를 이뤄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공화춘이 성공하기까지는 이 대표의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했다. 이 대표는 매일 아침 마당을 쓸고 물을 뿌리며 마당쇠 역할과 일명 ‘셧터맨’을 자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부지런함은 호텔리어부터 카센터, 월미도에 위치한 130평의 대형 커피숍 대표, 그리고 용산의 ‘용일탕’ 대표 등 다양한 경험을과 서비스 계통의 굵은 잔뼈가 보탬이 됐다.
이현대 대표
특히 지역의 화교들도 이현대 대표의 이러한 모습에 감탄하며 이 대표와 더욱 좋은 교류를 쌓고자 했다. 특유의 부지런함. 가난의 역경을 이기고자 시작했던 수 많은 일들. 그리고 그안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투지와 의지.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이현대 대표와 공화춘을 만들었고, 현재 공화춘과 인천차이나타운 지역 모두 부흥을 이루게 됐다. 좌절과 절망속에서 피어오른 한줄의 희망. 그것은 ‘사람’
지금의 공화춘 건물은 사연이 많은 건물이다. 그는 초기 인천차이나타운에 공화춘 간판을 걸 신축건물을 짓고자 계획한 뒤 부족한 자금을 매꾸기 위해 여러 기관에 투자요청을 의뢰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인천차이나타운은 쇠퇴했기에 그 누구도 이 대표를 믿어주지 않았고 그의 시작을 시기하는 질투들도 그를 힘들게 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가장 힘들고 간절했던 시기가 이 때라 회상했다.
이 대표가 부지런히 산 덕의 보답일까. 사람을 당기는 힘이 있었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그를 믿어준 한 지점장의 믿음과 지원 덕분에 공화춘 신축건물을 완공해냈다. 이 대표는 당시 그의 아내 역시 힘든 시기를 극복하며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다고 회상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다시 0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어요. 지금 이 99점에서 1점을 더해 100점이 되기 위해선 신의 시험을 넘어야 했죠.
그 시험의 끝자락에서 나를 믿어준 한 사람의 손길이 제게 희망의 1을 채울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받았던 이 희망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습니다” 2%의 갈증을 채워줄 오아시스(OASIS)가 많아지길 바라며 이현대 대표는 인천의 28번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다. 그가 1억원 이상을 기부해야 하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기까지의 결정은 너무나 어려웠다.
특히 그는 본래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작게나마 소년소녀 가장들만을 몰래 선택해 배움의 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대표는 처음 소년소녀 가장을 지원할 당시에도 3명 중 한명만을 택하라는 권유가 어려워 한꺼번에 3명을 모두 지원하게 됐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이 대표는 머뭇거렸던 처음과는 달리 이후 뿌듯해지는 자신의 감정에 또 다른 감사함을 느끼며 세상에 또 다른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2%의 갈증을 채워주고 싶다는 이현대 대표. 그는 현재 NGO조직인 한국자유총연맹(KFF)의 인천중구 지회장을 엮임하며 인천 곳곳의 오아시스가 되고자 한다.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고 나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그동안 몰랐지만 기부란 돈만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저는 세상을 다시 보는 시각도 가질 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 동안 살면서 누군가 저에게 2%라는 도움을 주었다면 공부던 사업이던 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습니다. 저는 항상 더 나은 것을 하고자 할 때마다 조금의 목마름을 느꼈었고, 그런 아쉬움들이 늘 제 가슴속에 갈증으로 남아 있었죠. 부족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2%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며 조그마한 소망을 비추었다.
2015년02월28일 20시22
(1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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