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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Adidas) / 독일 1924, '아돌프 다슬러의 런닝화'

Paul Ahn 2023. 5. 30. 14:47

★아디다스(Adidas)

www.adidas-group.com

 

 

•설립 : 1924 (as Gebrüder Dassler Schuhfabrik) 1949(as Adidas)

•설립자 : Adolf Dassler

•본부 : Herzogenaurach, Germany

•직원수 : 57,016 (2018)

 

〈그룹회사〉

Reebok,  Runtastic,  Matix

 

 

1948년, 아돌프 다슬러는 아디다스를 세우고 기능성 스포츠화를 만들어, 선수들이 최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아디다스는 전 세계 160개국에 진출하였으며, 다양한 스포츠 웨어를 생산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돌프 다슬러(Adolph Dassler)는 1900년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 태어났다. 구두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세탁소를 운영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아돌프는 어렸을 때부터 원단을 가공하고, 재단하는 등 신발을 만드는 공정을 배웠다. 1920년, 아돌프는 기성 운동화가 무겁고 쉽게 닳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가벼우면서 내구성이 뛰어난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4년, 아돌프는 형 루돌프 다슬러(Rudolf Dassler)와 함께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을 세웠고, 본격적으로 스포츠화를 제작하여 판매했다. 이들은 발목 보호대가 있는 축구화, 스파이크를 박은 수제 러닝화 등을 개발하며 특허권을 얻었고, 특허 받은 운동화를 여러 스포츠 단체에 홍보하며 이름을 알렸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당시, 아돌프가 만든 운동화를 신은 육상 선수 리나 라드케(Lina Radke)가 800m 달리기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아돌프의 신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Jesse Owens)가 아돌프의 운동화를 신고 4개의 금메달을 획득했고, 이로서 아돌프 운동화는 뛰어난 성능을 인정받았다.

 

1949년, 다슬러 형제가 불화를 겪고 갈라서면서, 형 루돌프는 '푸마(Puma)'라는 스포츠화 회사를 만들었다. 아돌프는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다슬러(Dassler)에서 이름을 딴 '아디다스(adidas)'라는 브랜드를 런칭하고 삼선 무늬(Three Stripes)를 만들어 상표로 등록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이 아디다스의 신발을 신고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우승을 거두었다. 결승전 당시, 비가 내려 잔디가 미끄러운 상태에서도 독일 선수들은 스파이크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아디다스 축구화 덕분에 잘 달릴 수 있었고, 이는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경기가 방영되면서 아디다스는 큰 주목을 받았고, 전 세계로부터 수요가 빗발쳤다.

 

1960년대부터 아디다스는 스포츠화뿐만 아니라 스포츠 의류, 축구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0년, 아디다스가 제작한 축구공 '텔스타(Telstar)'가 멕시코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된 것을 시작으로, 아디다스의 축구공이 연달아 월드컵 공인구가 되었다. 또한, 이어진 올림픽에서도 대다수의 선수들이 아디다스의 제품을 사용하면서 아디다스는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디다스(Adidas)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601.010140743080001

 

세계인에게 너무나 친숙한 심벌인 삼선과 불꽃 마크로 대표되는 독일의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Adidas). 아디다스와 관계없는 무수히 많은 스포츠 상품이 이 삼선 마크를 무단으로 이용할 정도로 세계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심벌이다. 월드컵축구대회의 공식 후원사 및 각종 스포츠 경기의 서포터 기업으로 스포츠 용품의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디다스의 역사는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인 아돌프 다슬러와 그의 형 루돌프 다슬러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차 대전 이전의 독일에서 성장했고, 어려서부터 실내용 슬리퍼를 만드는 가내 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몇 해가 흘러 그들은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운동화를 만드는 사업에 뛰어든다.

 

축구선수이기도 했던 아돌프는 불과 20세에 이미 신발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상태였기에 축구화와 테니스화, 육상화의 제작도 병행하게 됐다. 그들의 관록이 성장함에 따라 신발에 대한 평판 역시 따라서 올라가게 되었으며, 얼마 뒤 다슬러 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성공의 순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찾아온다.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육상 스파이크를 가지고 올림픽에 참가중인 육상의 유력한 메달 후보 제시 오웬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스파이크를 신고 경기에 참여해달라고 설득해, 이 신발을 신은 오웬스는 100m를 비롯해 무려 4개의 금메달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들의 스포츠화는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한다.

 

사업이 성공궤도에 올랐을 무렵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다슬러 형제는 갈등을 겪게 되어 1947년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형인 루돌프 다슬러는 자신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루다(Ruda)’라는 이름의 스포츠 브랜드를 만들었고, 이 브랜드는 오늘날 푸마(Puma)가 됐다. 동생인 아돌프 다슬러 역시 자신의 애칭인 아디(Adi)와 성을 따서 1949년 ‘아디다스(Adidas)’ 브랜드를 설립하게 된다.

 

아디다스는 다른 브랜드와는 달리 공식적인 심벌이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바로 삼선(3stripe)과 불꽃 마크(trefoil)로 1972년부터 1996년까지는 불꽃 마크가 아디다스의 공식 로고로 쓰였고, 1997년부터는 삼선을 새롭게 디자인한 심벌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두 심벌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선은 다른 브랜드와는 달리 디자인 측면만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기능적 필요에 의해 창안한 기술이 그대로 심벌에 적용된 것이다. 신발을 견고하게 묶어 신발과 발이 밀착될 수 있도록 갑피 부분에 가죽을 덧댄 것이 오늘날 삼선의 심벌로 재탄생됐다. 1949년 이러한 삼선이 처음으로 적용된 제품이 출시되었고 이를 계기로 ‘The bran with the 3strip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삼선 디자인을 제품에 모두 적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다슬러 일가는 저마다 아디다스의 제품을 디자인하거나 생산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진화하는 운동선수의 요구에 세심하게 부응하며, 스포츠 과학기술의 선두를 유지하고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과 기술이 바뀌었어도 90년 역사의 아디다스가 추구하는 목표는 설립자 아돌프 다슬러가 지향해온 것과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스포츠 브랜드가 되는 것’. 아디다스는 최고의 자리에서도 이 목표를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달리고 있다.

 

<프리밸런스·메지스 수석디자이너>

 

 

나이키 신발만 보면 한숨 푹푹 쉬는 이 회사

(heraldcorp.com)

 

왜 다들 나이키만 좋아해? 아디다스 좀 신어 주세요.”

 

아디다스가 하는 말이 아니다. 아디다스가 뜨면 웃고 아디다스가 지면 우는 국내 회사가 있다. 바로 화승엔터프라이즈. 대표적인 아디다스 ODM(제조업자 개발생산 방식) 업체로, 사실상 아디다스의 성패에 회사 운명이 좌우된다.

 

요즘 아디다스가 흔들리고 있다. 올해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까지 제기된다. 자연스레 화승엔터프라이즈의 실적이나 주가도 올해 부진한 흐름이다.

 

화승엔터프라이즈는 화승그룹의 계열사다. 화승그룹은 1953년부터 부산에서 고무신을 만들면서 시작한 국내 대표 신발회사다. 화승엔터프라이즈는 아디다스 ODM 생산이 주력 사업이다. 올해 1분기 기준 매출의 89%가 신발부문에서 나왔다.

 

화승엔터프라이즈의 가장 큰 경쟁력도 바로 아디다스 ODM에 있다. 회사 측은아디다스그룹이 지정한 업체에서 원재료를 구매해 수급이 용이하고 가격도 안정적이라며오랜 거래 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가격과 품질을 보장받고 있다고 밝혔다.

 

아디다스에서 화승엔터프라이즈가 차지하는 점유율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2016년엔 13%였으나 작년 기준 21%까지 올랐다.

 

아디다스와의 안정적인 계약 관계는 큰 강점이지만, 문제는 아디다스 자체가 흔들리면 강점은 약점이 된다. 아디다스는 최근 컨퍼런스 콜에서 올해 매출이 감소, 7억유로( 1조원)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 전망대로라면 연간 단위로 31년 만에 기록할 첫 적자다.

 

미국 힙합 스타인 예(카녜이 웨스트)와의 협업 계약 종료로 콜라보레이션 브랜드 이지(Yeezy) 제품 판매가 중단된 여파가 컸고, 중국에서도 불매운동이 일면서 중국 매출이 급감했다.

 

2023.08.06 17:51

dlcw@heraldcorp.com

 

 

"아디다스 내년 3월까지 리복 브랜드 매각"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2010231276Y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업체 아디다스가 리복 브랜드를 매각할 계획이라고 독일 월간지 '매니저 매거진'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 잡지는 카스퍼 로스테드 아디다스 최고경영자(CEO)가 내년 3월까지 리복 매각을 마무리할 계획이라면서 미국 의류업체인 VF 코프와 중국의 안타 스포츠 등이 리복 인수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아디다스와 VF 코프는 내용 확인을 거부했다.

아디다스는 지난 2005년 나이키가 장악하고 있는 미국 시장 공략 강화를 위해 리복을 38억달러에 인수했으나 최근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투자자들로부터 매각 압박을 받아왔다.

 

지난해 아디다스가 기록한 리복의 장부가액은 2018년의 절반 수준인 9억9천500만달러에 불과했다.

 

리복의 올해 2분기 매출은 2억2천800만달러로 지난해 동기보다 44% 급감했다.

 

2020.10.23

 

 

아디다스 창업자 아돌프 다슬러

http://www.apparelnews.co.kr/2011/inews.php?table=internet_news&query=view&uid=66562

 

2등은 싫다 … 끊임없는 혁신으로 정상 도전

 

아디다스의 심벌로 꼽히는 3선 로고는 가죽 신발 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세 번 묶은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다슬러가 신발 브랜드인 카르후 스포츠로부터 위스키 두병에 매입한 것이라고 한다.

 

훗날 세 개의 나뭇잎 밑에 3선을 받치도록 해 오늘날의 로고가 완성됐다.

세 개의 나뭇잎은 세 개의 대륙을 향해 뻗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루돌프와 아돌프 다슬러 두형제간의 반목은 헤르조겐나우라흐 마을 강을 사이에 두고 푸마와 아디다스로 갈라선 이후에도 94년 미국의 나이키가 등장하기 까지 한동안 세계 스포츠웨어 시장을 석권하며 난형난제의 비지니스 경쟁을 치뤘다.

 

예컨대 1963년 전설의 복서 모하메드 알리가 아디다스 복싱화를 신고 소니 리스튼을 눕히며 아디다스가 ‘불가능은 없다(Nothing is impossible)’라는 캐치 플레이즈로 브랜드 인기 몰이에 나섰는가하면 푸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월드컵 3년 패의 브라질 축구 영웅 펠레가 시합전 푸마 축구화 끈을 매는 모습을 전 세계에 중계되는 TV에 연출시켰던 모습들이 양사경쟁의 단면이다. 어쩌면 아디다스의 경쟁력은 ‘형제의 난’에서부터 내려오는 DNA가 아닐까 읽어지는 대목이다.

 

아돌프 다슬러와 그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의 사후,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아디다스는 프랑스 사업가 베르나르 타피에, 프랑스 국영은행 크리디 리오네, 로베르 루이 드레퓌스로 주인이 바뀌면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1989년 베르나르 타피에는 차입금으로 아디다스를 인수했다. 인수대금은 2억4,390만 유로, 원화 약 3,009억 7500만원이었다.

 

하지만 이자를 못 갚아 크리디 리오네 은행으로 넘어갔고 은행은 이를 로베르 루이 드레퓌스에 팔아넘기게 됐다.

타피에도 결국 개인 파산에 이르는 불운이 닥쳤지만 CEO로서의 타피에와 루이스드레퓌스의 경영 능력은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디다스를 인수한 타피에는 아디다스가 근본적으로 골병이든 것이 아니라 ‘잠자는 거인’이라고 진단했다. 사업 방향만 잡아주면 되겠다는 판단으로 제품 생산 소싱을 임금이 높은 독일에서 중국 등 아시아로 전환했다.

 

또 사업 영역을 스포츠 선수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의류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패션도 넘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원조 힙합그룹으로 꼽히는 ‘런 DMC’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스트리트 스포츠웨어 선풍을 일으키며 미국 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과 함께 3선 트레이닝복 등 의류사업 확장의 길을 연 것도 타피에였다.

 

당시 중절모를 쓰고 아디다스 런닝화를 신은 런 DMC 그룹의 ‘마이 아디다스(My Adidas)’라는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타피에와 루이스 드레퓌스두 CEO를 거치는 동안 아디다스의 매출은 4배가 늘어나 75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같은 매출 신장을 바탕으로 97년에는 스키전문의 살로몬그룹, 이어 테일러메이드 골프를 인수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기업 공개도 루이스 드레퓌스 시절에 단행됐다.

 

2017년 06월 19일

장병창 객원기자, appnews@appare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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