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解力〕한국인의 문해력은 나쁘다.
https://21erick.org/column/9277/
제 1편. 한국인의 문해력은 나쁘다
제 2편. 호기심을 끌어 올리고 주의를 집중하라
제 3편. 작업기억의 역량을 높여라
우리나라 국민의 문해력이 우려할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목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나오며 사회적 관심 또한 뜨겁다. 특히 교사들은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래 원격수업으로 대면 학습 기회가 줄어들면서 글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필자는 본 칼럼에서 3회에 걸쳐 문해력 저하 실태를 짚어보고 이를 개선할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문해력 정말 나쁠까?
최근 문해력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뜨겁다. 특히 한국인의 문해력이 나쁘거나 낮아진다고 한다.
문해력 혹은 리터러시(literacy)는 보통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고대에는 문학에 대한 지식 능력으로, 중세에는 라틴어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 근대에는 모국어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에 들어와 문해력은 한 측면에서만 논의되지 않는다. 사회구조가 디지털 구조로 빠르게 변화됨에 따라 문자에 해당하는 텍스트의 범위가 넓어졌다. 즉 카메라를 증강된 눈으로 받아들여 사진과 동영상을 텍스트로 받아들이고 문해력에 매체 정보의 신뢰도를 확인하는 능력을 집어넣었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문해력을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의미를 창조하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힘으로 본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는 문해력을 ‘읽기 영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수학 리터러시’, ‘과학 리터러시’를 포함한다. OECD 교육 2030 프로젝트에서는 문해력을 시각적, 청각적, 공간적 매체 및 전자 텍스트를 사용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종합적 능력으로 본다. 그러다 보니 문해력은 컴퓨터 문해력, 미디어 문해력, 정보 문해력, 수 문해력. 과학적 문해력 등으로 구분된다. 사회, 정치적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문해력을 정의하기도 한다. 글이 정치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윤리적으로 어떤 의도로 쓰였는가 등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비판적 사고력을 문해력으로 본다.
주위에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쉽거나 짧은 글은 읽어도 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드물지 않다. 한국교육방송(EBS)은 2021년 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문해력 수준을 평가했는데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무려 27%의 학생이 적정수준 미달로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11%의 학생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문해력을 보였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읽기 영역의 경우,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문해력을 보여주는 2수준 미만의 학생이 2006년에는 18.2%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34.7%로 늘어났다. 특히 기초학력 미달 학생으로 분류되는 1수준 이하는 2006년 5.7%에서 2018년에는 15.1%로 급증했다.
성인들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2008년의 국립국어원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 중 한글을 깨치지 못한 문맹률은 1.7%로 낮았지만, 성인 960만 명이 실질 문맹자였다. 이들 중에 기초적 읽기, 쓰기, 셈하기를 하지 못하는 비문해 성인 인구는 311만 명(7.2%)이었고 문자를 해독하더라도 병원이나 약국에서 처방된 투약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일상생활이 불편한 인구도 217만 명(5.1%)이나 되었다. 또한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더라도 보험 규정을 이해하는 등 공공 경제생활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가 어려운 성인 인구도 432만 명(10.1%)이었다. 2013년에 OECD(경제협력 개발기구)가 실시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도 한국인 16∼65세의 언어능력은 평균인 3수준 이하가 91.5%로 나타났다. 이는 다수의 성인이 전문 서적이나 생활 규범 등 비교적 복잡한 텍스트를 읽었을 때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문해력 수준이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다고 본다. 구미 봉곡초등학교 교사들은 초등교육에서 낮은 문해력으로 인한 학력 저하와 학습 격차를 우려한다.
“초등교육은 문해력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국어 능력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것이 초등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교과서에 나오는 제재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조차 없는 아이들이 우리 반에는 많다. 우리 반만 그런가? 문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니 프로젝트 수업이 어렵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수업 후 평가할 때 참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등 단순한 표현밖에 되지 않는다. 더 깊게 읽고, 제대로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싶다. 사회나 과학 프로젝트를 할 때 학생들에게 사료, 텍스트를 주면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 단계를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교사는 조급해지고 결국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것들을 교사 주도로 설명하고 있을 때가 있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바탕이 약하다. 늘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읽기 능력을 기르는 방식을 알고 가르쳤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읽기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선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하나? 아직 나는 모르겠다. 그냥 해서 좋았다는 보여주기 방식의 수업이 아니라 일상 수업에서 문해력이 증진되는 수업을 경험해보고 싶다.”
고등학교에 재직 중인 홍수봉 교사는 학생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지만, 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사회, 역사, 과학 교과서를 혼자 읽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수업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을 한 예로 든다.
“언젠가 모의고사를 본 뒤 한 아이가 문제가 잘못되었다면서 시험지를 들고 뛰어나왔습니다. ‘기차의 기적 소리’라는 내용이 들어간 시였는데 ‘기적’의 뜻을 미라클(miracle)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또 어떤 학생은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문장을 보고 “머리에 서리가 내리는데 왜 여름이에요?”라고 질문한 적도 있습니다.”
출처: EBS 다큐 프라임 제작진 《다시 공부, 다시 학교》
한국인의 문해력이 나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실질적 문맹을 우려할 수 있지만, 언론이 지나치게 불려서 퍼트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2013년 OECD가 발표한 국제성인역랑조사(PIACC)에서 16∼65세 한국인 평균 문해력은 최저 수준이 아니라 273점으로 OECD 평균이었다. 한국과 유사한 문해력을 지닌 국가는 캐나다와 영국이었으며 독일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은 한국보다 평균 문해력이 낮았다. 특히 16∼24세 한국인 문해력은 OECD 4위였다. 더 나아가 PIACC을 근거로 16∼65세 한국인의 언어능력 수준에 대해 91.5%를 평균 이하로 본 것도 판단 기준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PIAAC에서 정의하는 4,5 수준의 읽기 능력은 복잡한 지문 독해를 요구하는 스킬로서 대부분의 조사 대상 국가에서 10% 내외를 차지하는 최상위 집단을 보여준다. 즉 3수준을 평균으로 잡아 한국인 다수를 실질 문맹자로 보는 것은 부풀려졌다고 볼 수 있다. PIAAC를 해석하고 정리한 보고서인 《한국인의 역량, 학습과 일》만 보더라도 상위인 3,4,5 수준이 OECD는 50%, 한국은 49.8%로 차이가 없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 PISA를 보더라도, 2018년 조사에서 만 15세 한국 청소년 읽기 평균 점수는 OECD 국가 중 다섯 번째로 높다. OECD 평균 점수는 487점이고 한국은 514점이었다. 물론 한국의 읽기 점수는 2006년의 556점에서 2018년 514점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OECD 회원국 읽기 점수 평균이 2015년 493점에서 2018년 487점으로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은 동 기간 517점에서 514점으로 하락했을 뿐이다. 결국 한국 청소년들이나 성인들의 문해력이 낮다고 우려하는 건 통계수치를 봤을 때 지나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읽기 등 문해력 지표 전반을 보면, 한국인의 문해력이 나빠지고 있다는 우려는 지나치지 않다. 문해력 절대 수준은 하락하고 있으며, 고난도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다수의 청소년이 텍스트를 대충 훑어보며 개별적 정보만 발췌하는 습관에 빠져있으며 집중력도 부족하다. 더 큰 우려는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는데도 더 깊이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SNS에 게시된 글을 읽고도 잘 이해할 수 없어 엉뚱한 댓글을 다는 사람도 늘어난다. 2019년에 영화 ‘기생충’과 관련된 댓글 논란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기생충≫을 보고 SNS에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그랬더니 낱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 문제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젊은 층의 네티즌들은 “언어영역 1등급인데도 이런 말 처음 들어봐요.”, “명징이나 직조라는 어려운 말을 써서 꼭 잘난 체를 해야 하나요.”라고 댓글을 쓰면서 이동진 평론가를 현학적이라고 빈정댔다.
이런 문제는 학교나 기업에서도 나타난다. 어휘력 빈곤은 초·중·고 수업에서도 드물지 않다. EBS가 방송한 《당신의 문해력》에는 고등학교 2학년 사회 수업 장면이 등장한다. 교사는 영화 ‘기생충’을 소개하기에 앞서, 제작 초기에 그 영화의 가제(假題)는 ‘데칼코마니’였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하나같이 ‘가제’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하며, 교사가 그 뜻을 묻자 교실 한편에서는 바닷가재인 ‘랍스터(lobster)’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교사의 설명 중에 ‘양분(兩分)’, ‘위화감(違和感)’이라는 용어가 나오자 그 의미도 전혀 알지 못했다. 기업에서는 학력이나 스펙이 높은 직원들마저 직무 자료를 분석하거나, 보고서를 쓸 때 자주 어려워한다. 실제로 일부 대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텍스트 읽기와 분석 능력이 좋은 지원자를 선호하며 대학에 문해력 교육을 위탁하거나 문서를 읽고 작성하는 직무연수를 개설하기까지 한다.
디지털 문해력도 우려할 수준이다. 디지털 문해력은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소통 능력이다. 즉 다양한 매체로부터 쏟아지는 정보 중에 가짜 뉴스 등에 휘둘리지 않고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려면 메시지를 이해하고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디지털 문해력 수준은 OECD에서 가장 낮다. 학교에서 인터넷 정보의 편향성 여부를 판단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비율도 OECD 평균에 못 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피사(PISA) 21세기 독자: 디지털 세상에서의 문해력 개발》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만 15살 학생(중3, 고1)들은 사기성 전자우편(피싱 메일)을 식별하는 역량 평가에서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헝가리 등과 함께 최하위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요컨대 한국인의 문해력 순위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글이나 디지털 매체의 정보를 깊게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낮아진다고 보아야 한다.
◇문해력에 대한 미신
문해력에 사진, 삽화, 만화, 유튜브, 영화 등 시각 매체가 책보다 효과적이라는 입장이 있다. 예컨대 “왜 그걸 복잡하게 책으로 읽어, 영상으로 잘 나와 있으니까 영상을 보면 되지”라고 말한다. 청소년들만 보더라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주로 영상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유튜브를 검색엔진으로 쓰며, SNS를 통해 빈번하게 소통한다. 또한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소통 수단은 소리, 말, 그림, 글자로 바뀌어 왔으며 다중 텍스트를 혼용하면서 소통범위를 넓혀왔다.
그러나 시각 매체의 기술적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다. 유튜브만 보더라도 깊이 있는 논의나 강연 등을 보여주는 영상도 있긴 하지만, 책이나 영화 소개에서 보듯이 짧은 동영상이 대부분이다. 특히 5∼10분 정도의 짧은 동영상으로는 사건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나아가 한 주에 몇 번씩 콘텐츠를 업데이트하더라도 짧은 분량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시청자는 주제를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즉 유튜버의 사고는 그 깊이가 얕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책에는 사건의 발단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들어있다. 독자는 사건 전반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관점과 처한 상황에 따라 사건을 재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저자나 비평가가 놓치는 새로운 결론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그 어떤 시각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찾게 한다. 즉 책은 세상에 대한 넓은 시야,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길러주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최고의 도구로서 손색이 없다.
수많은 문해력 연구자가 지적하듯 책과 시각 매체 간의 사고력 차이는 말과 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말은 생물학적 본능이므로 자연스럽게 습득되며 그림이나 영상은 말이 발달하는 능력에 맞춰진 미디어이다. 반면에 글은 순수하게 사회·문화적인 훈련으로만 습득되며, 훈련을 통해서만 읽기 수준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글로써 정보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인지적으로 수고스러운 작업이지만, 주어지는 보상은 클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수준 높은 영상을 기대하는 영상 제작자는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쌓아온 지식이 주로 글 위주의 텍스트로 되어 있는데도 그걸 싹 무시하고 좋은 영상을 제작하겠다는 의도는 착각일 뿐이다. 인류는 책을 통해 각자의 머릿속에 간직했던 고유한 경험을 타자와 공유해 왔으며, 책이 보급됨으로써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졌고, 인류 전체의 지식 총량도 늘어났다. 기원전 약 35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인이 쐐기 문자로 기록한 점토판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초의 책으로 알려진 이 점토판에는 개인과 집단의 경험이 천문학, 철학, 의학, 문학, 수학으로 분류되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지식이 주위로 전파됨으로써 찬란한 고대 문명이 발달했다. 요컨대 독서 능력은 하찮지 않으며 문해력에 있어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문해력이 “독서량과 비례한다.”라고 보는 통념도 일종의 미신이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문해력이 늘지 않는다. 수십 권의 책을 읽은 아이라도 낮은 문해력을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책이 부담스럽다면 짤막한 글부터 수준에 맞게 차츰차츰 읽는 아이들의 문해력이 높을 수 있다. 다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을수록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운동가였던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은 《은수저》라는 책으로 6년 동안 정독 수업을 했지만, 학생들에게 다양한 책을 읽는 다독도 병행케 했다. 일본 작가의 작품만 아니라 쥘 르나르의 《홍당무》 같은 외국 문학도 선택하여 수업에 활용했다. 다독 수업을 할 때도 중학교 1학년은 나쓰메 소세끼의 《도련님》이나 아쿠타가와 뉴노스케의 《랴쇼몽》처럼 읽기 쉬운 책을,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사기》나 우에다 아키나리의 《우게스모 노가타리》 같은 수준 높은 일본 고전을 읽게 했다. 즉 과학적 독서법을 따랐다. 또한 전문 분야의 지식을 이해하거나 관련된 책을 쓰려고 해도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아는 《전쟁과 평화》를 쓰기 위해 작은 도서관 하나 정도 분량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일본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 권의 책을 쓸 때 큰 주제는 약 500여 권, 작은 주제는 약 100여 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다독이 문해력을 측정하는 지표로는 쓰이지 않아야 한다. 주위에서 “몇 년 동안 도서관에 다니면서 일 만권의 책을 읽었다.”, “매년 천 권씩 꾸준하게 읽는다.”라는 작가들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책은 수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생각 도구일 뿐이며 독서의 본질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문해력 측정지표로서 다독을 설정하면 많은 책을 빠르게 읽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만 초래할 뿐이다.
독서법, 즉 “정독, 다독, 남독 등 중에 무엇이 문해력을 가장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미신이다. 이 물음은 메인 메뉴를 알려주지 않고서 가장 맛있는 반찬을 고르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즉 한식인가, 양식인가, 중식인가에 따라 어울리는 반찬이 달라지듯이 독서의 목적이나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독서법이 존재한다. 예컨대 시카고 대학 교수로 탁월한 교육 사상가이며 철학자인 모티머 에들러(Mortimer Jerome Adler)는 독서의 목적이나 독자의 문해 수준에 따라 3단계 독서법을 제시한 바 있다. 1수준은 ‘개관 독서’로 대충 읽기, 훑어 읽기, 개관 읽기, 골라 읽기를 뜻한다. 2수준은 ‘분석적 독서’로 철저하게 읽기, 꼼꼼하게 읽기, 씹어서 소화되도록 읽기라고 할 수 있다. 3수준은 종합독서법으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주제별 독서이다.
많은 독서법 책에 나오듯이 역사적 위인이나 유명한 작가가 권장하는 독서법을 따르라는 충고도 미신이다. 예컨대 베스트셀러 작가 이지성은 《리딩으로 리딩하라》에서 고전을 즐겨 읽었던 위인을 들면서 고전을 탐독하면 그들처럼 천재가 되고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충고가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동방의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는 가난한 환경에서도 “열 가구의 작은 마을에는 반드시 나만큼 충직하고 진실한 사람이야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고전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이 서른에 삶에 드디어 성공이 찾아왔다. 우리가 아는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이립(而立)’, 즉 30세가 되어서 주위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의미는 이때부터 제자를 받아들일 정도로 사회적으로 학문적 경지를 인정받아 성공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방법을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독서법으로 볼 수는 없다. 이지성은 개인적 체험을 일방적으로 소개할 뿐이지 그 방법이 독자 대부분에게 좋다는 과학적 근거를 책에서 단 한 줄도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유명한 독서법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혔는데도 문해력이 늘지 않았다는 학부모들의 하소연도 이런 근거 없는 독서법을 따랐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문해력을 개개인의 역량으로만 보는 시각도 미신이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이 문해력을 본인 책임으로 돌리는 관점은 지나치게 안이하고 위험하다. 가정환경만 보더라도 부모의 낮은 소득, 과도한 부모의 학습 압력, 아동기 때부터 형성된 잘못된 독서 습관 등은 문해력 문제를 일으킨다. 실제로 지능, 배경지식, 경험, 기억력이 부족한 아이는 가정환경이 매우 열악한 경우가 많다. 이 문제에 대해 청주교육대학교 엄훈 교수는 “문해력이 낮은 아이에게 더 많은 학습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문해력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발아 조건이 되지 않아 식물의 싹이 돋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읽기 능력인 발생적 문해력도 아예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가정에 물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교육의 시스템이 나라의 학교라면 그 아이들을 도와줄 책임이 있습니다.”
출처: EBS 다큐 프라임 제작진 《다시 공부, 다시 학교》
사회적, 문화적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가까운 거리에 마을 도서관이 있는가, 도서관에 가면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할 사서가 있는가, 사서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져 있는가, 책을 읽는 사람이나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SNS에서 대화를 나누는가, 읽고 쓰거나 깊은 생각을 하는 습관이 얼마나 일상에 녹아 있는가, 문해력 향상을 지원하는 정부 예산이 얼마나 되는가’ 등은 문해력과 밀접하다. 또한 소득 격차가 낮은 국가는 소득 격차가 큰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문해력 수준이 높다. 2003년 버뮤다, 캐나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 등 6개 국가의 16∼65세 성인들을 대상으로 문해력 실태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문서 문해력 수준은 소득 격차가 낮은 노르웨이, 버뮤다가 높았던 반면, 미국과 이탈리아는 낮았다. 수리 문해력 수준도 소득 격차가 낮은 스웨덴, 노르웨이가 소득 격차가 높은 미국과 이탈리아보다 높았다.
◇과학적 독서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문해력을 높이거나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을 알고, 서재에 사놓은 책도 최소 10여 권은 되지만 책을 잘 읽지 않고 문해력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문해력에 대한 미신이 보여주듯이 제대로 된 독서법을 알지 못한 채로 무턱대고 책을 읽어왔거나 사회적으로 독서를 지원하지 않는 탓이다. 즉 문해력을 높이는 독서법을 학습하려면 개인적으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사회적으로도 법적, 제도적 지원이 요구되는데 과학적 독서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독서를 단순한 취미로만 받아들인다. 특히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온 독자일수록 자신의 독서법을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효과적인 독서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좀처럼 주위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과학적 독서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요리를 하든지 간에 단맛을 내려면 설탕, 짠맛을 내려면 소금이나 간장, 신맛을 내려면 식초를 넣어야 하듯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독서 원리를 따라 책을 읽어야 한다. 즉 과학적 독서법을 따라 텍스트를 읽는 훈련을 해야만 탁월한 문해력을 갖출 수 있다.
본 글은 필자의 저서인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2022.11.30
박제원, 전주완산고등학교 교사
'Benefit > ⊙Common sen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文解力〕문해력 교육은 국가 책임…"정부가 나서야 할 때" (0) | 2023.09.19 |
---|---|
〔文解力〕읽어도 이해 못하는 아이들 (0) | 2023.09.19 |
〔文解力〕 도대체 “문해력”이 무엇이길래 (0) | 2023.09.13 |
〔文解力〕문해력의 개념과 국내외 연구 경향 (0) | 2023.09.13 |
⊙만한전석(滿漢全席) (0) | 2023.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