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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당(友生堂) / 1945, 일반서점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

Paul Ahn 2025. 3. 29. 13:29

 

★우생당(友生堂) / 1945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 42

개점 : 1945

 

 

3대가 이어온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제주 우생당

테마

 

우생당(友生堂)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의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觀德亭) 인근에 있는 오래된 서점이다. 우생당은 1945년 해방될 무렵 고() 고순하 씨가 개업한 이래 75년간 쉼 없이 가게 문을 연 제주뿐만이 아니라 신간 서적을 취급하는 일반서점으로서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서점이라 할 수 있다.

 

창업주 고순하 씨는 서점 운영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제주로 피난 온 계용묵, 박목월 등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후원하였고, 우생출판사를 차려 출판사업을 벌이는 등 1950년대 제주 문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60년대 중반 급환으로 타계한 후 부인이 맡아 운영하던 우생당을 장남 고형권 씨가 1970년대부터 2대 대표가 되어 운영해오다가 2010년에는 고형권 씨의 아들 고지훈 씨가 물려받아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문을 연 서점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업 이래 지금까지 쉼 없이 문을 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점은 어디일까? 역사가 오래된 책방으로는 1934년 금항당(金港堂)이라는 상호로 개업한 이래 현재까지 3대에 걸쳐 문을 열고 있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의 통문관(通文館)’이다. 통문관은 고서(古書)나 고문서(古文書)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헌책방 성격의 특수서점에 속한다.

 

그렇다면 2021년 현재 기준으로 신간 서적을 취급하는 일반서점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은 어디에 있을까? 그 서점은 바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다. 제주시 구도심의 중심가인 중앙로 로터리와 조선시대 제주목의 관아를 잇는 관덕로에 자리한 76년 전통의 우생당(友生堂)’ 서점이 그곳이다.

 

우생당은 1945년 해방될 무렵 고() 고순하(高淳河) 씨가 광복과 거의 맞물린 시점에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인 관덕정(觀德亭) 남쪽에서 개업하였다. 우생당은 해방 당시 제주도에서 발행하는 유일한 신문이었던 제주신보(齊州新報) 1947 2 24일 자 4 6단에 실렸던 광고에서 그 시작과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濟州道北濟州郡濟州邑內 初中各學校用國定敎科書 軍政法令集 朝鮮圖書 文具株式會社齊州販賣所 東亞日報社濟州道支局 學生社濟州道支社 紙文房具 書籍雜誌 敎育用品 友生堂 主 高淳河 鄭斗錫 電一七番

 

한자로 표기된 광고를 풀어보면 우생당은 초중등 국정교과서의 지정 공급처이자 미군정 법령집과 조선 도서의 판매, 문구제조업체의 제주 판매소, 동아일보사 및 학생사 등 언론잡지사의 제주도 지국(지사) 등을 겸하고 있음을 알린다. 또 우생당에서는 도서는 물론이고 문구류와 교육 용품까지 취급하고 있음을 광고하고 있다. 우생당의 위치는 당시 주소로 북제주군 제주읍이며 전화번호는 107번이고 서점의 대표[]는 고순하와 정두석(鄭斗錫) 두 사람으로 병기되어 있다.

 

이상의 광고 기사에서 우생당이 해방공간에서 제주도민의 교양과 학교 교육을 망라하여 담당한 문화공간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우생당의 역사와 관련한 글이나 기사에서 고순하 씨가 우생당을 창업한 것으로 소개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제주신보의 광고에 따르면 정두석이라는 인물과 공동창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하는 바로는 정두석은 우생당 광고가 나간 후 닷새가 지난 1947 3 1일에 촉발된 ‘3.1절 발포사건이후 우생당 경영에서 빠지고 고순하 씨가 단독으로 운영하였다.

 

1948 3월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고순하 씨는 제주시 남문통(지금의 남문로터리)에 있던 천주교 교육관으로 우생당을 옮겼다가, 1950년대 후반 무렵 원정통(지금의 관덕로)으로 이전한 후 근처에서 옮겨 다니다가 1970년대 들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고 3대에 걸쳐 책을 파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글의 제목에서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였지만, 사실상 현존하는 일반서점으로서는 우생당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사업가이자 문화후원자로 사는 삶을 추구했던 창업주

 

우생당은 좌우가 극렬하게 충돌하였던 해방공간 제주에서 문을 연 이래 한국전쟁과 종전 이후 전쟁의 참화로 인해 총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1960년 초반까지 제주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과 발자취를 남긴 문화공간으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한 증거는 창업주 고순하 씨의 삶의 행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으로 기억되는 것은 문인들과의 만남과 재정적 후원이다. 그는 우생당을 통해 벌어드린 돈을 전쟁 상황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인 문학인들의 활동에 아낌없이 지원하며 뒷받침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당시 제주도에는 피난을 온 저명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시인 박목월은 제주도에 거주하는 기간 중 우생당에 자주 들리는 등 서점은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특히 『백치 아다다』라는 소설로 필명을 떨친 소설가 계용묵(桂鎔默)과의 인연은 각별하였다. 계용묵은 잠시 머무는 피난처에 그칠 수 있었던 제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제주 문학 발전에 끼친 영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고순하 씨는 그러한 계용묵의 활동을 여러모로 뒷받침하였는데, 1952년 계용묵이 만들고 제주에서는 최초의 종합교양지였던 『신문화』의 발간비용을 후원했다. 1953년에는 계용묵의 주도로 『흑산호』라는 동인지를 발간할 때는 출판 비용 전액을 고순하 씨가 부담하였다.

 

고순하 씨는 후원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문화사업을 펼쳤다. 그는 우생출판사를 설립하고 계용묵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1953년부터 1956년 사이에 왕성한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우생출판사의 대표적인 출판물을 들자면 역서(譯書)로는 계용묵이 번역한 톨스토이의 『참회록』(1953), 스토우 부인의 『검둥이의 서름(톰 아저씨의 오두막)(1954), 괴테의 『화우스트』 등을 출간했다. 또한 계용묵의 수필집 『상아탑』(1955)도 출간하였으며, 계용묵의 주선으로 계용묵, 김동리, 허윤석, 황순원의 단편을 모은 『단편 4인 선집』도 발간하였다.

 

또한 고순하 씨는 문인뿐만 아니라 문학 지망생에 대한 지원도 펼쳤다. 1953 12월 도내 중대학생으로 구성된 동인 별무리에도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1957년에는 제주도 최초의 문화단체 기관지 『제주문화』와 1959년에는 무크지 「詩作業」을 창간할 때 발행인은 모두 우생당의 대표 고순하 씨였다.

 

이러한 고순하 씨의 활동을 종합하면 우생당은 단순히 책을 팔아 영리를 추구하는 서점에 머물지 않고, 제주 문학과 예술의 견인차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공교롭게도 고순하 씨가 우생당을 개업하면서 지은 상호의 뜻이 친구가() 생기는() ()’이라는 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현재 우생당의 3대 대표를 맡은 고순하 씨의 손자 고지훈 씨는 우생당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의 의미보다는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곳의 의미를 담으셨다고 생각해요.”라고 한다.

 

 

우생당의 내실을 다지면서 안정된 사업으로 이끈 아들

 

1950년대 제주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고순하 씨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타계하였다. 고순하 씨의 장남 고현권 씨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65년 무렵이었다. 고순하 씨는 생전에 부인 고() 여복희 씨와 슬하에 고현권, 희권, 의권, 회권, 량화, 화자, 경희 등 4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고순하 씨가 세상을 뜰 무렵 장남이 겨우 중학생이었으니 서점 운영은 부인 여복희 씨 몫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일곱 명의 자식을 건사하면서 서점을 운영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 1970년대 초가 되자 부인 여복희 씨는 서점 운영이 힘에 부치자 서점은 그만두고, 교과서 판매사업만 유지하려고 했다. 당시 대학 졸업 후 체육 교사로 근무하던 장남 고현권 씨는 그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우생당으로 돌아왔다. 우생당은 고현권 씨에게 있어서 선친의 사업체이기 이전에 고향(故鄕)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고현권 씨의 고향은 한짓골이라 불렸던 제주시 남문로(南門路)로 지금의 관덕로8길 일대이다. 한짓골 길은 1969년 인근에 중앙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제주시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로였고, 우생당도 한짓골에 있었다. 고현권 씨와 그 남매는 바로 이 한짓골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훗날 고현권 씨의 장남 고지훈 씨도 한짓골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이후 2대 대표로서 우생당의 경영을 맡게 된 고현권 씨는 사업체로서 우생당의 내실과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선친과 같이 문학 쪽에는 조예가 없었기 때문에 사업에만 치중할 수 있었다. 고현권 씨가 대표를 맡기 시작한 1970~1980년대는 경제개발로 인한 소득향상에 힘입어 교육 분야에서도 교과서는 물론이고 학원과 참고서 시장이 최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그 당시 서점은 돈이 제대로 벌리는 사업이었다.

 

그 덕분에 사업은 일로 확장하여 서귀포에 고형권 씨의 둘째 동생 고의권 씨가 운영을 맡은 서귀포 우생당을 설립하였다. 또한 1970년대 단층 건물이었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이래 1980년에는 4층 규모의 우생당 건물을 신축하였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여느 지역의 서점이 그랬듯이 제주시의 번화가인 중앙로 인근에 있던 우생당은 만남의 장소로 시민들의 인기를 끌었다. 비록 선친이 운영하던 당시 내로라하던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우생당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과 단골손님의 발길이 이어졌다.

 

 

‘우생당의 아들우생당의 사장으로

 

1대와 2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리던 우생당도 1990년대 들어서는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는 비단 우생당뿐만이 아닌 전국 모든 규모의 서점에 동일하게 닥친 위기였다. 가장 체감한 것은 인터넷 통신의 발달로 들어선 인터넷 서점의 등장이었다. 이제는 고객들이 굳이 발품을 팔지 않더라도 집안이나 사무실에 편히 앉아서 온라인으로 원하는 서적을 검색하고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오프라인 서점의 매출은 상대적으로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는 2000년대 이후 도서 할인 판매가 가능해지면서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본이 취약한 중소서점과 지방서점은 무한경쟁이라는 밀림에 던져졌다. 이는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결국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서점들의 폐업이 줄을 잇기 시작하였다. 위기는 그치지 않았다. 오프라인에서는 대형자본이 설립한 대형서점 체인의 등장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기존 지역 대형서점까지 구축하는 형세였다. 대형건물에 서점과 연계하여 다양한 복합시설을 갖춘 대형서점 체인은 지역의 매력적인 공간으로 등장하면서 상권을 장악하였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나마 제주도에는 대형서점들이 아직은 진출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버티고 있지만, 20~30여 년 전의 서점의 전성기는 더 이상 구가하기 힘들어 보이는 옛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엄혹한 상황에서 우생당의 가업은 3대로 이어졌다. 2010년 무렵 2대 대표 고현권 씨는 부인 김연선 씨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병간호를 맡게 되었다. 자연스레 서점 운영이 힘들어지자 당시 직장생활을 하던 30대 중반의 아들 고지훈 씨가 우생당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30대 중반이면 한창 자기의 경력을 굳히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경주를 기울여야 할 시기에 덜컥 우생당의 운영을 맡게 된 고지훈 씨는 지금까지 그저 우생당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전부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를 거쳐 대를 이어온 우생당은 그가 태어날 무렵 이미 30년이 되었고, 그가 물려받을 당시는 65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서점이었다. 이제는 우생당의 아들에서 우생당의 사장이라는 짐을 지게 되었지만, 그에게도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 우생당은 사업 이상으로 애착하는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고지훈 씨는 우생당의 운영을 맡으면서 매출을 두 배로 늘렸다. 그러나 그 실상은 온전한 서적의 판매보다는 제주도 내의 학원을 대상으로 학습지 매출을 늘리는 영업의 결과였다. 전체적인 매출은 늘었지만, 상대적으로 서점에서 판매하는 매출은 감소하였다. 그는 우생당 2층에 어학공무원 수험서전공 서적을 별도로 취급하는 매장을 차려 특화된 영업으로 타개해보려고 하였으나 이용자들이 줄면서 문을 닫았다. 기존의 인터넷 서점과 주문 즉시 다음날에도 받아 볼 수 있는 택배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오프라인 서점의 경쟁력은 도서의 분야를 막론하고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생당은 명절과 같은 연휴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 권의 책이라도 더 판매하기 위해 매일 문을 열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지경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첫째, 셋째 일요일에는 제주지역 서점들이 휴업하던 때에 비해 상황이 더욱 안 좋다. 고지훈 씨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일부 지역의 개성이 강한 독립서점들처럼 새로움을 모색 중이다. 물론 자본을 들이면 어렵지 않게 그러한 공간을 꾸밀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동기 부여와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우생당의 3대 대표 고지훈 씨는 어려운 때일수록 조급하고 섣부르게 덤비기보다는 조금 더디더라도 차근차근하게 우생당이 보여줄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갈 생각이다. 어느덧 75년의 역사를 지닌 우생당이 백 년이 되는 해가 되면 고지훈 씨는 현재 부친의 나이와 같은 70세가 될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서점을 개업하면서 친구가 생기는 집이라는 뜻으로 작명하였던 우생당의 뜻을 이어 장차 사람이 모이는 집으로의 도약을 위해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사업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