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베를린으로 갔던 길」과 독일의 통일
전통적으로 전쟁의 최종 승리는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2차 대전 승전국들은 포츠담 회담의 결정으로 전쟁 후 동서 양 진영이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고, 폴란드에 인접한 독일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수도 베를린은 별도로 다시 동서로 분할하여 연합군이 점령하였다.
베를린의 동부지역은 소련이 점령하였고, 서부지역은 미국, 프랑스, 영국 3국이 점령하였다. 서 베를린은 소련군의 점령하던 공산주의 국가 동독 안의 ‘육지의 섬’이 된것이자.
당시 동독은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지도를 발행할 때에도 별도의 표기를 하지 않았다. 소련 관할의 동베를린은 동독 영토와 인접하므로 계속 동독의 수도가 되었지만, 서베를린은 서독 본토와 떨어져있으므로 수도 역할을 할 수 없었기에 독일의 재통일되기 전까지는 본이 행정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은 독일이 다시 통일되기 전까지 소련과 미국 중심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정치가들은 냉전을 상징하는 서베를린을 방문하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였다.
1963년 6월 26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 시청 광장에서 연설 중 “나도 한사람의 베를린 시민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방문하여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라는 연설을 하며 냉전의 종식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 1948년 6월 24일
전후 유럽 재건을 위한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서독은 착실하게 복구가 진행되었으며, 1948년에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전쟁의 패배로 가치가 떨어진 독일 화폐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였고, 당시 독일 조폐창을 장악한 소련이 3개 연합국의 동의 없이 독일 화폐를 마구 발행하여 마르크화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새 화폐가 베를린 지역에서도 통용되자 소련은 동 베를린이 흡수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1948년 6월 24일 전격적으로 연합군과 서독인의 베를린 출입을 봉쇄시켜 서베를린을 서독으로 부터 완전 고립시켰다.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는 소련과 자유진영 간의 ‘냉전(Cold War) 시대’를 불러오는 첫 역사적인 조치였다.
소련과 연합국 3국간 종전 후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왕래와 관련한 어떤 협정도 체결된 바 없이, 상호 신뢰와 소련 측의 선의에 의존하며 왕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소련이 일방적으로 항공로를 제외한 육상 및 수상 통행을 모두 봉쇄하였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 동안 사용 가능한 석탄이 남아 있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종전 후 대부분 부대가 해체되었고 군인들은 감축하던 중이었다.
서 베를린에는 미국·영국·프랑스의 군인은 전체 2만 명 이하가 주둔하고 있었고, 서독 주둔 미군의 수도 전투요원 3만 명을 포함해 10만 명 이하였다. 반면 서베를린을 포위한 동독 및 동 베를린 주둔 소련군 병력은 150만 명에 달하였다.
@‘베를린 대 공수 작전(The Great Berlin Airlift)’ 1948년
비행기로 하늘 덮어 푼 312일간의 대 봉쇄
소련은 베를린을 외부 세계로부터 봉쇄를 하면서도 항공로를 막지 못하였다. 소련 측과 연합군 측 사이에는 1945년 11월 서독과 베를린 간에 항공 통행을 보장하는 협정이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식료품에서 연료까지 대부분을 서독에 의존하던 서베를린 주민들은 졸지에 적진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어지며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연합국은 식량, 연료, 의약품 등을 공중으로 수송하는 ‘베를린 대 공수 작전(The Great Berlin Airlift)’에 돌입하였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조종사들까지 참가하여 군용 수송기와 화물기 380 대를 동원하여, 엄호전투기의 호위 하에 1일 4,700 톤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서 베를린의 공항으로 공수하였고, 악천후 시에는 낙하산으로 공중 투하를 하였다.
연합국 측이 대대적인 공수 작전을 감행하자 소련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전투기를 투입하여 위협 비행을 하거나 항공기 추락을 시도하는 등 공수 작전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수송기가 접근하는 항로에 낙하산 투하 훈련을 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베를린 공수 작전이 막바지에 도달한 1949년 4월에는 공수 작전만으로 봉쇄 전 육상, 수상 수송 물동량보다 더 많은 생필품을 서 베를린에 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 측은 1949년 4월 16일 하루에만 1,383 편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매 1 분 단위로 항공기를 이륙시킴으로써 앞 뒤 두 항공기간에 불과 300m의 간격을 두고 베를린 상공을 수송기로 뒤덮도록 하였다. 이렇게 공중 퍼레이드를 펼침으로써 공중 전력의 위세를 통한 위력 시위로 소련 측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를 목도한 소련 측은, 연합군의 물량 공세와 서베를린을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봉쇄로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베를린 봉쇄를 풀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결국 점령 4개국 대표 회담의 결과로 312일 만인 5월 12일에 봉쇄 해제가 이루어졌고, 8월 30일 부로 모든 공수작전이 종료되었다.
공수 작전 기간 동안 총 278,228 편의 항공기가 투입되어 2,326,406 톤의 물자를 수송하였으며 수송된 물자의 환산 가액은 당시 가격으로 미화 4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공수작전에 투입된 항공기 중 25 대가 악천후 등에 의해 추락하였으며 이로 인해 101 명이 희생되었다.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 1961년 동독이 설치
1961년 8월 13일 새벽 0시를 기해 동독 정권은 서베를린 주위를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7,000여 명의 군인들로 하여금 시 경계선을 지키도록 하였다. 점차 철조망을 걷어내고 육중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쌓았다. 그 길이는 무려 167.8km였고, 동·서베를린의 경계선에 세워진 장벽의 길이는 43.1km다. 탈출이 어렵도록 장벽을 높게 했고, 300여 개의 감시초소도 운영했다. 탈출자에 대한 발포도 허용했다.
이것이 베를린 장벽의 설치이다.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은 동독이 건설한 것으로서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 밖의 동독으로부터 분리하는 장벽이다. 그래서 서베를린을 공산주의 국가안의 유일한 자본주의 지역이라고 해서 ‘육지의 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독의 관리들은 이 장벽을 반파시스트 보호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냉전의 상징이자 독일의 분단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동독 탈주자가 많아지자 이를 막으려고 1961년 8월 13일에 만들어진 이후 점차 이 장벽은 보강되었다.
@‘분단 독일’을 잇는 ‘길’이 있었다
동·서독 분단 당시도 육·해·공 23개 노선 연결
상호교류 위한 교통망 확충 위해 끊임없이 노력
연합군 점령지였던 서베를린 지역은 동독 한 가운데 자리했던 탓에, 고립된 지역으로 남겨졌다. 한반도로 치면 북한 평양의 절반이 남한 땅이었던 셈이다. 서독 사람들은 서베를린에 남겨진 가족,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해 어떻게든 ‘길’을 연결하려 애썼다.
분단 이후 통일까지 서독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길은 제한적이었지만 사실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르며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길의 문턱은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양쪽 지역 주민들 사이엔 언제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길’이 존재했다.
통일 이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도로 10개와 철도 8개, 내륙운하 2개 그리고 항공로 3개 노선이 국경을 가로질렀으며, 동‧서베를린 간에는 모두 8개의 통과로가 존재했다. 분단된 상태였지만, 동·서독을 느슨하게라도 연결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 불쑥 솟아난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에 길을 잇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서독은 도로 철도 등 교통망 연결에 열을 쏟았다. 그중에서도 도로는 동‧서독을 잇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통일 이전 도로를 이용한 여객은 전체 여객 중 85%에 달했다. 철도가 14%로 뒤를 이었고, 해운과 항공의 비중은 미미했다. 화물 역시 60% 가량이 도로를 통해 운반됐다.
동‧서독은 1972년 교통협정을 맺고 도로, 철도, 수로 등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섰다. 특히 동‧서독 양 측에 실리와 명분이 충분했던 고속도로 A115에 대한 대대적 투자가 이뤄졌다. 동‧서독은 총 4억500만 마르크의 비용을 지출하며 도로 노면을 보수하고 6차선으로 확장했다.
‘A115’ 8차선 고속도로
독일 분단 당시 동‧서독 접경지역 헬름슈테드‧마리엔 본에서부터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이 고속도로는 동‧서독을 연결했던 대표적 ‘길’ 중 하나다. 특히 동·서독 경계짓는 검문소를 관통하는 A115는 1921년 독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고속도로다. 독일 분단 시절에도 서독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베를린으로 달렸다. 결국 이 길 위에 분단부터 통일까지 교류·단절·소통의 독일 역사가 함축돼있는 셈이다.
A115 내에는 독일 분단 시절 세워졌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브라보’ 건물
독일 베를린 남서쪽, 숲이 울창한 드라이린덴. 이곳엔 8차선 고속도로 ‘A115’가 쭉 뻗어있다. 고속도로 위로는 승용차와 화물차들이 시속 80㎞의 속도로 베를린시(市) 경계를 넘나든다. 고속도로 A115 내에는 독일 분단 시절 세워졌던 검문소 ‘체크포인트 브라보’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이 검문소는 언뜻 보기에 열차 한 칸을 떼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주둔한 연합군은 고속도로 위 바로 이 검문소에서 차량을 통제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11월 9일 자유 왕래가 허용된 이후 차례로 장벽이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20세기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은 앞으로 50년 내지 100년은 더 존속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서독 총리를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조차도 “내 생애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베를린 장벽이 쉽게 붕괴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88년 3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신 베오그라드 선언'을 합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천명된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겁니다. 이후 동구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며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편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물결을 동독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건 한 명의 말실수, 그리고 전 세계에 타전된 오보 때문이었습니다.
동독 전역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자 동독 당국은 여행 자유화라는 회유책을 내놓게 됩니다. 여행 자유화라곤 해도 여권 발급 기간 단축 외에는 달라진 게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시행일은 1989년 11월 10일, 그 전날인 9일 오후 7시쯤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동베를린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귄터 샤보프스키가 발표에 나섰습니다. 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 국경을 개방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발표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샤보프스키는 역사적 실수를 합니다.
"지금 당장입니다."
지금 당장 국경을 개방한다는 '오보'가 전 세계에 타전됐고, 긴가민가하던 독일 언론들은 미국을 통해 다시 들어온 '오보'를 한 시간 뒤 8시 종합뉴스 톱으로 방송했습니다. 그날 밤 장벽이 무너졌고, 독일은 이듬해 통일을 이뤘습니다.
이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89년 가을 동독 주민의 평화혁명이 성공하며 동독 정부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며 주민들에게 서베를린으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한 것이다. 장벽이 세워진 지 28년 만이다.
@독일의 통일 1990년
1990년 12월 3일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베를린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고 하나가 되었다. 1991년 7월 새로 구성된 전독일의회는 베를린을 통일독일의 수도로 의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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