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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재(必敬齋) / 1999, 500년 역사의 전통 가옥과 궁중 한정식

Paul Ahn 2024. 3. 20. 12:53

★필경재(必敬齋) / 1999, 500년 역사의 전통 가옥과 궁중 한정식

(philkyungjae.co.kr)

 

위치 :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739-1

 

- 필경재가 궁중음식점으로 바뀐 것은 1999.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요청해 온 것이다. “외빈들에게 한국 전통가옥의 모습을 소개하고 음식도 맛 보이는 장소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씨는양반 집안 종손이 음식점을 할 수는 없다는 문중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고민 끝에나라를 위한 일이니 하자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 “서울에서 유일하게 500년 전통을 지닌 집인 필경재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정식집으로 운영하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지요. 유럽 귀족 집안도 저택이나 고성을 개조해 호텔로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필경재 터는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증손인 정안부정공 이천수 씨가 성종 때 건립한 것으로 500여년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개인 가옥으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나 되었으며 1994년에 해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경재라는 상호는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의미로 건립 당시 지어진 옥호다.

 

- 전통을 물려받은 「필경재」가 선보이는 음식은 궁중 한정식이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올리던 수라상을 토대로 조리법과 상차림에 약간의 현대식을 가미했으며 개량한복을 차려 입은 종업원들의 일대일 서비스는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받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 품격 있는 자리를 추구하는 만큼 백자와 방짜를 활용한 정갈한 상차림으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더했으며 미닫이를 열었을 때 내다보이는 앞마당 풍경도 제법 운치 있다.

 

 

하루 4번 옷 갈아입는 500년 가문 지킴이 … 강남 명문가 종택 ‘필경재’를 찾아서

(joongang.co.kr)

 

광평대군(세종대왕의 5)의 후손이자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녹천 이유의 11대 종손인 이병무(68). 그는 하루 네 번 옷을 갈아입는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종택필경재와 묘역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필경재는 궁중요리 전문점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손녀 선재(8)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이병무씨는 작업복을 입고 필경재와 묘역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귀빈이 오면 정장 차림으로 안내한다. 손님이 떠나면 다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관리인으로 되돌아간다. 새벽 1, 점퍼를 입고 시장으로 향한다. 신선한 음식재료를 사기 위해서다.

 

 

명문가 종손으로 산다는 것

 

“종가를 지키려면 반 머슴이 돼야 합니다. 옛날에야 사람을 부리며 살았다지만 요즘은 어디 그런 가요. 아무리 넓은집도 알아서 관리할 수밖에요. 제가 식당 주인도 됐다가 집관리인도 됐다가 묘지기도 됐다가 1 3역을 합니다.”

 

조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이자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혜정공 녹천 이유의 11대 종손 이씨.

 

필경재는 성종 때 정안부정공 이천수가 지은 집으로 서울에서는 500년이 넘는 내력을 가진 유일한 가옥이다. 1987년 당시 문화공보부가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했다. 이 집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이유를 비롯해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정공 이후원, 헌종 때 우의정이었던 이지연 등 수많은 공신이 배출됐다. 일제 강점기 때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위종 열사,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철기 이범석 장군도 직계 후손이다.

 

 

필경재 후원을 지나 문을 열고 나서면 광수산 자락이다.  필경재 담장 바로 뒤인 이곳에 이유의 묘가 있다. 산자락을 조금 더 올라가면 700여 기의 묘가 자리한광평대군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0)이 눈에 들어온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과 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집 옆에 무덤이 있어서 무섭지 않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하지만 제겐 단순한 무덤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곳입니다. 고민이 있거나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때는 할아버지(이유)의 묘를 찾곤 하지요.”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깐깐하게 필경재를 관리해온 이씨지만 두 손녀 선재(8)·선우(3)의 재롱 앞에선 평범한 할아버지다. 장남 이선기(41)씨의 딸들이다. 현재 선기씨와 차남 이영기(38)씨는 따로 사업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필경재를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손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맏손녀가 씩씩하고 대담한 구석이 있어 종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말했다. 선재도 할아버지의 뜻을 아는지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할아버지 집을 지키면서 살 것이라며 웃는다.

 

종가 며느리의 삶은 어떨까. 필경재에서는 해마다 명절을 포함해 열두 차례 제사가 치러진다. 그때마다 전국에서 80~100명의 종친이 모인다. 이처럼 큰 규모의 제사를 꼬박 40년 동안 지내온 이가 있다. 이씨의 아내 김명순(64)씨다.

 

“어느 날 집사람이여보 나 지장을 찍었는데 아무 것도 나오질 않아요라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더군요. 종손의 아내로, 궁중음식점의 안주인으로 쉴 틈없이 지내온 세월 동안 남은 것이 바로닳은 손끝이었던 것입니다.”

 

김씨는시집온 후 첫 제사를 지내고 앓아 누운 기억이 난다아무리 잰걸음으로 뛰어다녀도 집이 워낙 넓은 데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려니 힘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자 어느 새 종가 맏며느리로서의 생활이 몸에 배 남편이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 집안을 위하는 일인지 알 수 있게 됐다.

 

필경재는 한 해 약 3만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궁중음식점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과 최고 경영자, 석학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전통을 대표하는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필경재가 궁중음식점으로 바뀐 것은 1999.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요청해 온 것이다. “외빈들에게 한국 전통가옥의 모습을 소개하고 음식도 맛 보이는 장소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씨는양반 집안 종손이 음식점을 할 수는 없다는 문중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쳤지만 고민 끝에나라를 위한 일이니 하자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500년 전통을 지닌 집인 필경재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정식집으로 운영하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지요. 유럽 귀족 집안도 저택이나 고성을 개조해 호텔로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너무 음식점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조리시설은 안채 뒤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했고 길가에 세운 간판에도필경재라는 이름 석 자만 넣고 음식점 표기를 하지 않았다.

 

필경재 별채를 돌아 들어가면이호당(二護堂)’이 나온다. 주요 외빈들이 비공식 만찬 장소로 즐겨 사용하는 곳이다. ‘가문의 명예와 전통, 두 가지를 지킨다는 뜻을 담은 이름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보존돼 있다. 이 가운데 이유의 영정과 숙종·헌종 등 조선시대 왕이 내린 교지와 교서는 어느 박물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유물이다. 중국 국가 부주석 시진핑(習近平)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필경재를 찾은 외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들이 보낸 감사 서신도 곳곳에 걸려 있다.

 

이호당(二護堂)  

 

종손이 종택을 지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외로움을 느끼거나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고단함도 주변 사람들의 칭찬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집안 행사 때 종친들이집안 관리 잘했다거나 관광객들이훌륭한 문화 유산을 잘 지켜줘 고맙다고 하면 그걸로 족하다.

 

“하루에 옷을 네 번 갈아입고 손끝이 닳아 지문이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정성껏 잘 모시고 있다는자부심그것이 종손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환경보호에 앞장서다

필경재를 지키는 것은 지역 환경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했다. 2008년 필경재 앞에 20층짜리 아파트를 짓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은 후 이씨는 종가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 주민들, 대모산 생태환경보존회와 함께 뜻을 모아 무분별한 도시 개발을 막기로 했다. 전통과 녹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담은 의견서를 강남구청에 냈다. 3년여 간의 줄다리기 끝에 고층 아파트 건립을 막았다. 현재 소규모 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을 지자체 SH공사 측과 논의 중이다.

 

“아니할 말로 필경재는 금싸라기 땅입니다. 그 넓은 땅을 개발하면 금세 돈방석에 앉을 수 있지요. 하지만 종손의 소임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선조의 삶처럼 이웃과 나라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는 것이 제 역할이지요.”

 

그 사태를 계기로 이씨는 필경재와 광평대군 묘역이 어우러진 지역 일대를 역사 전통 마을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언젠가 아들이 제 뒤를 이어 이 곳을 지키게 되겠지요. 제 마음과 꼭 같을 순 없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사명을 다하라는 말만은 해주고 싶습니다. 전통을 지켜 고스란히 후대에 물려주는 게 앞선 세대의 의무라는 것도 말입니다.”

 

중앙일보

2012.02.28 08:55

 

 

500년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 필경재(必敬齋)

(nculture.org)

 

서울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 근방에 있는 광평대군의 묘역은 서울 근교에서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총면적 413,300㎡의 산에 광평대군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 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종가재실의 고옥이 있다. 그 고옥이 전주 이씨 광평대군의 종가인 필경재이다. 필경재(必敬齋)의 뜻은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필경재가 건립될 당시 지어진 이 고옥(古屋)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밖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에 조선왕조의 능이 많이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 중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선릉에는 성종, 정릉에는 중종이 모셔져 있고, 대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헌인릉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왕릉은 아니지만 왕의 아들들 대군들의 무덤도 이 근방에 많이 조성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수서동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드님인 광평대군 이여의 묘이다. 광평대군묘역에는 광평대군 내외 묘소,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 이방번 내외 묘소,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 이하 그 후손들의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광평대군의 묘역은 서울 근교에서 현존하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총면적 413,300㎡의 산에 광평대군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 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종가재실의 고옥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또 이곳은 종가 재실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마을 이름을 궁말, 궁촌이라고 부른다. 도로명이 개편된 오늘날에도 이 마을의 도로명은 광평로이다.

 

공동묘역 끝자락 평지로 내려가면 오래된 전통가옥이 보이는데, 이 곳이 전주 이씨 광평대군 이여의 종가인 필경재이다. 필경재는 15세기 조선조 성종 때 건립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으로서 1987 4 8일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제 1호로 지정되었다. 광평대군의 증손인 정안부정공 이천수가 건립하여 현재까지 대대로 19대를 이어오며 그 종손들이 살아온 전통한옥이다. 당시 개인 가옥으로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나머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1994년에 해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1999년부터는 궁중요리를 선보이는 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가옥의 형태는 잘 보존되고 있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갓집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 가옥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 때 영의정 이유와 효종 때 우의정 이후원, 헌종 때 우의정 이지연 등 3정승을 탄생시켰으며,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과 헤이그 열사 중 한 분인 이위종 열사도 직계 후손이다. 이렇게 많은 문무관을 배출하였고, 일제 치하에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하여 설립된 중앙고등학교 광주분교로도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가옥이다. 필경재(必敬齋)의 뜻은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필경재가 건립될 당시 지어진 이 고옥(古屋)의 옥호(屋號: 집의 이름)이다.

 

집필자박인정(시민기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