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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볜이팡(便宜坊) / 1416, 608년 역사의 '화덕 카오야' 전문점

Paul Ahn 2024. 3. 9. 22:36

★볜이팡(便宜坊) / 1416, '화덕 카오야' 전문점

 

• 설립 : 朝咸丰五年(1855年)

창업 : 명나라 영락() 14(1416)

• 위치 : 北京市内东街中里15[1]

 

 

 

最古老的餐,距今600年仍在营业,价格惠每一口都是

(baidu.com)

 

북경의 비엔이팡 오리구이집은 명나라 영락() 14(1416)부터 시작된 북경의 가장 오래된 오리구이집이자, 유명한 '역사깊은 중화 레스토랑'입니다.

 

비엔이팡의 '비엔(便 biàn)'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고, 가정이 화목하게 한다"는 경영철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비엔이팡은 청함풍(咸丰) 5(1855)에 문을 연 셴위커우(鲜鱼) 비엔이팡이지만, 그곳의 주방장은 명나라 영락때 세운 오래된 비엔이팡의 비법인 찜화로 오리구이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찜화로 오리구이'란 화로의 불을 끈 뒤 오리를 넣어 불을 직접 붙이지 않으면서 오리 안에 스페셜하게 만든 고물과 탕이 들어가서 겉 구이 안에서 끓어오르게 하여 색다른 풍미를 가지게 합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연하고 느끼하지 않은 오리구이 요리를 만드는 기법입니다. 찜통의 각 공정마다 선조의 심혈을 기울인 큰 지혜가 있는데, 예를 들어 오리 화로, 벽돌, 건축 자재를 특별히 엄선하여 맞춤제작 해야합니다. 난로 안의 온도가 높을때 흡착되고, 난로 안의 온도가 낮을때는 방출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오리구이 요리 방식은 이후 걸이식 화로 방식의 오리구이로 유명한 전취덕(全聚德)과 경쟁이 되었습니다.

 

원래 비엔이팡은 미스커우(米市口)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점차 번창하면서 비엔이팡이라는 이름의 유사 오리구이집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원조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원조 미스커우의 비엔이팡은 '라오비엔이팡(老便宜坊)'으로 개명하게 되었습니다.

 

중화민국 후의 라오비엔이팡과 다른 비엔이팡들은 부실한 경영으로 망했고, 셴위커우(鲜鱼) 비엔이팡만이 남아 건재하고 있으며 이는 베이징의 유일한 찜화로 오리구이집이 되었습니다.

 

비엔이팡이 예전에는 작은 식당이였지만, 지금은 명나라때 세운 옛 간판을 내걸고 600여 년에 걸친 자랑스러운 전설을 이어나가고 있는 식당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의 비엔이팡은 오래된 식당이라기보다는 관광 명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견학시키기도 합니다.

 

식당 대문 양쪽에는 "香下(냄새를 맡자 말에서 내리다)" "知味停(맛을 아는자 수레를 멈추다)"라고 쓰여있고, 연꽃이 드리워진 복도, 돌로 만든 물시계 등 오래된 가게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식당 입구는 1416년 이후 지금까지 비엔이팡 역사적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긴 복도를 따라 600년 동안 비엔이팡의 변천 과정을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매장 규모는 7천 평방미터에 달하고, "쌍합식(合式)" 입체 화원, 중국 전통 가옥구조 방식으로 지어진 식당의 건물 등은 비엔이팡의 오랜 역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북경 오리구이는 굽기 전에 양념을 하지 않고, 오리구이의 향은 굽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의 오래된 방식의 오리구이는 먹기 전 연향, 대추향, 차향을 오리의 흙벽돌에 맛을 들이는 것으로 '화샹수(花香酥)'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구워진 오리는 남녀노소 모두 입맞에 잘 맞으며, 오리의 여분의 기름은 찜통에서 구워지면서 육질이 더욱 부드러워집니다. 단순하지만 깊은 맛을 내는 이 곳은 오리구이를 찾는 식객이 끊이지 않아서 외지인들은 전취덕에서 먹고, 북경 사람들은 모두 비엔이팡에서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취덕과 비교했을때 비엔이팡의 1인당 평균 가격은 더욱 실속있어서 가성비도 좋은 식당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북경에 있는 오리구이 맛집에 대해 말하자면, 전취덕이 맛없다는 사람도 있고, 비엔이팡 오리구이가 너무 느끼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과 입맛이 다르다보니 각기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는데요,

 

현재 북경에는 오리구이계의 신생 맛집들, 예를 들어 대동, 사게민복, 의화소관(大董,四季民福,羲和小) 등등 많은 곳들이 생겨났으며, 이곳들 모두 조리법이나 식사 환경 등 모든면에서 각자 개성있는 곳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신생 맛집들은 현대 젊은이들의 입맛에 더욱 맞게 요리를 개발하면서 요즘 젊은층들은 새로운 오리구이 식당들을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옛날 전통방식의 맛집에서 맛보는 음식에는 역사와 향수, 풍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므로 그 나름대로의 멋과 맛과 향이 있고, 또 이러한 매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600년 역사의 볜이팡(便宜坊), 전통의 맛을 계승하면서 혁신을 꾀하다

(chinacorea.com)

 

중국 요리 하면 외국인 중 십중팔구는베이징 카오야(北京, 베이징 덕)’를 꼽을 것이다. 베이징 화덕 오리구이의 원조인볜이팡은 영락 14(1416)에 개업해 올해로 601년이 됐다. 수백 년간 쌓인 노하우 덕분에 볜이팡 카오야는 맛이 깊어졌고, 문화 계승을 통해 도시와 공존해 도시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신중국 성립 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볜이팡을 방문하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혁신과 발전을 거듭한 볜이팡이라는라오쯔하오(老字號) 브랜드는 오랜 세월 동안 쇠퇴하지 않고 시대와 함께 발전했다.

 

 

백년 노포(老鋪)의 유구한 역사

 

노포마다 독특한 창업 스토리가 있게 마련이다. 볜이팡도 예외는 아니다. () 성조(成祖) 주체(朱棣)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 영락 14년에 왕 씨 성을 가진 난징(南京) 사람이 명나라 관리와 함께 베이징으로 왔다.

 

그는 베이징 차이스커우(菜市口) 미스후퉁(米市胡同)에 작은 식당을 내고 화덕에 구운 닭과 오리 등을 팔았다. 상호가 없는 작은 식당이었지만 닭과 오리 가공에 공을 들여 맛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 손님이 많았다.

 

명나라 가정(嘉靖) 30(1551) 병부 원외랑 양계성(楊繼盛)이 간신 엄숭(嚴嵩)과 갈등이 생겨 모함을 당했다. 분을 참지 못한 양계성은 퇴청 후 차이스커우 미스후통까지 걸아갔다. 갑자기 코를 치르는 향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식당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 카오야 등 안주를 시켰다. 다 먹고 음식값을 치르려는데 가격이 매우 싸서 식당 이름을 물었다. 주인은저렴한 가격에 손님을 대접하려고 만든 작은 가게라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공손히 말했다.

 

 

양계성은 카오야의 맛에 걱정이 사라진 터라 주인에게 문방사우를 가져오라고 해서 일필휘지로볜이팡이라고 써주었다. 주인은 정성스럽게 편액을 만들어 문 앞에 걸었다. 이후 볜이팡은 명성이 자자해졌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 볜이팡은 베이징의 유명 식당이 됐고, 볜이팡의 화덕 카오야는 베이징 카오야의 원조가 됐다.

 

청나라 때는 황제 뿐 아니라 조정의 관리들도 지방관리 연회와 회의 때 카오야를 먹었다. <도문쇄기(都門瑣記)>에는베이징은 톈야(, 강제 비육한 오리)가 유명해 8-9근짜리도 있다. 연회에는 통오리가 주요리이며, 유명한 음식점으로는볜이팡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외국인인 프랜시스 아서 어글랜은 <베이징잡지(北京雜志)>예전에 베이징의 명승고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음식을 맛봤는데 볜이팡의 화덕 카오야가 베이징 최고였다고 썼다.

 

신중국 성립 후 저우언라이 총리가 볜이팡을 방문하고 볜이팡 세 글자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인민을 편리하게 하고 가족을 화목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우 총리는인민을 편리하게 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신이고, 가족을 화목하게 하는 것은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이다. 볜이팡 브랜드를 인민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옛 맛, 그러나 새 모델

 

2008년 볜이팡 카오야는 국가급 무형문화재 신청을 했다. 팡훙보(房洪波) 볜이팡카오야그룹 부총경리는 볜이팡 카오야는 화덕 제조 방식을 채택한다며이 방식으로 만든 오리는 껍질이 바삭하고 육질이 부드러워 맛이 좋으며, 굽는 과정에서 오리에 불이 직접 닿지 않기 때문에 오리 표면에 이물질이 달라붙지 않아친환경 카오야라고 불린다고 소개했다.

 

베이징 카오야의 주재료는 베이징 톈야다. ‘난루야(南爐鴨)’라고도 부른다. 이 오리의 원 생산지는 남방이다. 명나라 영락 연간에 베이징으로 운반되어 베이징 동쪽 차오바이허(潮白河) 일대에서 양식돼바이허푸야(白河蒲鴨)’라고 한다.

 

굽기 전 도살한 오리의 털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내장을 제거하고 껍질과 고기 사이에 공기를 불어넣어 껍질과 고기를 분리시킨다. 그 다음 오리 몸체에 맥아시럽을 발라 건조시킨다. 굽기 전 오리 내부에 끓인 물을 넣고 오리가 다 익으면 물을 뺀다.

 

오리를 써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오리 하나에서 108-120조각(껍질과 살이 같이 있는 부분이 최소 80%가 돼야 한다) 정도가 나온다. 편으로 썬 오리는 은행잎 모양으로 크기가 일정하고 두께가 고르다. 고기를 다 썰어낸 오리 뼈는 정갈하다. 유명한 카오야 식당은 오리 껍질을 9편 잘라내 접시에 따로 담아주는데 매우 바삭하다.

 

카오야는 먹는 방식이 있다. 우선 접시에 밀전병을 깔고 고기를 몇 점 놓은 다음 춘장을 찍어 올리고 파를 얹어 돌돌 말아서 먹으면 기름지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바삭하면서 상큼하다.

 

볜이팡의 카오야는 전통 카오야의 맛을 보존하면서 혁신을 더했다. 2006수샹쑤카오야(蔬香酥)’화샹쑤카오야(花香酥)’를 출시하고 특허도 받았다. 팡훙보 부총경리는 수샹쑤카오야는 채소즙에 카오야를 10시간 이상 담궈사탈일정(四脫一定)’ 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사탈이란 탈유(脫油, 기름 제거), 탈지(脫脂, 지방 제거), 탈산(脫酸, 산성 제거), 탈화(脫火, 불 제거)이다. 육류는 산성이고 채소는 알칼리성이라 산성과 알칼리성이 균형을 이루면 인체에 흡수가 쉽다. 또한 구울 때 채소즙이 오리 뱃속으로 계속 들어가게 했다.

 

신 메뉴 출시 외에 볜이팡은 인터넷 플러스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마케팅도 진행했다. 팡훙보 부총경리는 “2014년부터 몇몇 음식 사이트와 제휴해 공동구매 이벤트를 진행했다. 고객에게 5성급 환경에서 3성급 가격을 제공하는 것이 취지였다. 사실 인터넷 마케팅을 하려면 음식의 질과 소비자의 체험이 보장돼야 한다. 가격이 아무리 저렴해도 식당을 방문한 고객이 느끼기에 음식이 맛 없고 체험도 형편없다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방문했을 때 체험이 괜찮았다면 다음에는 공동구매를 하지 않고 직접 식당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몇 년 동안의 홍보 효과를 봤을 때 볜이팡 카오야는 소비자에게 저렴하고 맛있는, 그러면서도 품질이 아주 좋은 요리로 자리잡았다. 자연히 볜이팡의 매출과 이익도 해마다 늘었다.

 

팡훙보 부총경리는 요식업 브랜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를 쌓는 것이라며 신뢰는 요식 브랜드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라오쯔하오 브랜드인 만큼 브랜드 가치와 업계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려면계승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라오쯔하오 브랜드는 조상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으로 요리 외에 중국의 풍부한 음식 문화와 경영 철학, 브랜드를 관통하는 기업문화가 있다. 신뢰와 계승을 바탕으로 음식, 서비스, 마케팅 철학의 혁신을 통해 3가지를 하나로 융합해야 시장에 잘 적응하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

 

 

볜이팡의 대표적인 음식들

 

39년 일한맛의 장인

1855년 쳰먼(前門)대가에 문을 연 볜이팡 셴위커우(鮮魚口)점은 볜이팡에서 가장 오래된 점포다.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 총면적이 9000여 ㎡에 달한다.

 

입구 왼쪽에 놓여 있는 대형 스크린에 주방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된다. 요즘 요식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지하 1층 카오야 화덕실에 가면 화덕 6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불은 천연가스를 사용하지만 화덕 벽은 벽돌을 쌓아올렸다. 이곳에서 39년 동안 일하고 있다는 바이융하이(白永海) 사부는 화덕 온도가 200도까지 올라가고 화덕 하나에 10-20마리까지 구울 수 있다고 소개했다.

 

카오야가 익는 45분 동안 몇 분에 한 번씩 카오야를 돌려줘야 열이 고르게 전달된다. 날이 더워도 화덕실에는 에어컨이 없다. 카오야를 굽는 사부들은 고리에 오리를 하나씩 걸어 화덕에 집어넣고 다시 하나하나 뺀다. 이렇게 몇 번 하면 등에 땀이 흥건해진다.

 

바이융하이 사부는 볜이팡에서 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때는 나라에서 직장을 분배해주었다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일할 줄은 나도 몰랐다. 제자도 많이 생겨 그동안 제자도 얼마나 있었는지 모를 정도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바이융하이 사부는 감회에 젖은 듯한 곳에 오래 있다보니 이곳 문화에 동화됐다. 이곳의 유구한 역사와 두터운 문화, 순수한 향미에 매료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오래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7-07-27     

글|왕자인(王佳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