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억만장자들은 지하벙커를 만드는 걸까
◇저커버그, 하와이에 상암월드컵경기장 4분의 3 규모 지하기지 건설
“실리콘밸리 부호들 절반 이상이 ‘인류 종말’ 대비 지하벙커 마련 추정”
1236억 달러의 재산으로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 세계 부호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린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지구 종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하벙커를 갖춘 거대 복합생존시설을 미국 하와이에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IT 전문매체 ‘와이어드’와 가십에 강한 일간지 ‘뉴욕포스트’, 비즈니스·기술 뉴스웹사이트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에 따르면 저커버그는 2014년 8월부터 하와이에 거대 생존단지를 건설하고 있다. 저커버그는 1억7000만 달러를 들여 1400에이커(약 5.7㎢)의 땅을 사고 이곳에 1억 달러의 건설비를 들여 대규모 복합생존단지를 짓고 있다.
미국의 부호들이 대재앙에 대비하기 위한 지하벙커를 건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주목되고 있다. 사진은 콜로라도주의 샤이엔 마운틴 공군기지 안에 있는 지하벙커로 이곳은 30메가톤의 핵폭탄과 화학·생물학·방사선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EPA 연합
◇프레퍼들, 정부나 미디어 신뢰하지 않아
땅값과 건설비를 합친 2억7000만 달러는 한화로 약 3520억원에 이른다. 일부 매체는 실제로 이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건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복합단지에는 상암월드컵경기장(7140㎥)의 75% 정도인 5만7000제곱피트(약 5295㎡)에 들어서는 두 개의 메인 건물과 주로 게스트하우스 용도인 작은 건물을 포함해 모두 12개 건물이 들어선다. 건물마다 각각 30개 침실과 욕실을 갖췄다고 한다. 메인 건물 하나는 체육관과 수영장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화제가 집중되는 지하벙커는 규모가 5000제곱피트(약 464㎡)로 대피 공간과 창고 등으로 이뤄졌다. 외부와 차단돼도 전기와 식료품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시설이 들어서는 카우아이섬은 제주도(1833.2㎢)의 80% 정도 면적에 7만3000여 명만 거주해 한적하다. 활화산이 없고 오랜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계곡과 아름다운 폭포, 멋진 해변 등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여기에 연간 1200mm가 넘는 강수량으로 수량이 풍부해 섬 전체에 숲과 수목이 울창하며 2500종이 넘는 조류가 서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고 한적한 섬에 지구 종말에 대비하는 시설이 들어서는 셈이다. 문제는 이처럼 지구 종말에 대비하는 이가 저커버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미국에는 ‘대비하는 사람’이란 뜻의 ‘프레퍼(Prepper)’가 대규모로 존재한다. 프레퍼는 대규모 자연재해나 경제공황, 사회적·정치적 혼란 등 지구 대이변이나 파국적·파멸적 상황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피난처 마련, 물자 비축, 피난과 생존술 훈련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프레퍼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통한다. 미국 전체에만 250만~400만 명 정도의 프레퍼가 있다는 추정도 있다. 프레퍼는 1929~3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조금씩 생기기 시작해 1962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소 냉전이 격화하고 핵전쟁 공포가 확산하면서 자신만의 생존을 준비하는 사람이 증가한 셈이다.
프레퍼들은 위기 상황에서 연방정부나 주정부 등의 공적인 지원 없이도 자력으로 살아남는 것을 추구한다. 이를 생존주의(Survivalism)로 부른다. 생존주의는 대피시설이나 비축 식량 등으로 전쟁 등 위기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추구하는 것을 인생의 으뜸가는 목표로 추구한다. 이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위해 농장을 운영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집 지하에 핵전쟁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피소를 짓거나 기존 건물이나 지하실을 보강해 시설을 요새처럼 개조하기도 한다.
프레퍼들은 연방정부나 주정부, 또는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만 믿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세상을 ‘국제자본가’라는 이름의 지배계급이 좌우한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정부나 미디어를 좌우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다. 그래서 정부나 지배계급의 힘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지역의 라디오나 인터넷, 자신들만의 공동체 모임에서 들은 말만 믿는 경향을 나타낸다.
정부나 미디어를 기득권의 장치로 보고 신뢰하지 않는 대신 생존법을 스스로 익히고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파멸적 상황이 닥쳐 약탈 등 범죄가 만연할 것에 대비해 전문가로부터 교육을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응급처치용 구급상자 확보는 기본이다. 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구급대원 교육을 자청해 받기도 한다. 무술을 비롯한 호신술을 배운다든지 즉석 무기 제조법, 총기 사용법을 배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총기 단체에 등록해 정기적으로 사격술을 연마하기도 한다.
독특한 것은 오랫동안 보관 가능한 비상식량이나 응급처치용 세트와 의약품, 자급자족용 장비와 용품 등 프레퍼용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도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슈퍼에서 비스킷이나 통조림, 레토르트 식품, 분유 등 건조식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아예 프레퍼용 전문 상품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샘 올트먼·스티브 허프먼 등도 유명 프레퍼
주목할 점은 프레퍼들의 정치적 성향이다. 프레퍼 중에는 미국의 건국 정신에 담긴 저항권이나 혁명권, 자립정신 등을 오늘날에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은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미국 공화당 내 보수파의 정치적 신념이나 성향과 일치한다. 프레퍼 상품 구매자도 이러한 공화당 보수파가 주를 이룬다는 평가가 있다. 소수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리버럴 프레퍼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선 환경오염이나 핵전쟁 등으로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프레퍼는 유명 인사 중에도 당연히 존재한다. 얼마 전 이사회에 의해 해임됐다 곧비로 복귀했던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자신의 집에 총기와 항생제, 방독면, 그리고 골드바를 비치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 것으로 평가되는 챗GPT를 출시한 첨단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창업자이자 CEO도 프레퍼인 것이다.
초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인 레딧의 공동 창업자로 20대에 억만장자가 됐던 스티브 허프먼 CEO는 심지어 자연이나 인간에 의한 아포칼립스적 상황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2005년 레이저로 시력 교정 수술을 받았다고 USA투데이가 보도했다. 허프먼은 뉴요커 잡지에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이용하면 위기 상황에서 화를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인 ‘링크드인’ 공동 창업자인 리드 호프만은 뉴욕타임스에 “실리콘밸리 부호들의 절반 이상이 지하벙커 같은 일종의 ‘아포칼립스 보험’을 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숨겨진 프레퍼가 많다는 의미다.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모은 사람은 이를 이용해 지구 종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피난처 마련에 나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저커버그가 하와이에 지구 종말에 대비해 지하벙커를 포함한 거대 시설을 짓는 것은 그의 재산 규모에 비례한 프레퍼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저커버그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커버그는 미국에 적지 않게 존재하는 프레퍼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가진 재산과 영향력, 그리고 정보력을 감안해 대중의 관심이 더욱 강하게 쏠렸을 뿐이다.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2023.12.23 10:05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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