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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望〕구봉광산 붕괴, 368시간 35분 만에 김창선씨 구조

Paul Ahn 2022. 11. 10. 08:30

구봉광산 붕괴, 368시간 35분 만에 김창선씨 구조

(cctoday.co.kr)

 

1967 8 22일 붕괴 사고 김창선氏 갇혀

해병대 통신병 출신 김씨 사무실과 통화 성공

전국 생방송 박정희 대통령 빠른 구조 지시

368시간 35분 만에 구조 온세상 감동 퍼져

90 노인된 김창선氏, 부여서 봉사활동 지속

 

▲ 구봉광산에 갇혔던 김창선 씨 구조 당시 모습(왼쪽)

 

미국 서부 개척자들이 금광을 찾아 몰려 들 듯이 충남 청양군은 한 때 금을 캐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구봉광산. 최고 절정기였던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구봉광산에서만 캐낸 금이 1113 6100g이었고 은 () 33g이 생산됐으니 우리나라 최고의 '노다지'라고 부를 만 했다. 광산 근처에는 술집이 즐비했고 전국에서 모여든 한량들로 항상 북적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던 폭풍이 구봉광산을 강타했다. 1967 8 22일 낮 1240, 지하 125m에서 막장의 물을 퍼내던 김창선(당시 35· 처음에 양창선으로 알려짐) 씨가 갱목이 무너지면서 꼼짝없이 갇히고 만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태풍이 분 것은 아니다. 그 무렵 광산 매몰사고는 흔한 것이었고 수없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보통 사고기사로 취급됐다.

 

광산 측에서도 구조작업을 서둘렀지만 파이프 설치가 실패로 끝나는 등 장애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가 지하 125m 막장에서 일어났다.

 

김창선 씨는 이곳에 오기 전 해병대에서 근무했고 특히 통신병이었다. 그래서 막장에 설치된 갱도 연락용 전화기를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찾아냈고 이것을 이리저리 조립하여 사무실과 통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다!" 생사를 모를 뿐 아니라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때에 지하에서 전달된 산자의 음성은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 때 행운의 조연자가 나타났다. KBS 대전방송 오철환 기자가 아이스박스만큼 큰 구닥다리 녹음기를 메고 현정에 나타났는데 때마침 구조팀과 김창선 씨가 전화 통화하는 현장을 함께 한 것이다.

 

오 기자는 흥분해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녹음을 시작했다.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우리 정애(), 경복이(아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지하에 갇힌 한 아버지의 이 순박한 목소리는 그날 밤 전국 뉴스로 생생하게 전달됐고 전국민이 감동에 휩싸였다. 여기저기 교회와 사찰에서 김창선 씨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법회가 열렸고 신문 방송은 연일 이 뉴스가 톱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을 급파하면서 빠른 구조를 지시했다.

 

이런 국민적 성원 속에 그는 그 해 9 6일 오후 6시 마침내 구조돼 갱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인간 승리'의 만세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국에서 취재진이 이 광경을 지켜봤고 그 가운데는 NHK 등 외신들도 눈에 띄었다.

 

한 때 너무 춥고 배가 고파 절망한 나머지 빨리 죽을 수 있게 해달라며 구조진에 호소하기도 했던 김창선 씨는 그러나 끝내 그 절망을 이기고 368시간 35, 날수록 16일의 사투를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충남 땅 청양 산속에서 한 생명의 존귀함을 온세상에 감동적으로 펼친 휴먼스토리이기도 했다.

 

김창선 씨는 어느덧 반세기가 흘러 90의 노인이 됐지만 부여에서 '해병전우회' 회원으로 백제문화제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땐 빠짐없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구봉광산은 과거의 영화를 땅에 묻은 채 휴광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아직도 땅속에 17t 상당의 금이 있다고 보며 개발의 꿈을 그리기도 한다. 세계금융 시장에서 금의 가치가 자꾸만 커지는 상황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이 인간임을 이 사건은 일깨워 주고 있다.

 

충청투데이

2019 08 15 18 41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15일만에 생환한 구봉광산 매몰 광부 김창선

(citizenmedia.or.kr)

 

지난 1 10일 대전국립현충원에서는 해병 7기 김창선 일병(향년 90)의 안장식이 가족과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는 지난 1950년 해병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면서 옹진반도 전투에 참가해 한 쪽 눈을 실명당하는 전상을 입었다. 이후 국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했고, 국가유공자 상이용사로 지정돼 연금을 받아왔다. 그는 이러한 참전용사로서의 자격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것. 하지만 그는 참전용사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더 유명하다.

 

이른바 1967 8 22일에 발생한구봉광산 매몰사건이다. 충남 청양군 사양면(현 남양면)에 있는,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金鑛)이었던 구봉광산이 붕괴되면서 지하 125m 갱도에 갇혀 있다가 15 8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인물이다.

 

이 기록은 1995 6월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박승현 양이 15 18시간 만에 구조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매몰사건 생존기록 최장시간으로 남아있었다.

 

양수기 기술이 있던 김창선 씨는 광산에 취업한지 6년 후인 1967 8월에 갱 속에서 지하수를 퍼내는 양수작업을 하다가 금광이 무너지면서 갱도에 갇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암흑천지가 된 무덤과도 같았던 지하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며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해병대에서 통신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대피소에 있던 망가진 군용 전화기를 이용해, 외부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구출하라는 여론이 급등했다. 전국의 일간지, 주간지 등 13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제주일보>, <뉴욕타임스> 기자도 청양으로 급파돼 취재경쟁을 벌였다. 당시 대부분의 취재차였던 검은색 지프가 청양 거리를 메울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조그만 도시 청양으로 모여졌다. 청와대까지 나서서 비서관을 현지에 급파해 조속히 구출하라고 독려했다.

 

김창선 씨 구조작업에 15일간 연 인원 2200여명이 동원됐으며 미8 MARS 헬리콥터와 전기톱 등 장비가 지원됐다. 또 미국의 구출 전문회사인 더쳐社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며 장비를 동원해 구조 활동을 도왔다. 구조진행 상황과 김 씨의 상태가 언론에 연일 중계됐다. 한 치 앞도 분간 안 되는 어둠 속에서 공포와 배고픔에 떨었던 그는 전화를 통해 때로는 생존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음식을 달라고 전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죽음 앞에서세상에 나아가 인사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라는 절망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때마다 언론들은아직도 살아있다고 대서특필했으며 국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이를 지켜봤다.

 

김 씨는 파이프에서 간혹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며 연명했고, 200W짜리 전구를 끌어안으며 체온을 유지했다. 매일아침 통화를 통해 건강을 체크했다. 생환을 애타게 기다리던 국민들은 김 씨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구조될 당시의 김창선씨 모습. 대한뉴스 영상 갈무리. ⓒ영상역사관

 

1967 9 6일 밤 9 15. 드디어 금광 지하 125m 갱 속에 갇혀있던 김창선 씨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출되는 상황은 당시 KBS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갱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전 국민은만세를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이 광경은 국내는 물론 일본 NHK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다. 바로 55년 전의 일이다.

 

"고맙습니다. 살아나왔습니다."

 

하지만 청양 구봉산 광산 붕괴는 성장 제일주의만을 앞세워 안전이 뒷전으로 밀린 사고였다. 당시 노동조합원이 회사 측에 갱내 수리를 진정한 것을 무시하고 작업을 진행시킨 것이 화를 불렀던 사고였다.

 

사고 발생 후 4년 만인 1971년 구봉광산은 폐광됐다. 금 생산량이 월 6kg에 머물러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한 때, 월 산금량이 150kg에 달했던 굴지의 구봉금광은 12만 청양군민의 돈주머니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폐광 이후 청양군은 활기를 잃어가며 50년이 지난 지금은 3만 인구로 충남 최약세 군으로 떨어졌다.

 

사고 당시 그는양창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본명이 김창선이었지만 입영통지서에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양씨로 굳어졌다고 한다. 김 씨가 갱 안에 갇혀있을 때, 부인과의 통화에서아이들을 잘 키워달라고 유언했고, 이어 당국자와의 통화에서나는 양창선이 아니다. 김씨로 성을 바꿔달라. 죽더라도 김씨로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구출되고 난 뒤, 당국의 도움으로 이름을 되찾았다. 사고가 난 이후 김 씨는 청양을 떠나 부여로 옮겨 잠사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최근까지도 부여 해병대전우회에서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했다. 부여해병전우회 이순영 회장은김창선 대선배의 빛나는 일생을 본받아 살고 널리 기리겠다고 전했고, 구본중 대원은평소 후배들을 아들처럼 애정으로 대해 주셨고, 봉사활동에도 솔선수범하셨다고 기억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장병7묘역 715-74282에 안장되어 있다.

 

우희철

2022.02.03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